법륜스님/즉문즉설(정토회)

즉문즉설_법륜스님***제38편 기도문을 통한 참회기도에 대하여 1

Buddhastudy 2011. 9. 14. 18:13

  방송 보기: 정토TV

제 여식이 아직 나이가 많은데 아직 결혼을 못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기도를 해야되겠느냐고 여쭈어보니 제가 임신했을때, 키웠을 때 제 마음이 산란하고 마음이 복잡했다. 그래서 참회기도를 많이 해야한다는 기도문을 받았습니다.

* * *

지금 나이가 몇인데요? 34살이 많아요? 나는 49인데. 결혼 안 하겠다 그래요?
그~ 우리가 참선을 하는 사람은 이 간화선을 할 때는 화두를 가지고 하지 않습니까? 그죠? 화두를 참구한다. 그 모든 참선은 다 화두가지고 해야 되느냐? 그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묵조선 같은 것은 화두를 갖고 하는게 아니다, 이 말이오. 간화선만 화두를 갖고 한다. 달마선종, 또는 그 이후에 해능대사 이후에 이 조개선종 가운데서 이 임제계열, 임제종만 간화선에요. 우리 한국 불교는 선종중에도 임제계열이기 때문에 지금 화두를 갖고 공부하는 간화선을 한다 이거야.

그러니까 5가7종이 있는데 그 5과중에서 하나만 화두선이고 나머지는 다 다름 방식으로 참선을 한다. 수행법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참회수행법도 있다 이 말이오. 참회수행법에서 그냥 자기가 스스로 참회를 해도 되고, 마치 참선을 할 때 간화선이 화두를 가지고 하듯이 기도문을 가지고 참회를 하는 이런 수행법도 있다, 이 말이오. 우리 정토회에서는 참회를 할 때 그냥 참회를 하는 방식을 안취하고 뭘 가지고 한다? 기도문을 가지고 지금 하고 있다.

그래서 마치 참선을 하는 사람이 화두가 뭔지, 화두라는게 뭔지를 제대로 알아야 화두에 집중할 수가 있어요. 몰라야 화두지 알면 화두가 아니란 말이오. 그런데 우리는 화두가 무슨 뜻이에요? 이렇게 묻는단 말이오. 그럼 더 이상 화두가 될 수가 없다. 이런 말이오. 그런 것처럼 기도문도 여러분들이 받았을 때, ‘아’ 이렇게 기도문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사람도 있고, 도무지 나하고는 안 맞는, 나하고 상관없는 일처럼 이렇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다, 이거야.

그 기도문을 듣는 순간 ‘아~ 내가 이게 문제였구나.’ 이런 사람들은 기도문이 나한테 딱 맞다 이런 소리를 하고, 도대체 이 나하고 상관없는 소리같을 때는 ‘기도문 잘못 받았나? 딴 사람거 아니에요? 바꿔주세요.’ 이런 사람도 있단 말이오. 그러면 기도문을 받을 때 자기가 이렇게 딱 이해가 되는 사람들은 참회가 쉽게 되고, 기도문을 받았는데 도무지 나하곤 상관이 없는 것 같은 사람은 이 참회가 잘 안되죠. 절을 해도 그건 나하고 상관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럴 때는 사실은 그 기도문은 화두처럼 사실은 왜 이런 기도문을 주셨을까? 왜 나보고 이렇게 하라 그럴까? 이렇게 깊이 참구를 해야 된다 이 말이오. 절을 하면서,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게 틀렸다.’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나하고 관계없는 일이다.’ 이렇게 생각해도 안 된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돌아가서 수행 전체에 대해서 한 번 말씀을 드려보면요.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괴로운 사람이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것을 수행이라고 말한다. 여러 가지 속박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 이것저것들이 얽혀 머리가 아픈 사람들이, 그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서 자유로워지는, 그것을 수행이라고 한다.

그 수행의 목표는 불교적인 표현으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해탈이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다. 하나는 열반입니다. 모든 괴로움이 사라져버린다. 이런 얘기요. 같은 말이오. 그래서 해탈을 구하고 열반을 구하는 것이 목표에요. 그걸 요즘 말로 하면 열반이라는 것은 모든 괴로움이 없어졌다는 것은 완전한 행복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고, 모든 속박에서 벗어났다 하는 것은 완전한자유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완전한 자유와 행복이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스님, 저는 수행이 안되서 괴롭습니다.’ 이러면 말이 되나? 안되나? 말이 안 된다, 이 말이오. 왜? 있는 괴로움을 없애는게 수행인데, 수행이 안돼서 괴롭다 할 때는 수행이 괴로움을 만들었단 얘기 아니오. 그러면 이건 수행이 아니오. 참선을 해도 그건 수행이 아니고, 염불을 해도 수행이고 아니고, 경을 읽어도 수행이 아니고, 절에 와도 그건 수행이랄 수가 없어. 괴로움을 없애는 게 수행인데 그게 괴로움을 만들었다면 그거는 수행이 될 수가 없다, 이 말이오.

그러면 우리는 괴롭거나 속박을 받을 때 이 문제를 어떻게 풀려고 하느냐? 모든 사람이 다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 해요. 그러면 세상 사람이 다 수행하는 거 아닙니까? 모든 사람이 거기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데, 그 벗어나는 방법으로 사람들은 어떤 걸 추구하느냐? ‘해 주세요.’ 이런단 말이오. ‘부처님 애가 애를 먹이니까 괴로워죽겠는데 저거 어떻게 똑바로 좀 해 주세요.’ ‘돈 좀 벌게 해 주세요.’ ‘병 낫게 해 주세요.’ ‘남편 술안먹게 해 주세요.’ ‘바람 안피우게 해 주세요.’ ‘뭐 해주세요’. ‘뭐 해주세요.’ 이래요.

이 ‘해주세요.’ 하는 데는 두 가지 문제가 있어. 하나는 이 괴로움의 원인이 자기한테 있다는 거요? 밖에 있다는 거요? 밖에 있다는 거요. 두 번째는 그 해결의 주체가 자기라는 거요? 자기 밖의 어떤 존재라는 거요? 자기 밖의 어떤 존재라는 거요. 그러니까 괴로움의 원인도 밖에 있고, 그 해결해 주는 어떤 주체도 자기 밖에 있어. 하늘에 있든지, 구름 속에 있든지, 책속에 있든지, 저 밖에 있단 말이오.

그 밖에 있다고 생각하면 불교가 아니에요. 부처님은 그 괴로움의 원인이 밖에 있는게 아니라 자기 마음에 있다고 말했고, 그것을 해결의 주체도 자기 마음에 있는데도 그거 누가 해결하느냐? 해결의 주체도 자신이라고 했지 어떤 밖의 존재가 해결해 주는게 아니라고 했단 말이오. 그 이게 분명해야 이 사람이 불교인이냐? 아니냐 하는게 판가름이 나는 거요. 절에 다닌다고 불교인이다, 이래 말할 수가 없다 이거야.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다 원인이 밖에 있다고 말하고, 해결의 주체도 밖에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우리는 그 원인이 밖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전부 바깥을 탓하는 거요. 그래서 ‘누가 무엇이 나를 괴롭혔다,’ 이렇게 다 표현한다. 말할 때 ‘아이고, 남편 때문에 못살겠어요?’ ‘자식 때문에 못살겠어요.’ ‘돈 때문에 못살겠어요.’ 이렇게 말하는 거는 그 괴로움의 원인이 어디 있다? 밖에 있다. 우리 다 백%, 그렇게 ‘아니다, 절에 다니면서 자기한테 있다.’ 이렇게 생각은 해도 실제로는 밖에 있다고 하는 거요.

자기한테 있다면 누가 나를 괴롭힌다. 이런 말은 쓸 수가 없단 말이오. 그런데도 절에 다니면서 참선하거나 염불하거나 온갖 거를 하는 사람도 다 뭐라 그러냐? 누가 나를 괴롭힌다. 무엇이 나를 괴롭힌다.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면 괴로움의 원인이 밖에 있단 말이오. 지금도 여러분들 다 그렇게 생각하죠? 무언중에. 그런데 그 괴로움의 원인이 밖에 있는게 아니라는 거요. 밖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밖을 찾아 헤매는 거요.

이 종교 갔다가 저 종교 갔다가, 이 절 갔다가 저 절 갔다가, 이 사람 찾아 갔다가 저 사람 찾아 갔다가, 이 산 갔다가 저 산 갔다가, 이렇게 하는 이유가 어디 있냐? 그게 밖에 있기 때문에 그래. 두 번째는 이 해결의 주체도 밖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느님 믿었다가, 부처님 믿었다가, 산신 믿었다가, 화엄성종 불렀다가, 관세음보살 불렀다가, 지장보살 불렀다가. 하는 이유도 이 해결의 주체가 어디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밖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그런 원인도 자기에게 있고, 그 해결의 주체도 자기라는 거요. 이게 되야 불자라고 해요. 우리 다 이래 절에 다녀 법문 듣고 앉아 있어도 엄격하게 말하면 불자가 아니오. 뭐만 불자다? 이름만 불자고 모양만 불자요. 모양만 스님이지. 이런 입장을 분명히 해야 수행이 되. 그래서 우리가 수행문이라는 거를 수행하기 전에 반드시 읽게 한다 이 말이오. 모든 괴로움과 얽매임은 어디 있다? 자기 마음 가운데 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게 마음 밖에 있는 줄 알고 밖을 찾아 해맨다. 그래서 아무리 절에 다니고 아무리 수행을 하고 한다고 해도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해탈과 연관이라는게 자기한테는 해당이 안 된다, 이거요. 부처님의 수행하면 해탈하고 열반한다고 그랬는데 나는 왜 해탈과 열반을 어디 바늘 끝만큼이라도 맛을 못 보느냐 이거야. 왜 스님들은 머리 깎고 저렇게 오래 수행을 하는데, 왜 인격적으로 우리가 ‘아, 저런 게 해탈인가?’ ‘저런 게 열반인가?’ 할 만한 그런걸 보기가 힘드는가?

왜 사람들이 출가해서 스님들이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더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없어요? 있지. 그 사람들 중에 또 어떤 사람 있어? 못 깨달았다고 괴로워하는 사람 있어요? 없어요? 후회하고. 왜 그럴까? 그게 다 밖을 찾아 헤맨다. 그래서 그 안심인명이 밖을 찾고 있기 때문에 이게 본질적으로 될 수가 없다, 이거야. 이 입장을 분명이 해야 된다. 어떤 수행이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수행이 뭐냐? 이 기본 입장이 딱 잡혀 있어야 된다.

그러니까 참선할거냐? 염불할거냐? 참회할거냐? 주력할거냐? 이게 지금 중요한게 아니고, 일단은 수행이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은 어떤 입장을 가져야 되느냐? 이 방향, 가기 전에, 어떤 방향으로 가야 서울 가느냐? 먼저 방향을 먼저 잡아야 된다. 무조건 가는게 중요한게 아니고. 그래서 맨 앞에 나와있는 거요. 그럼 고 앞에 뭐가 나와 있어요? 삼귀가 나와 있죠. 삼귀가 나와있는 거는 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내가 옳다고 믿어야 뒤에 있는 수행, 모든 게 다 마음 안에 있고, 해결의 주체가 자기라는 걸 받아 들일 거 아니오. 부처님이 그렇게 가르쳤는데.

그래서 앞에 부처님께 귀의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귀의 하는 거요. 그러니까 부처님의 가르침 만난 게 너무너무 기쁘다. 부처님 제자 됨이 자랑스럽다. 그것이 삼보에 귀의한다는 것은 바로 다음에 있는 그 가르침의 요지인, 모든 것이 나로부터 나아가 나에게 돌아온다고 하는, 모든게 다 안에 있고, 해결의 주체도 나라는 것을 일단은 먼저 인정을 해야 된단 말이오. 인정을 하려면 삼보에 귀의를 해야 그걸 인정할거 아니오. 하느님께 귀의했는데 이런 게 인증이 안될거 아니오. 첫째 삼보에 귀의하고,

두 번째 그 가르침의 요지, 입장이 뭐냐? 입장을 분명히 해야 된다. 이 입장을 분명히 하는 건 한 번만 딱 들으면, 입장을 방향성을 딱 잡으면 그 다음 가기만 하면 되는데. 우리는 방향을 잡아줘도, 지금 이 법문 들을 때는 잡아줘도, 집에 가면 또 딴 방향으로 간다 이거요. 그래서 매일 아침에 기도하면서, 기도한다는, 수행한다는 거는 간다는 뜻이란 말이오. 정진은 가는 거란 말이오. 가기 전에 늘 뭐부터 조정해라? 방향성부터 먼저 이 서울로 향해 있나 이걸 먼저 점검해라 이거요.

그래서 수행문이라 해서 그걸 넣었단 말이오. 그래 이제 가야 되요. 가는데 어떻게 갈거냐? 가는데 여러 길이 있다 이거야. 버스타고 가도 되고, 기차타가 가도 되고, 걸어가도 되고, 말타고 가도 되고, 비행기 타고 가도 되고, 여러 가지 길이 있다. 즉 그것이 역사적으로 사람들이 그 갔던 길이 참선해도 되고, 염불해도 되고, 주력해도 되고, 독경해도 되고, 남방수행도 하는 관법을 해도 된다.

유치원에 비교하면 ‘마음이 괴롭다’ 이거는 뭐했다는 거요? 몸이 병났다, 이런 얘기요. 그런데 우리 몸이 자연적인 그 원상태로는 건강한게 정상이에요? 사람은 낳자마자 병드는게 정상이에요? 건강한게 정상이에요. 건강한게 정상인데 우리가 책을 가까이 보거나, 음식을 과다하게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술을 마시거나, 뭐 어떻게 했든, 이 몸이 자연의 상태에서 우리가 잘못 몸을 써서 어떻게 됩니까? 병이 나지 않습니까?

자연에 있는 짐승들 한 번 보세요. 사고로 총 맞거나, 어디 언덕에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거나.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제 수명대로 삽니까? 안삽니까? 살죠. 비만증이니, 무슨 위장병이니 이런 게 야생 동물한테 있습니까? 별로 없잖아요. 그런데 짐승들도 가축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단 말이오. 이게 운동부족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이 건강이 나쁘니까 뭐해라? 의사가 진찰을 해 보니까 약을 우선 급한 건 약을 좀 먹고. 그 다음 뭐해라? 운동을 해라. 운동을 해라 이 말이, 건강하기 위해서 운동해라 이 말이, 우리의 마음도 그래.

이게 원래 정상적으로는 마음이 괴로움이 없는 게 정상적인 거요. 그거 참 이해가 안 되죠. 괴로운게 정상이지, 어떻게 안 괴로운게 정상이냐? 안 괴로운게 정상인거는 저 개나 새보다 사람이 낫다면 개나 새보다는 사람이 덜 괴로워야 되나? 더 괴로워야 되나? 덜 괴로워야 되죠. 그러니까 이게 안괴로운게 정상이오. 안괴로운게 정상이라는 거는 마음의 본바탕은 부처다 이런 얘기요. 그 괴로움이 없는 자애로운 상태를 뭐라 한다? 부처라고 한다.

그런데 마음을 잘 못써서, 마음이 병든게 나타난게 뭐다? 괴로움과 번뇌란 말이오. 그러니까 이게 치유를 해야 되. 그 치유하는 게 뭐냐? 수행이라는 거다. 그러면 수행을 해서 어떤 새로운 인간이 되는 거야? 수행을 한다는 것은 본래대로 돌아간다는 거야. 어떤 새로운 거로 간다는, 그게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지만, 본래대로 간다는 것은 확실한 거죠. 있었던 자리로 돌아가니까. 물들기 이전의 자리로, 돌아가는 거란 말이오.

그런데 어떻게 수행하느냐? 어떤 운동을 해야 되느냐? 축구선수한테 물어보면 뭐하면 좋다 그래? 축구하는게 좋다 그러고, 농구선수한테 물어보면 농구하는게 좋다 하고, 조깅하는 사람한테 물어보면 뛰는게 좋다 그러고, 산책하는 사람한테 물어보면 뛰면 힘빠지고 뭐하는 게 좋다? 천천히 걷는게 좋다하고, 이렇게 그 물었을 때 가각 그 사람대로 대답을 해. 그럼 그 틀린거 아니오. 그러나 그게 농구가 더 좋다, 축구가 더 좋다, 조깅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어. 그 사람은 그걸 했기 때문에 그게 좋은지 말하지, 그 사람 거짓말 한 것도 아니오.

그런것처럼 참선한 선승한테 가서 여러분들이 물으면 뭐라 그럴까? 당연히. 참선하라 그러고. 평생을 염불한 사람한테 물으면 그 사람 참선하라 그러겠어? 염불하라 그러겠지. 티벳스님한테 물으면 주력하라 그러겠지 참선하라 그러겠어? 남방스님한테 물으면 위빠사나하라 그러겠지 그 사람이 참선하라 그러겠어? 그러니 그 사람들은 그걸 어릴 때부터 해 왔다 이거야.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물어도 그걸 가르쳐 주는게 당연한거 아니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거짓말한게 아니라 그 사람들은 자기 식대로 이야기 한 거란 말이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받아들일 때, 어느게 좋고 어느게 나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거요. 그런데 우리는 수행은 탐진치 삼독을 버려야 되는데, 이 탐진치 삼독을 쥐고 욕심으로 수행을 하기 때문에, 그걸 또 욕심내서 참선하는 게 좋으냐? 염불하는 게 좋으냐? 어느 게 더 빨리가나? 어느 게 더 큰 걸 얻느냐? 이런 식의 생각을 하기 때문에 눈이 굴레굴레 해서 여기한번 갔다가, 저기 한번 갔다가 ,그래서 종파를 만들어서 이게 낫다 저게 낫다, 이게 정통이다, 저게 정통이다. 이렇게 삼는다 이거야.

그러면 몸을 건강하기 위해서 그냥 자기 건강을 위해서 운동하는 사람은 자기는 축구를 하더라도 딴 사람이 물으면 축구하는게 좋다고 얘기해 주더라도, 축구만이 최고다. 이렇게 말은 안 할거 아니야. 그지? 그런데 이게 자기 건강을 넘어서서 자기 패를 만들고 패거리를 형성하고, 이걸 통해서 돈도 좀 벌어야 되고, 세력도 좀 모아야 되겠다 할 때는 당연히 뭐라고 말해야 될까? 축구가 최고다. 딴 거하지 마라. 이게 최고다. 이거 해야 된다. 이렇게 말해야 될거 아니오. 실제로 우리 운동에서도 그렇게 말하나? 안하나? 하잖아.

이거는 이미 벌써 여기서 세력을 추구하거나, 인기를 추구하거나, 이럴 때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이오. 그래서 생긴 게 종파에요. 그 중에 아무거나 하면 된다. 이러면 종파가 성립하겠어? 안하겠어? 안하겠지. 딴 거 다 틀리고 이게 최고다, 이래야 사람이 혹 할 거 아니오. 그 정도도 괜찮아. 이제 점점가면 어떻게 되느냐? 운동을 자기 건강을 위해서 운동하는게 아니고, 돈 벌기 위해서 운동을 해. 인기 끌기 위해서 운동을 해. 그게 뭐다? 프로 선수요.

이 프로 선수는 운동을 과다하게 해. 특별하게 사람이 못하는 기교를 만들어 내야 뭐가 생긴다? 인기가 생겨. 그런데 실제로 프로선수가 오래 살까? 오래 못살까? 오래 못살아. 그 사람은 그런 과다한 어떤 행위를 하기 때문에 실제로 건강은 뭐한다? 헤쳐. 그러나 그는 그걸 통해서 인기를 끌고, 돈을 모을 수가 있어. 이건 전부 밥만 먹고 그것만 하는 거요. 운동을 건강을 위해서 하는게 아니고, 밥만 먹고 그것만 전문으로 해. 그래서 거기 후원자, 지지자 세력을 모아.

그걸로 돈을 벌고 그걸로 세력을 모으고 한다 이 말이오. 그런데 그거를 지지하는 청중, 소위 구경꾼은 자기는 축구나 농구는 한 번도 안 해보고, 운동장에 가서 술 먹고, 응원하고, 고함지대고, 패싸움 하고 그런단 말이오. 그럼 그 사람은 건강해지나? 안해지나? 안해진다. 그 사람은 건강을 해친다. 박찬호가 방어률이 얼마다, 누가 홈런을 몇방 쳤다, 박세리가 몇 등을 했다. 이런 얘기 아무리 해도 건강은 안해진다.

그래서 운동의 주체와 소위 말해서 전문운동가와 후원세력, 지지세력이 이리 나뉜다 이거야. 그것처럼 수행도 어떻게 되느냐? 세월이 흐르면서 전문수행가가 나와서 밥만 먹고 뭐만 한다? 수행기법만 전문으로 익혀. 그래서 그 사람은 얼마나 잠을 안잤다더라, 얼마나 등허리를 땅에 안붙여닸더라. 한번 앉았다하면 며칠을 꼼짝을 안한다더라. 절을 십만배를 했다더라. 경을 십만독을 했다더라, 뭐 주력을 해가지고 공중에 떴다더라. 그러니까 우리는 ‘와~’ 이래가지고 거기에 패거리가 된다 이 말이오. 그래가지고 누가 더 잘하냐? 누가 더 세냐?

이런 것처럼 어느 게 더 수행이 잘 되냐? 성철스님이 도가 높냐? 구산스님이 도가 높냐? 달라이라마가 높을까? 뭐 누가 높을까? 이런 생각이 우리들 속에 늘 있단 말이오. 그래서 거기다 돈 내고, 세력모아 지지해줘. 그러니까 축구게임할 때 이게 이기냐? 저게 이기냐? 싸움하듯이 우리도 종파 사이나 아니면 조계종 안에도 어느 스님 편들어 싸우는데 여러분들 동원하나? 안하나? 동원하잖아. 왜? 패니까.

그렇다고 여러분들에게 수행에 도움이 되느냐? 여러분들이 인생에 도움이 되느냐? 마치 응원하는 사람이 건강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듯이, 그건 아무 인생살이에 도움이 안 된다. 자기 인생에. 대리만족만 했지. 지금은 불교의 문제점이 뭐냐? 여러분들은 수행의 주체가 아니라는 거요. 출가한 스님들은 프로 수행자가 돼 있다 이 말이오. 밥만 먹고 수행만 하는 사람. 그러니까 그 사람들도 마치 프로선수가 자기 건강을 해치는 것처럼 인기는 있을지 모르지만, 자기 건강을 해치는 것처럼 그 사람들이 기법으로 인기는 있을지 몰라도, 자기 인생에 구체적으로 부딪쳐서, 다시 말하면 같이 한 번 살아보면 먼데서 볼 땐 좋은데, 살아보면 정말 저 사람이 자기 인생에 대해서 초월해 있느냐? 의심이 된다. 그러니까 자기 문제도 못한다 이거야. 자기 구제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여러분들은 지금 패를 형성해서 지지를 하니까 여러분들은 더욱 말할 것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