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지안스님_선가귀감

지안스님 특별법문 선가귀감 _ 제5회 선가귀감5 (21:32)

Buddhastudy 2012. 1. 1. 22:42

  방송 보기: 불교TV

불교 신행 생활이 하루하루 새로워야 한다. 이런 말이 있어요. 하루하루 새롭게 이렇게 생활을 해 나가셔야 한다. 원래 이게 한문 글귀로 日日新新일일신신하는 말이 있어요. 하루하루가 새롭고 새롭다. 이 새롭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 새로운 기분이랄까, 또 불교 신행에서는 신심. 이것이 일어날 때 자연히 내 생활전체가 새로워진다. 이렇게 말할 수 있죠. 새로워진 생활이 좋은 생활이에요. 그래서 日日時好日일일시호일이다. 이런 말도 같이 쓰여져왔습니다. 법회에 와서 기도하고 법문 듣고 하는 이게, 하루하루 새로워져서, 그 속에서 法喜禪悅법희선열, 법을 배우는 즐거움과 선을 하는 기쁨이 내 마음속에 우러나도록 한다. 이렇게 되면 불교 신행이 더욱 잘 되어 나가리라 믿습니다.

 

불교를 서산스님께서는 선과 교를 같이 아울러서 공부를 해야 된다. 이렇게 주장을 하십니다. 그러면서 선과 교를 같이 배울 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말, 네 가지를 소개해요. 그게 뭐냐? 교에서는 변하지 아니하는 불변이라는 것과 인연을 따른다는 수연이라는 말이 있어요. 이건 변한다는 뜻이죠. 불변과 수연을 이해를 하고, 선에서는 돈오와 점수를 알아야 된다. 불교공부 할 때 우리가 그냥 개인의 소박한 신앙심에서 기도하고 또 가장 쉬운 방법으로 염불이나 주력 같은 걸 하고, 이러면서 불교신행을 시작하는데. 조금 불교를 어떤 개개 맞게 공부를 할 때는 선교에 대해서 알아야 된다는 거에요.

 

선이 뭐며. 교가 뭐냐? 이걸 좀 올바르게 이해해야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기 위해서 교에서는 불변수연이라는 말을 알아라. 변하지 않는 것이 인연을 따라가는 것. 선에서는 단박에 깨닫는다는 뜻, 돈오. 그리고 점점 닦는다는 점수. 그래서 불변과 수연, 돈오와 점수. 이걸 잘 알고 행해가면은 깨달음에 이른다. 이런 요지의 말씀을 해 놓은 대목이 있습니다. 저번 시간에 마지막 말에 부처님 말씀과 조사스님들의 말씀이 다른 점이 있다. 그걸 비유해서 부처님 말씀은 활등과 같다. 이런 비유를 했고요, 조사스님들의 말씀은 활줄과 같다. 이런 비유의 말씀이 있었어요.

 

활등은 굽은 거고, 활줄은 곧은 것입니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은 부처님 말씀은 자세하게 설해주는, 사람이 알아듣도록, 자세하게 설명을 해 준다 이거에요. 그런데 선사들은 자세하게 설명을 해서 이해시키는 거보다도 어떤 깊은 체험 같은 것이 몸에 와 닿도록, 특별한 단도직입적인 방법을 쓴다. 이런 차이를 그렇게 표현한 겁니다. 예를 들면 실제 이런 설화가 있거든요. 어느 스님에게 어떤 처사님이 한 분 찾아오셔가지고 스님, 지옥이 뭡니까?” 물었어요. 지옥. 우리 육도 중에 지옥이 있지 않습니까? 육도윤회 가운데에 지옥도가 있죠? 전에 말씀드렸듯이 불교는 인간중심에서 업을 지어가지고 이 업을 받는 곳이 과보를 받는 곳이 좋은 곳이 있고 나쁜 곳이 있다.

 

그래서 천상 같은 것은 선업을 지어서 태어나는 곳이라 하고, 그다음에 악도 가운데에 고통이 가장 심한 곳이 지옥인데. 지옥은 나쁜 업을 지었을 때 태어나는 곳이다. 그래서 지옥은 가장 안 좋은 곳, 고통이 심한 곳이고. 천상은 좋은 곳이다. 보통 이렇게 설명을 해요. 그러면은 교의 입장에서 설명해 줄 때는 지옥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 금방 제가 간략히 말씀드린 대로 이런 식으로 설명해주어야 돼. 인간에서 지은 나쁜 업이 많은 사람들이 가서 온갖 고통을 받으며 지내는 곳이다. 거기 가면은 천수경에 나오는 화탕지옥도 있고. 칼산지옥도 있고. 또는 팔열지옥 팔한지옥 이런 말도 있어요. 지옥도 종류가 많아요. 이런 걸 죽 설명을 해주면 아~ 지옥이 그런 곳입니까? 이해할 것 아닙니까?

 

선은 이렇게 설명을 안 해줘. 이 스님이 어떻게 했느냐?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물었을 때, 스님들이 가지고 계시는 주장자라는 게 있어요. 주장자를 가지고 물은 처사님의 이마를 딱~ 한 대 때려버렸어. 아플 거 아닙니까? 이 처사님 화를 벌컥 내면서 지옥에 대해서 내가 물었는데 왜 때립니까?” 화를 냈거든. 스님이 껄껄껄 웃으면서 거사가 지금 화를 냈잖아. 화낸 그게 지옥이야.” 앞에 설명해주는 말 하고는 다르잖아요. 그러니까 한 예를 들어서 말할 때 이런 차이가 있듯이 조사스님들이 활줄과 같이 말했다는 거는 예를 들어 말할 때 탁~ 한 대 때려놓고 왜 때립니까? 아파서 화를 내니까 화내는 그 마음이 지옥이다. 이렇게 가르쳐 준거에요.

 

앞에는 책대로 육도윤회에서 지옥도를 설명할 때 이러이러하다. 그래서 말씀이 다른 차이가 있다. 이 말씀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걸 이해하라 이거요. 교에서 하는 말투와 선에서 하는 말투는 차이가 있다. . 그러고 나서 말씀하시는 것이 처음 말씀드린 대로 교에서는 변하지 아니하는 불변을 알아야 되고, 인연을 따른다는 수연을 알아야 된다. 이걸 알고 선을 시작하라 했어요. 서산스님은. 그래서 이 대목에서 67쪽이 되는데요, 변하지 않는 것과 인연을 따른다는 뜻. 따르는 뜻. 이 교에서 하는 말입니다. 그다음에 단박에 깨치는 것과 점점 닦는 문. 한자로 돈오점수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말씀을 하시기를 그러므로 배우는 사람은 불교를 배우는 사람들은 먼저 부처님의 참다운 가르침으로 부처님 경전에 설해져 있는 말씀, 변하지 않는 것과 인연을 따르는 두 가지 뜻이 이게 뭐냐? 내 마음의 성품. (성품 성). 성품과 형상이며, 마음을 선과 상으로 설명할 때 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고, 상은 인연을 따르는 것이다. 상이란 말은 마음에 생각이 일어날 때 이 생각, 저 생각, 생각이 일어날 때 그 생각은 변하잖아요. 그걸 상이라 하는 거에요. 생각. 그래서 변하지 않는 마음의 성품. 불성은 안 변하는 거거든요. 그 성품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서 인연을 따라서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수가 있다. 그게 불변수연의 설명입니다.

 

이걸 먼저 알아야 된다. 마음에 대해서 변하지 않는 것과 인연을 따르는 변하는 두 가지 뜻을 먼저 알아라. 이랬어요. 이게 불교 공부에 있어서 중요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교는 전부 마음공부라 하거든요. 마음. 공부 중에 가장 좋은 공부가 마음공부에요. 학교 다니면서 학생들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요즘 대학은 얼마나 많은 책을 통해서 공부를 합니까. 지식을 익히죠. 그런데 그 공부가 아무리 많이 해도 마음공부가 바로 안되면 인격이 바로 안 서요. 마음공부가 바로 돼야 인격이 바로 서는 거에요. 이제 불교는 원래, 이 수행을 세 가지 배움으로 설명하는 삼학설이 있습니다. 세 가지로 배운다.

 

잘 알고 계시는 내용이겠습니다마는 계로 배우는 걸 계학이라 이래요. 계를 지켜야 된다. 계라는 말은 나쁜 업이 지어지지 않도록 예방하는 걸 계라 그래요. 防非止惡방비지악이다. 이렇게 설명하는데. 방비. 그릇된 것을 막는다. 지악. , 선악 할 때 악. 악을 거친다. 그러니까 윤리도덕적인 정신을 건실하게 가지고 있어야 된다, 이 말이에요. 그걸 계학이라 하는 거에요. 현대 사회를 사람의 마음, 생각들이 너무 복잡해지는 시대다.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복잡하면은 이게 편안해지지가 못하거든요. 복잡한 거는 이거 안 편한 거에요. 그래서 이런 말도 응용을 해서 하는 말인데.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행복해지려면 단순해 질 줄 알아야 되요. 복잡한 사람은 절대 행복해 질 수가 없어요. 복잡한데 어떻게 행복해져? 단순해져야 되요. 영어로 심플이라는 말이 있거든. 심플하게 살아야 되요.

 

왜 복잡하냐? 마음속에 생각이 많이 일어나니까, 번뇌가 많으니까, 욕망이 많으니까, 또 하고 싶은 게 많으니까. 서울을 수도라 안 합니까? 서울에 계시는 분들이 제일 수준이 높다. 이리 말하거든요. 그런데 수준이 높은 거는 좋은데, 서울 사람들 복잡하게 사는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나는 지방에 사니까, 서울 오면 ~ 도시도 복잡하고 말이에요. ~ 이 복잡한 서울에서 행복하게 살겠나?’ 어떤 때는 혼자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그래서 심플하게 단순하게 사는 정신, 이게 불교의 계학하고 통하는 말입니다. 계학. 계율할 때 불살생, 불투도. 불사음. 불망어, 불음주. 오계 같은 거 죽~ 설해지잖아요. 이거는 금계라 해서 뭐 뭐하지 마라. 이렇게 설하죠.

 

그건 뭡니까? 절제되는 거에요. 내 행동을 절제하는 거에요. 그래서 단순한 생활에서 절제하는 것이 같이 따라 이루어져야 되요. 그래서 이 계학을 닦으면은 내 생활이 건전해지면서 행복해지기 시작해요. 그다음에 이 정학이라는 게 있는데. 선정할 때 정, 이 선이 선정 아닙니까? 마음이 항상 안정 돼 있어야 되요. 마음이 통일돼 있어야 되고. 달리 말하면은 감정이 정리돼 있어야 되요.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온갖 갈등을 일으키고 불안을 느끼고 초조함을 느끼고. 그 사람이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어요. 마음 심리적인 상태가 안 좋은데. 그래서 선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거에요.

 

선을 달리 설명할 때 간단히 설명하자 면은 마음이 생각이 안 움직이는 거에요. 생각이 한곳에 딱 통일돼 있는 상태. 선을 흔히 정신집중이다. 이렇게 쉽게 설명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데, 이렇게 설명하는 경우도 있어요. 일반적으로 선정할 때 정자는 이게 안정이 되 있다는 뜻이에요. 안정이 되면 안 흔들리는 거에요. 이걸 정학이라고 해요. 정학. 그러니까 마음이 항상 안정이 돼 있어야 되요. 뭔가 정성이 가는 곳이 있으면은 마음이 그걸 중심으로 안정이 되요. 이래서 신앙생활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계학. 정학. 그다음에 계학 정학이 갖추어지면은 자연히 따라서 혜학이 갖춰진다. 이러죠. 지혜할 때. 생각이 좀 창의적인 생각이 일어나요.

 

이래서 남들보다도 그때그때 현실의 경계를 대하면서 발상하는 게 달라요. 발상하는 거. 중요한 거죠. 헤르만 헤세라는 분이 유명한 세계적으로 명성이 크게 떨쳐졌던 소설가로도 알려져 있고 문학가로도 알려졌어요. 독일의 유명한 헤르만 헤세. 그런데 그 분에게 얽힌 일화가 한 토막이 있어요. 어느 책에서 봤는데요. 이분 옆에 수다쟁이 노파가 한 사람 살고 있었다. 그래요. 나이가 많은 할머니 한 분이 이웃에 살고 계셨답니다. 곧장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말을 자주 하셨나 봐요. 그러던 분이 어느 날 헤르만 헤세가 자기 집 정원, 나무가 이래 여러 그루 서 있는데, 나뭇잎이 떨어져. 마당에 낙엽이 떨어져서 좀 어지러워져 있어요.

 

이래서 이제 쓸어 모았어요. 비로 가지고 낙엽을 쓸어 모아가지고 그걸 태웠답니다. 태우고 있는데 울타리처럼 나무로 세워놓는 그런 서양식 울타리가 있거든요. 이웃집 노파가 이 나무 태우는 걸 보고 나뭇잎, 낙엽 태우는 걸 보고 말을 한마디 걸어오는 거에요. 쉽게 말하자면. “영감님, 오늘 참 좋은 일 하시네요.” 자기보고 오늘 참 좋은 일 하신다. 이렇게 말을 걸더랍니다. 그래서 아니 마당에 낙엽이 떨어져서 흩어져 있기에 그거 내가 쓸어 모아 가지고 불태우는데, 뭐 특별한 일 하는 거 아닌데, 뭘 또 수다쟁이가 나보고 좋은 일 하느냐? 이렇게 말을 퉁명스럽게. “마당 쓸어 나뭇잎 태우는데 뭐 크게 좋은 일이오?” 이렇게 대꾸를 한 모양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