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정토회)

즉문즉설_법륜스님***제42편 108배와 실생활에서 번뇌가 생길 때

Buddhastudy 2011. 9. 20. 2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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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백일기도를 처음 시작하게 됐는데요. 백팔배할 때 또 명상에 들어갈 때 왜그리 망상이 많이 들고, 어제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생각 생각들이 왜 그렇게 꼬리를 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저를 괴롭게 하고요. 또 실생활에 이렇게 살아가면서 남의 얘기들을 다른 사람에게 꺼낼 때, '아, 이제는 남의 흉이나 참견은 하지 말아야지'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그 다음에 또 다시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고 있는 저를 발견할 때 왜 이렇게 사는지 그런 제가 한없이 미워집니다.

* * *

우리가 명상을 한다고 가만히 이렇게 앉아 있으면 몸과 마음이 편안해야 되는데, 머릿속에서는 지나간 옛날 생각, 또 지금 생각, 또 미래에 대한 여러 계획들, 상상들, 이런 것들이 끝없이 강물이 흐르듯이 지나가죠. 그걸 우리가 번뇌다 이리 말하는데. 번뇌가 끝없이 일어나니까, 머리를 아무리 이렇게 이렇게 흔들고, 없애버리려고 해도 안 된다. 절을 할 때도 마찬가지. 왜 그러냐? 어떻게 하면 되느냐? 이런 질문인데.

봄에 밖에 나가보면 나뭇가지에서 꽃이 핍니다. 또 파란 잎이 돋아요. 가지는 시커먼데, 거기서 나오는 꽃은 너무너무 예뻐요. 어디서 저런 꽃이 나올까? 거기서 피는 잎은 너무너무 이뻐요. 어디서 저것이 나올까? 참 신기하죠.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꽃피고 그렇게 잎이 나올 수밖에 없는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가 바깥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 속에 그 나뭇가지 속에 그러한 인연, 그러한 원인이 있어서 그런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원인이 없이 어떤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럴 때 우리가 결과만을 갖고 원인을 모를 때, 신기해하거나, 신비해 하거나, 또는 그걸 갖고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그런다. 그러나 그 원인을 알면 하나도 그것은 당황할 일도 아니고, 신비하게 생각할 일도 아니다. 옛날 사람들은 일식이 일어날 때 너무너무 놀라서 불계가 있어서 해를 잡아먹는다. 그래서 제사를 지내고 그랬단 말이오. 그러나 지금은 그 원인을 알죠. 태양과 지구가 일직선상에 놓일 때, 그 지구의 그림자에 의해서 태양이 가린다. 그래서 안보일 때가 가끔 있다.

이렇게 원인을 알면 놀랄 일도 아니고, 또 신비할 일도 아니죠. 이런 걸 우리가 과학적인 태도다. 이렇게 말해요. 그럼 불교라는 것도 바로 그런 거예요. 이 마음, 또는 정신적인 어떤 현상에 대해서 사람들은 잘 모르니까 거기에 대해서 놀라거나, 신비해 하거나, 당황하거나 이러는데, 그것을 아주 분석적으로, 그리고 아주 깊이 통찰해서, 그 원리를 잘 알기 때문에 놀라지도 않고, 신비해 하지도 않고,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서 그 원인을 제거시키면 그 결과도 사라진다.

이렇게 하는 것이 수행이에요. 그럼 우리가 딱~ 앉아서 명상을 할 때, 명상은 그냥 이렇게 가만 앉아 있는게 명상이 아니에요. 명상에는 그것이 무엇이든 과제가 있습니다. 호흡을 관찰한다 하고 수식관, 호흡을 관하는 그러한 명상을 할 때는 숨이 들어가고, 숨이 나오는 것을 지켜봅니다. 들어갈 때 들어가는 줄 알고, 나올 때 나오는 줄 알며, 깊을 때 깊은 줄 알고, 얕을 때 얕은 줄 안다. 그 호흡에 깨어 있다. 그럼 그것에 정신을 오로지 거기에 집중을 해가지고 거기에 깨어 있는 거요.

만약에 화두를 든다면 그 화두의 집중하는 거요. 만약에 우리 몸에 일어나는 감각을 관찰하면 그 감각에 집중하는 거요. 그 과제가 무어냐에 따라서 사람들을 이름을 이것저것 붙이지만은 원리는 어떤 주어진 과제에 정신을 하나로 모아서 거기에 집중한다. 거기 집중한다는 것은 그 상태에 깨어있다, 이 말에요. 이렇게 딱~ 거기에 집중을 할 때, 방에 그 집중이 안 되도록, 정신을 딴 데 뺏기는, 그 마음을 뺏는게 있는데, 첫째가 이 바깥 경계에요.

그래서 마음을 딱 집중하고 있는데, 옆에서 자꾸 뽀지락 뽀지락 뽀지락 뽀지락 가방을 꺼내 가지고 뭘 자꾸 만지거나, 핸드폰 소리가 들리거나, 귀에서 소곤소곤 옆에 사람하고 얘기하거나 이런게 들리면 신경이 쓰여요? 안쓰여요? 신경이 쓰이지. 옆에 소리에 마음이 뺏겨. 이렇게 법문을 듣는데, 어떤 사람이 여기 나와 가지고, 뭘 올리고, 여기서 삼배를 하고, 이러면 법문 듣다가 그쪽으로 마음이 뺏겨요 안 뺏겨요? 뺏기지. 이렇게 눈에 보이는데, 귀에 들리는데, 코에 냄새 맡는데, 혀에 맛보는데, 몸에 감촉에 이렇게 자꾸 뺏겨.이 바깥 경계에 마음을 뺏겨요.

그러니까 마음을 바깥경계에 안뺏겨야 되. 눈에 뭐가 보이든, 귀에 뭐가 들리든, 코에 냄새가 뭐가 나든, 혀의 맛을 뭐가 보든지, 몸에 감촉이 어떻든지, 그건 그대로 놔 놓고, 딱 자기 집중마음을, 마음을 모아서 집중을 해야 되. 그런데 바깥 경계가 없으면 좋겠는데,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거 아니죠? 그죠? 바깥에 자동차 소리가 들리지 마라. 아~ 자동차 소리 저게 왜 자꾸 들리노. 저게 안 들렸으면 좋겠는데. 이럴수록 자동차 소리가 더 잘 들려요? 안 들려요? 더 잘들려요. 저거 안들렸으면 좋겠다. 하면 그 계속 들려요.

그런데 호흡에 딱 집중을 하다보면 자동차 소리는 있지만은 그 자동차 소리가 내 집중을 방해하지 못할 때가 있어. 그럴 땐 자동차 소리가 거의 안 들려. 소리가 없어서 안들리는 거요? 아니오. 있어도 집중을 방해하지를 못해. 그런데 초심자는 이런 외부경계가 자꾸 정신집중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래서 눈을 감는 거요. 눈을 감아 버리면 보이는 것에 마음을 안 뺏기죠? 그 다음에 조용한데 가서 하는 거요. 다 조용하니까 귀에 안뺏기는 거요.

뭐 특별히 냄새날 일 없고, 뭐 먹으면서 하지 않으니까, 명상할 때. 누가 옆에 와서 쿡쿡 찌르거나 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외부 경계에 덜 뺏기죠. 그래서 우리가 조용한 장소를 선택하는 거요. 그런데 조용한 장소에서 명상을 하는 것은 온전한 건 아니에요. 이게 초심자가 그렇게 하지 연습이 되면 저자에 앉아서도 어때요? 거기에 마음을 뺏기지 않아야 된다. 이런 얘기요. 이 첫째 마음을 뺏어가는게 바같 경계에요.

두 번째는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이에요. 앉아 있으면 다리가 저리죠. 허리가 아프죠. 그러면 그 다리 절이는데 자꾸 마음이 뺏겨. 그래서 집중이 자꾸 떨어죠. 펴야 되나? 오므려야 되나? 자꾸 이런 생각이 들고, 앉아 있으면 얼굴이 간질간질 하고, 얼굴을 무슨 벌레가 무는 것 같기도 하고, 뭔가 자꾸 움직이고 싶어. 그것이 집중을 못하게 한다. 마음을 뺏는다. 그러니까 그럴 때도 어떠냐? 몸에 어떤 감각이 일어나든지, 다리가 저리든지, 얼굴이 간지럽든지, 허리가 아프든지, 그건 놔 놔버려라. 개이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호흡에만 집중한다. 그냥 놔둬버려.

세 번째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생각이 자꾸 떠올라. 앉아 있으면, 또 내일 뭐해야지. 뭐해야지 하는 이게 일부러 생각하려면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데, 온갖 아이디어 좋은 게, 연필 있으면 옆에 써놓고 싶을 정도로 막 떠오른다. 조금 전에 있었던 사건, 이런 것도 떠오르고, 이것이 마음을 뺏어 가버려요. 거기 끌려가서 한참 갔다, 오~ 하고 보면, 자기가 꿈속에 빠지듯이 한참 끌려 가있어. 앉아가지고 한참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거기 빠져있다가, 오~ 내 마음을 빼앗겼잖아. 호흡은 언제 놓쳐버렸는지 몰라.

그럼 이렇게 번뇌가 일어나, 즉 몸이 있기 때문에 감각이 있고, 바깥에서 저렇게 소리와 모양이 있고, 우리들의 머릿속에는 늘 생각의 흐름이 있어. 이건 ‘없어라’ 한다고 안 없어져. 이런 감각이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 한다고 안 일어나는 게 아니야. 이런 생각 아나 떠올랐으면 좋겠다 한다고 안 떠오르는게 아니야. 차가 다니니 소리가 있고, 몸이 있으니 감각이 있고, 우리들에게 의식의 세계, 많은 이제까지 경험이 거기에 쌓여있기 때문에, 눈만 감으면 마치 생방송이 멈추고 뭐가 돌아간다? 녹화 방송이 돌아간다. 막 돌아가는 거요.

그럼 그럴만한 이유가 원인이 있어서 그런 게 나타난다 이거야. 그런데 그걸 나타나지 마라 한다가 안나타나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거기에 신경을 쓰지 말아야 되. 왜 나타날까? 안 나타났으면 좋겠다. 머리를 흔들고, 그럴수록 더 나타난다. 그건 마치 방안에 먼지를 보고, 먼지를 쫓는다고 빗자루 갖고 먼지를 털면 털수록 먼지가 더 나는 것과 같다. 가만 내버려 둬버리면 저절로 가라앉는다. 그러니 딱~ 화두를 들거나, 호흡을 집중하거나 하면 소리가 들리든지 말든지, 몸에서 어떤 감각이 일어나든지 말든지, 몸을 움지이면 안 돼.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떠오르든지 말든지, 거기에 빠지면 안 돼. 그냥 주어진 과제만 딱 하는 거다.

그럼 초심자는 자꾸 놓치게 되. 놓치면 또 돌아오고, 놓치면 또 돌아오고, 놓치면 또 돌아오고. 이렇게 하면 이제는 온갖 생각이 떠오르더라도 그것이 내 집중을 방해하지 않아. 바깥에서 소리가 들려도 내 관찰을 방해하지 않아. 몸에서 통증이 있어도 통증은 통증이 있을 뿐이고, 나는 딱~ 거기에 집중이 된다. 그러면 마음은 고요해지고, 점점점점 아주 맑아지고. 고요해지고, 맑아지고. 그렇게 되는 거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번뇌가 일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움이다.

그런데 이 번뇌가 일어나지 않아야 되는데, 왜 일어날까? 나는 왜 앉으면 이런 생각이 날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번뇌에다가 번뇌를 더하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그것은 흐르는 물처럼 가만히 놔 놓고, 딱 주어진 수행의 과제에 집중해야 된다. 그러면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잠들게 된다. 두 번째 절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절을 할 때는 뭐든지, 과제가 있어요. 뭘 과제로 삼아서 하느냐 이게 중요한 거요.

절을 하면서 호흡을 관한다. 이게 과제냐? 절할 때는 그게 과제가 아니야. 절할 때는 기도문이 과제에요. 명상을 할 때는 화두를 받은 사람은 화두가 과제고, 호흡관을 할 때는 호흡을 관찰하는 게 과제고, 감각을 관찰할 때는 감각을 관찰하는 것이 과제고, 절을 할 때는 현재 우리 정토회 에서는 뭐가 과제냐? 기도문이 과제에요. 하심 하겠습니다. 이렇게 기도문을 받았다 그러면, 절을 하면서 하심 하겠습니다. 하는 것이 과제에요.

그럼 하심 하겠습니다. 이건 집중하는게 아니고, 하심 하겠습니다라는 과제를 어제 하루생활을 돌아보면, 내가 실지로 그래 못했어. 내가 나를 숙이겠다 하고 과제를 받아놓고는 상대편에게 안 숙였어. 또 내가 잘났다고 뻥뻥 고개를 쳐들고 소리를 쳤다, 이거야. ‘아~ 내가 고때도 놓쳤구나.’ ‘야~ 고때도 놓쳤구나.’ ‘남편이 얘기할 때 그때도 내가 놓쳤구나.’ 놓쳤으니까 어때요? ‘아이고 죄송합니다.’ 내가 잘못했다 잘 했다는게 아니오. 주어진 과제를 딱 알아차려서 실천해야 되는데 놓쳐버린 거요.

그러니까 그 과제를 지키지 못한 것을 뉘우치는 거요. 알아차리는 거요. 하아~ 내가 또 잘났다고 나를 세웠구나. 만약에 이 과제가 없으면 어떠냐?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어요. 당연히 그렇게 자기가 하는 줄 알아. 그런데 그 과제가 있으므로 해서, 그 과제를 자기가 어기게 된단 말이오. 그러니까 그것을 뉘우친다, 이 말이오. ‘아~ 내가 이걸 놓쳤구나.’ 그러니까 참회할 때 간절해지는 거요.

‘아~ 이걸 내가 놓쳤구나. 죄송합니다.’ 하고. ‘숙이겠습니다, 숙이겠습니다, 숙이겠습니다’ 이렇게 하는게, 절하는게 아니고, 숙인다 하는 그 과제에서 그걸 중심에서, 그게 계율이라면 그 계율을 어긴 자기를 돌이켜 반조하는 거요. 반조. 돌이켜 보면서 ‘아~ 내가 그걸 놓쳤구나.’ 참회라는 것은 잘못을 알아차리는 거요. ‘캬아~ 나는 왜 그렇게 바보같이 이것도 못하나.’ 이거는 참회가 아니고 후회에요. 후회. 후회는 부정적인 마음이에요. 이걸 불성법이라 그래. 후회는 분석하면 자기는 잘못을 안해야 되는데 잘못을 했다. 잘못한 자기를 자기가 용서를 못하는 거요. 잘못한 자기가, 자기가 봐도 너무 부끄러워, 꼴 보기가 싫어. 이게 후회의 마음이에요.

참회는 그냥 ‘아~ 내가 그걸 잘못했구나.’ ‘아 그걸 내가 놓쳤구나.’ 그냥 그 상태를 사실대로 알아차리는 거요. ‘아 그걸 내가 놓쳤구나’ 하고 알아차리면 그 알아차린 뒤에 자동적으로 따라 붙는 마음이 뭐냐? 다음엔 안 놓쳐야지. 이게 원이에요. ‘아~ 놓쳤구나.’ ‘다음엔 안 놓쳐야지,’ ‘아~ 내가 또 넘어졌구나.’ ‘일어나야지.’ 이게 연결되있는 거요. 그래서 ‘참’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치는 거요. ‘회’란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맹세다.

이것은 잘못한 자기들을 합리화해서 나만 그러나? 자긴 안그러나? 이것은 잘못을 합리화 하는 거요. ‘아이고, 병신같이 나는 왜 자꾸 잘못하노?’ 이것은 잘못한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는 거요. 참회는 그냥 그걸 알아차리는 거요. 잘못을 잘못으로 알아차리는 거요. ‘오 내가 잘못했구나.’ 그러니까 다시 도전을 하는 거요. 다음에는 제대로 해 봐야지. 그것뿐이오. 그러기 때문에 절을 하는 거요. ‘내가 잘났다 하면’ 고개를 쳐들잖아. 그죠? 허리를 뻣뻣이 하고 고개를 쳐드는데.

‘어! 그걸 내가 잘못했구나’ 할 때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숙이고,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댄다. 나를 완전히 굽혀버린다. 몸동작을 그렇게 하는 것은 마음에서 놔버린다. 그럴 때 딴 번뇌가 별로 일어날게 없어요. 거기 딱 집중이 되 있기 때문에. 그런데 그런 과제를 중심으로 안하고, 그냥 엎드려서 절을 하니까. 이생각도 났다가, 저 생각도 났다가, ‘내가 뭐 하러 절 하노?’ ‘절한다고 뭐가 되노?’ ‘지는 뭐 잘했나?’ 뭐 이런 생각하면서 쿵덕 쿵덕 쿵덕 쿵덕. 이렇게 절을 한단 말이오.

그러니까 절은 하지만은 절을 하기 때문에 운동이 되니까, 몸은 건강해요. 또 스트레스도 좀 풀려요. 그래서 아무생각도 없이 절을 해도 효과가 있어요. 그런데 인생의 변화는 안와요. 마음의 변화가 와야 되는데. 이렇게 참회를 하면, 과제를 가지고 참회를 하면 알아차려요, ‘아 내가 그걸 잘못했구나. 다시 해봐야지’ ‘아~ 내가 그걸 놓쳤구나. 다시 해봐야지.’ 그러니까 그 다음에 그 일이 탁 일어났을 때 비록 어기더라도 어때요? 그걸 하려고 하는 의지가 더 강해지는 거요. 그 다음 날 아이고, 또 놓쳤네. 그 다음에 또 놓치면 ‘또 놓쳤네.’ 또 놓쳤으니까 ‘나는 10번을 놓쳤으니까 나는 안 돼.’ 이거는 참회가 아니오. 그건 부정적 생각이오. 백번 안 되면 백한 번째 하는 거요.

그럼 이게 안 될수록 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해지기 때문에, 어느 순간에 딱 알아차리게 되요. 안 숙여 지는 마음을, 그 자리에서 안 숙이는 그 순간에 탁 알아차리는 거요. ‘아니’ 할 때 벌써 마음이 딱 알아차리면 ‘아~ 예.’ 이렇게 바뀌어 버려요. 그러면 ‘아니,’ 할 때는 마음이 콱 답답하다가 ‘아~ 예.’ 한 생각 그 자리에서 바로 돌려버리면 탁~ 편안해 져버린단 말이오. 그러니까 자기가 체험을 하는 거요. ‘야~ 마음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그런데 그 다음에 또 될거 같은데 고다음에 또 안 돼.

그런데 처음에는 백번이 안 되다가 한번 됐다면, 그 다음에도 안 되지만은, 그러나 그 다음에는 오십 번 만에 한 번되고, 그 다음에는 열 번 만에 한 번 되고, 그 다음에는 다섯 번 만에 한 번되고. 그럼 변하고 있어요? 안변하고 있어요? 변하고 있지. 그 다음 두 번 만에 한번 되고. 그 다음 네 번 됐는데 한 번 안 되고, 열 번 되는데 한번 안 되고. 안 되는 경우가 있기는 마찬가지지만은 처음에는 대부분이 안 돼고 어쩌다가 되고. 나중에는 대부분이 되고 어쩌다가 안 되니까. 안 되는 경우는 아직 있지만은, 그러나 삶은 많이 바꿔버려요.

뻣뻣한 여자가 그 다음 어떻게 되 버렸다? 아주 보들보들 한 사람이 되 버렸다 이거야. 뻣뻣한 남자가 나긋나긋하게 되 버리는 거요. 아주 부드럽게 되. 그렇다고 힘이 없는 게 아니에요. 마음이 길이 들어서 아주 부드럽게, 아주 유연하게, 이렇게 딱 됐단 말이오. 그러니 첫째 자기가 좋고, 둘째 상대가 봐도 ‘오~ 죽을 때가 다 되가나? 요새 뭔가 변했다.’ 왜냐하면 이 마음 바뀌는게 어렵기 때문에, 옛날 사람들이 이건 죽어야 바뀌지, 죽기 직전에 바뀌지 그건 못 바꾼다. 천성은 못 바꾼다.

이래서 천성이 바뀌면 뭐라고 한다? 저게 죽을 때가 다 되가나? 이런 소리를 했는데. 수행은 죽지 않고도 마음을 바꾸는 거요. 그래서 다시 태어난다. 그래서 이 법명을 받는 이유가 이름을 새로 받는다 이거야. 몸을 바꾸지 않고도 새로 태어난다 이거야. 이렇게 자기를 자기 운명을, 쉽게 얘기하면 사주팔자를 바꿔버리는 거요. 그렇게 우리가 공부를 해 가야 합니다.

한 없이 자기가 미워진다. 자기를 미워하는나 남을 미워하는거나 똑같습니다. 남을 미워하는 것은 남이 내 맘대로 안되는 거고, 자기를 미워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안되는 거요. 똑같은 심리 현상이오. 화를 내는 거는 남이 내 맘대로 안 될 때 일어나고. 후회를 하는 거는 내가 내 맘대로 안 될 때 일어나는 거요. 그런데 남도 자기도, 자기 맘대로 하려고 그러면 안 돼. 일단 일어난 걸 받아들여야 되.

실수를 해버렸으면 실수해버린걸 문제 삼으면 안 돼. ‘아 틀렸구나.’ 그거로 끝나야 되. ‘다시 해 봐야지’ 이렇게 되야 되. ‘왜 바보같이 난 이것도 못할까?’ 이건 부정적 생각. 이건 좌절. 절망, 이렇게 되는 거요. 그러면 삶이 어두워지고, 생기가 없어지는 거요. ‘다시 해봐야지.’ ‘아~ 요거 틀렸네. 새로 해보자.’ 이렇게 되니까, 사람이 생기가 돌고, 희망이 있고 그런 거요. 얼굴이 밝아지고. 비록 지금도 계속 뭐는 하고 있더라도? 실패를 하고 있어도 희망이 있고, 얼굴이 밝고 그런 거요.

그래서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가 되는 거요. 실패가 좌절로 안가고, 실패가 성공으로 가는 거요. 애들, 저런 애들 자전거 타고 싶다 그래가지고 자전거 줘 보면, 처음에 탈 때 많이 넘어져요? 안 넘어 져요? 넘어지지. 그런데 애들은 무르팍 깨가면서도 죽기 살기로 하루 종일 재미있게 거기 붙어 있잖아 그죠? 내~ 넘어지는데도 거기 붙어 있다 이 말이오. 그 애들 절대 비관적이지 않잖아. 그게 바로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오.

넘어지고 넘어지고 넘어지고 넘어지는게 결과적으로 보면 어디로 가는 과정이다? 타지는 과정에 속한다. 왜 넘어지는 것이 타지는 과정이 되느냐? 그게 낙관적이기 때문에. 넘어지면 또하고, 넘어지면 또 하고, 넘어지면 또 하고 그러지. 자전거를 발로 차고, 집어 던지고, 나는 안 되네 하고, 그래 안한다 이거야. 넘어지면 또 일어나 타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 타고, 또 일어나 타고, 그럼 금방 타지는 거요. 그런데 욕심이 앞서면 어떤다? 세 번, 네 번, 해보고 안 되면 성질을 내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