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일묵스님_팔정도

팔정도수행 바로알고 내려놓기_제17회 중도와 화합과 소통(마지막회) (39:31)

Buddhastudy 2011. 12. 4.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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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항상 이거에 부처님께서 법문하시는 건 항상 균형이 잡혀져있습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지 않고, 그때그때 가장 적당한 법문을 하신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중도라는 거는 요즘 말로하면 균형감각이라고도 말할 수 있어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가장 적절한, 어떤 상황에 맞게 이야기하는 거다. 이렇게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올바른 견해의 중, 중에 의한,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그런 견해에 의해서 그러면 이거를 완성해야 될 거 아니에요. 우리가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우리 삶에서 이렇게 될 수 있도록 해야 되잖아요. 여러분들이 사물을 볼 때 항상 집착을 하거나 그것이 마치. 그러잖아요. 우리가 살아가는 것도 내가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잖아요. 이것도 그 속에는 상견이라는 견해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잘못된 견해가.

 

그래서 이런 것들을 버리게 하는 실제로 이게 우리 삶에서 증득이 되기 위해서 그것을 실천적으로 하는 그것이 바로 팔정도로 정리가 됐다. 팔정도로 부처님께서 법문을 하신 겁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는 그때 당시에는 너무 사람들이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것은 이건 너무 화열하고, 보통 범부들이 하는 거란 말이에요. 이거는 별로 우리에게 이익을 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즐기는 거에 불과하단 말이죠. 발전을 이끌어내는 것도 아니고. 옛날에 수행자들이 감각적 욕망을 멀리하는 거는 기본적으로 했는데, 그 방향에서 뭐를 했느냐 하면은 고행을 했단 말이에요. 우리를 괴롭히는.

 

그런데 그 고행이라는 것도 우리 마음이 항상 불편해지잖아요. 괴롭고, 또 마음이 안정이 안 되고. 그래서 이 두 가지를 극복하는 방법으로서 팔정도. 감각적 욕망을 버림으로써 삼매를 닦고 지혜를 닦는 팔정도 수행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평화도 가져오면서 우릴 향상으로 이끄는 그게 뭐라고 그랬어요? 내려놓음으로써 오는 행복이라 그랬잖아요. 그죠? 그 내려놓음으로 인한 행복을 계발함으로써, 우리가 괴롭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내려놓음으로 인한 행복이라는 것은 내려놓았기 때문에 오는 거니까 집착이 있을 수가 없잖아요. 그런 집착도 하지 않는 그런 쪽으로 해서 수행을 하게 만드는데, 그게 바로 팔정도라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죠?

 

그래서 이 팔정도라는 것이 그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게, 우리가 수행을 하게 만드는 중요한 거고요. 그래서 이 팔정도는 보통은 보면 수행을 너무 힘들게. 수행을 할 수도 있고. 또 너무 편안하게 수행을 할 수도 있는데. 편안함에 빠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힘들게도 하지 않는, 항상 그 내려놓음으로 인해서 오는 질 높은, 차원 높은 행복을 경험함으로써 항상 열심히 노력하는 그런 방향으로 수행을 하기 때문에, 이 팔정도를 뭐라고 그래요?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다. 이거는 수행하는 그 과정도 내려놓음으로 인한 행복이 있고, 그로부터 얻어지는 삼매라든가, 또 성인의 경지, 깨달음 이런 것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좋은 그런 기쁨이 되기 때문에 그렇죠. 그죠?

 

그래서 팔정도의 구조는 부처님께서 수행하는 그 길이 힘든 길이 아니고, 대게 행복하고도 즐거운 길이라는 것. 우리가 그렇다고 막 감각적 욕망을 누리는 것도 아니면서 행복한 마음으로 수행을 할 수 있게 하는 그런 길을 제시한 겁니다. 그래서 이 팔정도가 아까 말했던 정견과 정사유를 바탕으로 해서 청정한 계율을 지켜야 돼요.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계율에 대한 강조가 좀 약한 편인데. 사실은 이 수행에 있어서 계율이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부처님께서 전에도 제가 한번 말씀드린 거 같은데, 수행의 출발점이 정견과 바른 견해와 그리고 청정한 계율이라 그랬거든요. 이 두 가지가 바탕이 됐을 때, 바른 수행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런 거거든요.

 

그래서 분들이 세속에 살면서도 오계를 잘 지키고, 그 바른 견해. 이런 중도에 의한 이런 견해. 팔정도를 이해하는 견해를 바탕으로 해서 수행을 하게 되면 절대로 악처, 잘못된 길로 가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두 가지 있는 집단은 항상 청정합니다. 타락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없는 집단은 분명히 타락을 합니다. 그래서 정견, 그러니까 정견과 정사유를 바탕으로 해서 바른 계율을 지켜야 돼요. 그게 여러분 같으면 다섯 계율이죠. 그죠? 살도음망주라하는 오계. 이거를 팔정도에서는 바른말, 바른 행위, 그리고 바른 생계. 이렇게 세 가지로 이야기를 했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선정을 닦는 건데.

 

제가 이번에 저도 그 달라이라마 스님 오셨을 때 일본을 갔었어요. 갔다가 교토에 있는 절을 몇 군데 다녔는데, 거기 가면 고대사라고 있어요. 고대사. 고다이, 고다이지라고. 고대사가 누구죠? 도쿠가와이에야스 정실부인이 지은 절이에요. 거기 정원이 있는데, 가을에 이벤트가 있더라고요. 거기에. 그러니까 밤에 거기 조명을 이렇게 잘해 놔가지고 밤에 개방을 하는 그런 게 있어서 한번 가봤는데. 거기 가니까 연못이, 일본 절의 특징이 항상 연못이 있습니다. 연못이 있고, 정원이 아주 잘 가꾸어져 있잖아요. 그 연못이 있는데. 연못주위에 나무가 있는데 밤에 조명을 해 놓으니까 물이 너무나 깨끗해요. 깨끗한데다 조명을 해놓으니까 위에 있는 나무가 밑에 물에 그대로 비치더라고요. 그러니까 하늘과 끝이 없어져 버린 거라. 땅 밑으로도 하늘이 되고 위로도 하늘이 되고.

 

그러니까 너무나 선명하게,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돼 있는데. 그게 정말 우리 불교를 정말 잘 표현하는 겁니다. 그 우리 마음이 그와 같이 하나의 번뇌의 물결이 일지 않는 그런 상태가 되면, 그런 연못에 마치 주위에 있는 나무가 하나의 잡티도 없이 그대로 비치듯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본질이 그대로 비치게 되는 상태가 되거든요. 그게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선정과 지혜라고 하는 이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는 겁니다. 그걸 보면서 이런 걸 보고 무정물설법이라고 하는구나. 정말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나더라고요. 우리가 선정을 닦고 지혜를 닦는 그 과정이 불교는 이것도 균형 잡힌 시각, 중도적인 관점에 들어갑니다. 너무 고요한 쪽으로만 빠지는 건 지혜가 없어요.

 

그리고 또 지혜만 있고, 고요함이 없는 거는 이게 불교에서 말하는 그런 지혜가 아닙니다. 마음이 들뜨게 돼요. 우리가 보면 세속에서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보면 마음의 고요함이 없잖아요. 잘난 체하고 자기만 많이 아는 것처럼 이렇게 하는데, 그거는 마음의 들뜸이 있는 거잖아요. 그죠? 그런데 고요하기만 하고 지혜가 없는 거는 불교에서는 바람직한 상태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이 수행하는데 항상 고요함과 지혜가 함께하는, 그거를 중국 사람들은 뭐라고 표현했어요? 적적성성. 성성적적. 이렇게 표현을 하는 거죠. 이 깨어 있음. 그러니까 지혜. 아주 성성한 깨어 있음과 지혜가 같이 있어야 되요.

 

깨어있음은 지혜를 일어나게 하는 거고. 고요함. 그래서 항상 사마디와 반야. 지혜와 고요함. 이 두 가지를 같이 닦도록 한 게 바로 이 팔정도 수행의 핵심입니다. 계율은 일종의 바탕, 토대 같은 역할을 하는 거구요. 선정과 지혜. 우리가 사마타 위빠사나, 정과 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고요함과 지혜가 항상 균형 잡혀져야 된다는 거죠. 고요함이 없는 지혜도 없고, 지혜가 없는 고요함도 의미가 없다는 거죠. 그래서 이 팔정도 그런 수행을 통해서 우리 마음을 번뇌로부터 다섯 가지 장애로부터 고요하게 하고 고요해지면 그 고요해지는 만큼 현상계가 그대로 비친다는 거죠.

 

아까 제가 말씀드린 그 연못에 있는 그런 것처럼. 거기에 조금만 물결만 일어도 이 나무의 모습이 흔들린단 말이에요. 그죠? 이거는 우리 마음에 물결이 이는 거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그런 상태가 되면 그것이 있는 그대로 비추기 때문에. 불교에서 삼매를 닦는 공덕 중에 하나가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되면서 우리 지혜는 점점점점 자라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자꾸 보기 시작 하다 보면 이것의 본질이 실체가 없구나, 정말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내 것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공한 것이다. 이렇게 통찰이 일어나게 되구요. 그걸 통해서 우리가 소위 말해서 깨달음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선정과 지혜를 닦는, 계율을 바탕으로 해서 선정과 지혜를 닦는 것을 세간의 중도라 그럽니다. 이건 팔정도 중에서도 세간의 중도라 그러고. 그로 인해서 깨달음이 일어나게 되면 출세간의 중도라고 하는데, 이게 중도의 완성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아는 거는 중도에 대한 머리로써 이해를 하는 거잖아요. 그죠? 그런데 막상 또 여자를 보면 정신이 쑥 빠져버리고, 또 아름다운걸 보면 빠지고, 돈을 보면 정신이 없어져 버리고. 그죠? 그거는 말로서는 이해를 했지만 실제상황에서는 중도가 작용을 안 하는 거거든요. 중도의 마음이 되지 못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이것이 깨달음, 출세간의 중도, 출세간의 팔정도를 통해서 완성이 되는 것이 소위말해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중도라고 하는 것은 이 깨달음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런 분들의 마음은, 육조단경에 보면 이런 말이 있거든요. 일체 처에 두루 하지만 오염되지 않는다. 그런 말 들어보셨죠? 그러니까 우리가 모든 경계, 사람을 만나고 대화를 하고 하지만 거기에 전혀 오염이 없다는 거에요. 항상 청정한 마음상태로써 할 수 있다는 거죠. 보통 우리는 어때요? 좀 좋은 걸 만나면 금방 이렇게 집착이 일어나고, 좀 안 좋은 걸 만나면 금방 화가 나고 그러잖아요. 그죠? 그런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지는 상태가 된다는 거죠. 그죠? 그게 중도의 터득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이 중도로부터 시작을 해서 중도로 끝난다고 보면 됩니다.

 

불교의 수행이라는게. 정견이라는 바른 견해. 이거는 중이라고 하는 이 바른 견해를 바탕으로 해서 중도를 실천하는 거죠. 중도의 실천이라는 것은 팔정도의 실천입니다. 이 팔정도를 계를 잘 지키고 선정과 지혜를 닦는 게 바로 중도의 실천이라는 거죠. 그 중도를 실천함으로써 나중에 완성되는 것이 또 중도다. 견해도 완성이 됩니다. 그때 되면은 연기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하게 되고, 우리가 어떤 사물을 접해도 내가 뭘 한다. 이런 개념이 들어가지를 않는 거죠.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아니까. 그죠?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 나와 남의 구분, 이런 것도 없어지겠죠. 내 것이라는 게 있으니까 남도 있고 그런 거겠죠.

 

그래서 이게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그 팔정도 내용을 요약을 하면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린 이유 중에 하나도 요즘 보면은 수행방법도 참 다양하고, 그죠? 아주 다양한 그런 시스템들이 있는데, 이거에 대한 깔라마경이라는 경이 있습니다. 초기경전에 보면, 앙굿따니까야라는 경전에 나오는 건데. 이 깔라마라는 건 동네이름이에요. 그러니까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게 많았단 말이에요. 외도들이 많았잖아요. 그 외도들이 가르침을 다양하게 피웠단 말이에요. 그때 부처님께서 어떤 마을에 갔는데, 그 마을에 사는 어떤 사람이 와서, 부처님께서 오셨다니까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묻는 게, A라는 스승님이 오면 자기 가르침이 최고라고 한다는 거에요. 다른 가르침은 다 틀렸다고 한다는 거에요.

 

B라는 스승이 오면 자기 가르침이 최고고 다른 가르침은 다 틀렸다고 한다고. C라고 하는 사람도 똑같이 그렇다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어떤 걸 믿고 어떻게 따라야 되겠습니까? 이것을 부처님께 물어본 거죠. 이 깔라마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보통 사람 같았으면 그거 다 틀렸어. 내 것만 믿어. 이렇게 했을 거에요. 그런데 부처님께선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그러니까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요. 소문에 의해서 전해 들었거나, 뭐 대대로 전승되었거나 논리적이라고 해서, 추론에 의해서 우리가 나는 거라고 해서, 또는 유명한 사람이 한 이야기라고 해서, 또 사색에 의해서 이루어진 거, 또 그냥 내가 믿는 스승이 가르쳐주는 것이니까. 라고 해서 믿으면 안 된다는 거에요.

 

그런 거를 받들어 행하지 말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건 딱 두 가지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행하는 그것이 너의 삶에 유익하고, 남에게 비난받지 않고, 이익과 행복이 있는 거면 행하라, 그랬어요. 그리고 네가 지금 행하는 그것이 해로운 것이고, 비난받고, 또 지혜로운 사람들이 비난하면 행하지 말라 그랬습니다. 이익이 없고 손해가 있는 거는. 그러면서 뭐라고 말씀을 하시냐하면 우리가 뭐에 대해서 집착을 하면 여러분들이 이익이 있어요? 해로움이 있어요? 해로움이 있다는 거 경험적으로 우리가 알 수 있잖아요. 그러면 그런 거는 행하지 말라는 거에요. 그리고 성을 냈을 때 여러분에게 이익을 줍니까? 해로움을 줍니까? 행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리고 어리석음, 어리석을 때 그건 여러분에게 이익이 있어요? 손해가 있어요? 그런 것은 버리라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가르침을 누가했다. 이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수행을 해서 내 마음에 있는 집착이나, 성냄이나, 어리석음이 벗어지는 거라면, 그것은 행해도 좋다는 거에요. 그것이 꼭 불교라는 이름을 띄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거는 내용 면에서는 불교하고 같다는 거죠. 그런데 이름은 불교라고 해도, 그걸 집착을 일으키게 만들고, 성냄을 일으키게 만들고, 어리석음을 유발하는 거라면 그건 행해서는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그렇게 부처님께서는 부파의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아주 심플하게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해답을 합니다.

 

그러니까 탐진치를 이끌어내는 거라면 탐진치에 의하는 거라면 버려라. 그리고 그걸 탐진치를 버리는 수행이라면 계발하고 그것을 해라. 그렇게 정리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니까 이 깔라마 지방에 있는 사람들이 아주 큰 환희심을 내면서 전부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재가자가 됐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는데요. 여기서 우리가 대개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불교가 아무리 좋은 테크닉을 가지고 있고, 아무리 화려한 내용이 있다 하더라도, 실제로 화려하든, 소박하든 그 속에 있는 것이 집착이 있다면 그것이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라는 거죠.

 

여러분들이 세속에서 권력에 집착하다가, 돈이나 명예 이런데 집착하다가, 출가해서 깨달음이나 수행의 경지 이런 거에 집착을 해서 그거에 대해서 만약에 똑같이 그냥 내가 갈구하던 것이 이쪽으로 가다 어디로 간 거에요? 그냥 이거는 세속의 어떤 대상만 바뀐 거 밖에 없습니다. 우리 마음의 변화가 없다면. 그렇죠? 그죠? 불교에서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팔정도 수행의 핵심이 뭐냐 하면요. 탐진치를 버리게 하는 데 있어요. 탐진치를 내려놓는 것, 이것을 키우는 게 아니라, 집착, 그러니까 뭔가에 대한 갈구를 내려놓고. 남을 해치고자 하고 분노하는 이런 마음을 내려놓고, 또 세상에 대해서 잘못된 이해를 내려놓고. 이런 어리석음을 내려놓는 이런 것이 불교의 바른 수행이다.

 

그래서 사실 불교수행을 하는 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얼마나 내가 이 수행을 통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오염된 마음이 정화되고 순수해지느냐? 이런 것이 중요한 척도라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께서 열반경에, 열반하시기 전에 하신 말씀이 뭐냐 하면은 불교수행이란 무엇입니까? 팔정도에 따른다면 그건 바른 수행이다. 팔정도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법이 아니다, 그랬어요. 이 팔정도의 내용은 바로 탐진치를 내려놓는 수행입니다. 이 팔정도가. 그게 중도의 실천이고 그것이 부처님의 바른 법이다. 그렇게 이해를 한다면, 그러면 그 목적을 이루는데 약간의 방법이 다르다고 해서 그게 서로 다른 서로가 적이 될 이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건 적이라고 할 이유가 없는 거에요. 다른 거에요. 그냥. 서로 다양성이 있는 거잖아요. 사실 수행에 있어서 꼭 한 가지 방법을 하는 것보다 오히려 다양한 수행이 있는 것이 많은 사람에게 이익이 있을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그 수행방법이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탐진치를 내려놓고 행복한 길로 갈 수 있는 거라면 그것은 제가 생각할 땐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면서 살아야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수행에 대해서 기본적인 관점이 서로 다투려고 하는 이런 마음이 다 내려놔야 할 마음이잖아요. 그죠? 그래서 여러분들도 이런 연기나 사성제, 사실 팔정도에 대한 이해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 팔정도를 잘 이해하셔 가지고 언젠가는 중도를 완성하는 성자가 다 되시기 바랍니다. 이걸로써 마치겠습니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