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지안스님_선가귀감

지안스님 특별법문 선가귀감 _ 제5회 선가귀감5 (42:37)

Buddhastudy 2012. 1. 1. 22:43

  방송 보기: 불교TV

그랬더니 이 수다쟁이 노파 할머니가 그게 아니오. 영감님. 영감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잘못했던 일, 실수했던 일, 인생을 살아오면서 남겼던 쓰레기를 지금 태우고 있는 거에요. 이렇게 말을 하더래요. 이 말을 들은 순간 헤르만 헤세가 망치로 한 대 맞은 거 같더래요. 이 수다쟁이라고 좀 업신여겼던 이웃 노파가 자기보다 생각하는 어떤 사고수준이랄까? 사고력이 훨씬 높은 거 같애. 낙엽을 태우는 걸 보고 지난 과거의 잘못했던, 불교로 말하면 악업. 나쁜 업. 악업을 태워버리는 것이다. 이는 세계적인 문호잖아요. 그래서 이웃 노파의 말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고, 그 말에 감동을 했다. 이런 일화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사람은 생각하나가 이게 발상이 잘 돼 나오면은 이 자기 그 전체의 생활이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런 것을 지혜라 하는 거에요. 지혜. 그래서 계학. 정학. 혜학. 삼학으로 배운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게 삼위일체에요. 계학 속에서도 정학이 있고, 혜학이 있고. 정학 속에서도 계학이 있고 혜학이 있고. 각각 딱 독립된 것이 아니고, 이 삼학이 서로서로 한데 어우려져 있다. 서산스님은 이 선가귀감에서 그런 법문도 해 놨습니다. 11장 얘기를 다시 계속하면요, 교에서 불변수연, 곧 내 마음이 변하지 않는 성품 자리. 또 그때그때 인연을 따라서 변하는 수연 하는 두 가지를 알아야 된다. 불변수연을 알아야 불교를 교학적으로 올바로 알 수가 있다. 뭐 이런 말입니다.

 

그 다음에 돈오점수 양문은 단박에 깨닫고 점점 닦는다. 중국 선정사에서 깨달음을 강조하는 그런 여러 가지 표현들이 있었는데, 담박에 깨친다는 돈오라는 말이 가장 유명한 말이에요. 선을 단박에 깨치는 선이다. 이래서 육조스님의 선풍을 돈오선이다.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단박에 깨친다. 깨닫는 거는 이건 어떤 경우든지 단박에 깨치는 거에요. 사람이 잠을 자다가 잠이 깨질 때 순간적으로 깨어지는 거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잠깨면서 눈을 조금씩 조금씩 뜹니까? 그냥 한 번에 떠버리는 거지. 그게 돈오에요. 그게.

 

그런데 돈오 해 놓고 그다음에 점차적으로 차츰차츰 닦아나간다 하는 말이 돈오점수인데. 이건 중국 선종사에서 보면은 이렇게 돈오점수를 주장하는 설도 있고 또 다른 설도 있어요. 임제스님같은 경우는 돈오돈수를 주장했습니다. 깨닫는 순간 수행이 다 성취된다.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거에요. 그 외에 점오점수 칠대논점이라 해가지고 일곱 가지 경우가 나와요.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돈오점수와 돈오돈수입니다. , 이 말은 단박에, 몰록. 그러니까 일단 단박에 깨닫고 나서 수행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렇게 내세우는 말이 주장이 돈오점수 설이에요. 그런데 이 선가귀감에서도 선을 서산스님께서는 돈오점수로 해야 된다. 이렇게 주장을 해요.

 

그런데 이 점이 조금 다른 점은 참고적으로 이 공부를 좀 깊이 하신 어른들을 위해서 소개하는 말씀인데. 원래 선가귀감에서는 선종 오종이 있는데. 임제종, 조동종, 위양종, 운문종, 법안종. 오종이 있거든요. 오종 가운데 임제종을 가장 중시 여겼어요. 임제종. 임제종풍. 그런데 임제스님은 돈오돈수를 주장한 분이에요. 임제종지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선가귀감에서는 서산스님께서 임제의 돈오돈수풍을 따르지 않고 돈오점수를 주장했다. 이 점이 이 교재, 교과서 책을 놓고 볼 때 좀 특이한 점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여기서는 돈오점수를 말씀하십니다.

 

돈오, 단박에 깨닫고 점점 닦는 두 가지 문은 수행의 문이 돈오점수 두 가지 문이라는 말입니다. 스스로 수행하는 시작과 끝임을 이게 개개인 수행자들의 공부의 전부다. 돈오점수 이게 내 수행의 시작과 끝이라는 걸 잘 알고 나서, 먼저 여실히 은교로써 알고 이런 뜻인데요. 가린다. 이 말이에요. ?, 자세히 알고 나서 그런 후에 교의를 놓아버리고 교에 말하는 얘기, 이 말들에 걸리지 말라는 얘기에요. 교의를 놓아버리고 다만 자기 마음에 일어나는 한 생각을 가져서 참선할 때 이 화두 들고 하는 공부법을 말하는 겁니다. 다만, 자기 마음에 드러나는 한 생각을 가지고 선지를 참상하면 참구하면 이 말이에요. 선을 참구하면.

 

참구한다는 말은 계속 생각을 거기에 집중해가지고 쉬지 않고 꾸준히 밀고 나간다 할까요? 이런 걸 참구한다. 이럽니다. 이러면은 반드시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이 말은 누구나 깨달을 수 있다. 이 말이에요. 이렇게 하는 것이 이렇게 공부를 하는 것이 이게 바로 소위 이른바 出身活路출신활로라는 말이 있는데. 몸이 뛰쳐나오는 살길이다. 가령 구덩이 같은데 빠져있던 사람이 구덩이를 빠져나온다. 이거에요. 생사의 굴에서 빠져나온다 할까요? 이런 실제 선 공부에 있어서 중요한 점을 이 대목에서 말씀을 해 놓았습니다. 교를 먼저 알고 선을 해라. 그리고 선이 익숙해졌을 때 교에 걸리지 마라. 간단히 요약하면 이런 말입니다.

 

삼세 선에 해당되는 風穴延沼풍혈연소라는 스님이 계셨어요. 임제스님이 임제종을 창시하고 그 법맥이 흥화존장선사와 남원혜옹, 또 그 다음에 풍혈연소 이렇게 이어집니다. 그런데 풍혈이 절 이름이었어요. 풍혈사라는 절에 계셨어요. 풍혈연소스님께서 풍혈사 여러 대중과 같이 생활을 하면서 이제 선 지도를 하셨죠. 그런데 어느 날 풍혈연소스님께서 대중이 다 보는 앞에서 대성통곡을 하는 거에요. 엉엉 소리를 내서 크게 우시는 거에요. 그래서 대중이 놀라가지고 스님 왜 그러십니까? 큰 스님 왜 그러십니까?” 이렇게 물었을 거 아닙니까?

 

물었더니 임제의 법맥이 내 대에 와서 끊어지는 것이 슬퍼서 그런다. 임제스님의 법맥이 자기한테 전해져왔는데 전해줄 때가 없으면 끊어지는 거잖아요. 마치 옛날 가문의 대가 이어지려면은 보통 종갓집의 맏아들이 가문을 계승하잖아요. 적손이 되잖아요. 그러면 어느 집에서 아들이 태어나지 않으면은 대가 끊어지는 거에요. 옛날은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것처럼 자기에게 전해져 내려 온 임조의 법맥에 끊어지려 한다. 이게 슬퍼서 대성통곡을 한다는 거에요. 그래서 참 안타깝다. 이렇게 여기고 있었는데.

 

대중 가운데 수산성념선사라는 스님이 계셨습니다. 이 스님은 평소에 법화경을 줄줄 다 외울 정도로 항상 법화경만 외우고 계시던 스님이었어요. 그래서 별명이 연법화라고. 법화경을 항상 (생각 념)자를 써서 연법화라 했는데. 외우고. 법화경만 생각하고 산다는 거에요. 이 스님이 연소스님이 대성통곡하는 모습을 보고 안 되가지고 스님, 저라도 공부 좀 더 해가지고 스님의 법을 이어받으면 안 되겠습니까?” 말을 했어요. 그랬더니 풍혈스님께서 수산성념선사가 평소 법화경만 보고 법화경을 줄줄 외우고 이렇게 이 생활 하는걸 아시고, “자네는 법화경에 걸려있어서 안되겠다.” 이래요.

 

법화경을 매일 읽고 외우고 그것도 장한 일이잖아요. 그런데 풍혈스님께서 자네는 법화경에 걸려 있어서 안 되겠다. 그 말을 들은 수산성념선사가 법화경을 제가 버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지금까지 법화경만 수지 독송해왔는데, 이제부터는 법화경은 그냥 버리겠다. 이거에요. 그래서 그러면 되지. 이래가지고 법화경을 버리고 다시 선지를 참구해서 풍혈연소스님의 법을 이어받았다. 이렇게 임제종기 개선한 내력에 보면 그 얘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은요, 捨敎入禪사교입선이라는 말이 이런 뜻에서 쓰여진 말인데, 버려야 되요. 선은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이 돼야 되요. 근심걱정이 일어나면은 이건 선 아니에요.

 

뭐 욕심이 생겨가지고. 예를 들면 뭘 하고 갖고 싶다, 사고 싶다. 이건 선 아니에요.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 누가 나에 대해 듣기 싫은 말을 해도 초연히 아무렇지도 않아야 되요. 칭찬을 해도 그냥 덤덤해야 되. 기고만장하면 안 돼요. 팔풍이라는 게 있거든요. 사람 마음을 흔들어놓는 여덟 가지 바람이 있다. 이럽니다. 그게 , , , , , , . 한자로 한자한자 여덟 글자를 말하는데요. 이익이 올 때는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손해가 올 땐 기분이 나빠지고. 남이 나를 칭찬해 주면 기분이 좋아지고. 헐뜯으면 기분 나빠지고. 기분 좋아지고 나빠지는 게 이게 바람이에요.

 

내 마음이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바람에 의해서 흔들리듯이 흔들리니까 바람이라 하는 거에요. 직접적으로 칭찬하고, 안 보는데서 칭찬하고. 간접적인 게 있거든요. 괴롭고 즐겁고. 그래서 이런 마음이 감정에 자꾸 솟구쳐서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이고 하는 거는 선이 아니에요. 또 이런 얘기가 있는데. 사람이 세 사람이 길을 걸어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엄청난 다이너마이트라는 폭약이 있잖아요. 엄청난 양의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는 폭발음이 들려요. 폭발음이. 이 소리가 하도 커서 세 사람이 걸어가고 있었는데. 한사람은 놀라서 땅에 넘어져 절도를 해버리는 거에요. 소리에 놀라가지고.

 

숫타니파타라는 초기경전에 보면은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하라는 말이 있죠. 소리에 놀라가지고 졸도를 해버렸어요. 한 사람은 걸음을 못 움직여. 걸어가다가 소리를 들었는데, 선체로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고 있어요. 놀라가지고. 그런데 세 번째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태연히 걸어가고 있어요. 이 세 사람 중에 세 번째 사람이 제일 좋은 거죠. 태연히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고 있는 태연히 아무렇지 않게 걸어가는 그 모습. 이게 선의 모습이에요. 이게. 그래서 앞서 말씀드리기를 선은 아무렇지도 않은 마음이 돼야 선이 되는 거에요. 관념에 걸려가지고 어떤 생각이 마음을 지배해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이 서산스님도 이런 법문을 이 대목에서 설해 놓고 있습니다. 불도를 배우는 사람의 바람직한 자세는 선과 교를 두루 섭렵하여 불변과 수연, 돈오와 점수의 법의 이치를 제대로 알고 난 다음, 본문공부, 곧 선법을 참구하는데 들어가는 것이 좋다고 한 말이다. 특별한 상근기의 경우는 공부를 정해진 절차에 따라서 한다고 볼 수 없지만은 상근기는 예외가 있어요. 육조스님같은 경우에는 원래 오조스님 회상에 찾아가서 8개월 동안 허리에 돌을 달아가지고 옛날 방아 디딜방아 찢다가 깨달았다. 이렇게 알려져 있어요. 참선을 한 적도 없고, 경을 읽은 적도 없어요.

 

그랬는데도 오조스님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았습니다. 스님이 되기 전에. 그것도. 그래서 특별한 상근기들은 어떤 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는 정해진 법이 없다는 거에요. 다만, 보통사람들 중근기나 하근기 사람들은 공부를 할 때 어떤 표준이 되는 모법이 되는 예를 따라서 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불변과 수연은 마음의 본체, 성품. 체를 말하는 것이죠. 선이라는 것은. 체가 인연을 따라 일체 현상의 작용을 일으키는 걸 말한다. 그래서 제법의 이치가 불변수연으로 설명됩니다. 불변은 체라 하고, 수연은 용이라 하고.

 

전 시간에 물을 예를 들어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물이 온도에 따라서 얼음, 혹은 수증기, 변하지만은 물의 그 본래 습성이랄까, 수소분자와 산소분자가 결합 돼 있는 H2O라는 것은 변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은 변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 뭐 서로 사귀다가 친구도 나중에 멀어지는 수 있고. 또 서로 좋아했다가 싫어하는 수도 있고. 마음이 변하죠. 이런 경우는 심리상태,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이 변했다는 걸 말하는 것이지. 심체는 안 변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은 그러면 시간이 다 돼서 이상 마치겠습니다. . 잘 계십시오. 모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