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53. 남을 보지 말고 나를 보라

Buddhastudy 2019. 3. 14. 20:17


부처님께서 중림정사에 계실 때의 얘깁니다.

출가한 스님 중에 한 사람이 이 말이 굉장히 거칠어요.

수행자인데도 불구하고 입에서는 계속 욕설이 나오고, 또 명령조의 말이 나오고.

사람들이 들을 때는 수행자의 말이라고 보다는 천한 사람들, 당시에.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시장 통에서 하는 말 있지 않습니까. 그런 투로 늘 말을 하는 거요.

 

그러니까 스님들이 그 스님에 대한 비난이 굉장히 많았다는 거요.

어떻게 수행자가 저렇게 말할 수가 있느냐, 저것은 천한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지, 우리말로 하면 시정잡배나 하는 말이지, 스님이 되어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렇게 자꾸 문제가 된 거요.

 

이것이 부처님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고, 부처님께서 그 천한 말을 하는 수행자를 불러서 얘기를 나누시면서 가만히 보셨어요.

이 경전에는 전생얘기로 연결이 되는데 부처님께서 그 수행자를 가만히 보니까

이 수행자는 과거 500생을 천민으로 태어나서 이런 거친 말 속에서 자란 거요.

 

그러기 때문에 그 수급이 있기 때문에 이게 아무리 수행을 해도 고쳐지지가 않는 거요.

그러나 그 마음이 본심이 그런 거는 아니에요. 이 말투가 그런 거지.

그래서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구들이여,

이 거친 말을 하는 비구를 너무 심하게 나무라지 마라.

그는 자기에게 나쁜 마음이 있어서 그런 어투로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그는 과거 500생을 통하여 계속하여 천한 집에 태어나 그런 천한 말을 익혀왔는데 금생까지도 그 습성이 남아 그처럼 험한 말을 하는 것이니라.

 

그렇지만 이제 그는 마음속의 모든 악행을 근절하였기 때문에 설사 그가 말을 그렇게 한다 하더라도 그의 마음을 다스려져 착한 것이니라./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럴 때 부처님이 불러서

, 이 놈아 말버릇도 하나 못 고치는 게 무슨 수행자냐, 말버릇 고쳐라.”

이렇게 야단을 치면 옆에서 문제제기한 사람들이 고소하겠죠.

봐라. 내가 뭐라고 그랬어, 말버릇 고치라 그러지 않았냐.”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오히려 이 사람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이 이 사람을 이해해 줄 것을 오히려 요청을 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게송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의 말씨는 온화하고 교훈적이고 진실하여 어느 누구든 위협하는 법이 없으면

나는 그를 수행자라 부른다.

 

여기서 우리가

내가 어떻게 하느냐, 하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봐야 하는가하고

구분을 해야 합니다.

 

이게 구분이 안 되면 이제는 법을 가지고 다투게 됩니다.

우리는 말을 할 때 부드럽게 해야 합니다.

이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러면 거친 말을 하는 사람을 보고

, 이 놈아, 왜 거친 말을 하느냐, 수행자는 말을 부드럽게 해야지.”

이렇게 해서 그 사람하고 다툰다면, 잘못은 그 거친 말을 한 사람에게 있는 게 아니에요.

그것을 시비 삼는 나에게 있다.

 

바로 그의 입장에 돌아가서 그의 처지에서 보면 그는 거친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어떤 상황에 있었던 거요.

그것이 말버릇이든, 화가 났든.

 

그러니 수행자는 그가 거친 말을 하는 것을 보고는

거친 말을 할 수 밖에 없는 그를 이해하라.

그를 이해하게 되면 거친 말을 하는 그를 보고 내가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지 않게 된다.

그러니까 거친 말을 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부드러운 말을 하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왜 나는 부드러운 말을 해야 하고, 나보고는 부드러운 말을 하라고 하시면서

그가 거친 말을 하는 것은 이해하라고 합니까? 같이 적용을 해야 안 됩니까?

나보고 거친 말을 하지 말라고 하면, 그에게도 거친 말을 하지 말라고 해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이 불교의 가르침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때로는 이 가르침을 가지고 시비심을 일으켜서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제가 법문을 할 때, 다른 사람을 이해해야 합니다.

내 생각이 옳다고 고집하면, 자꾸 나에게 화가 일어나고 짜증이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을 보고 그를 이해하게 되면, 내 화와 짜증이 사라집니다.

그가 그런 경우에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하고 이해하게 되면

그의 어떤 말이나 행동을 보고도 나는 화가 나지 않게 됩니다.

이렇게 설법을 했을 때, 듣고

, 그렇구나. 그래. 그를 이해하지 못하면 내 가슴이 답답하고

그를 이해하면 내 가슴이 시원하다.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나에게 고통이고

그를 이해하는 것은 나에게 기쁨이다.

, 그를 이해하는 것은 곧 나에게 복이구나.

그래서 부처님께서 타인을 이해하라고 하셨구나.

바로 내 복 받는 길이니까.’

 

이렇게 받아들여야 되는데, 이런 법문을 들으면서

그래, 저 법문은 우리 남편이 들어야 돼.

저 법문은 우리 아이가 들어야 돼.

저 법문은 우리 부인이 들어야 돼.

그래, 맞아. 우리 부인은 우리 남편은, 우리 자식은 남을 이해하는 마음이 부족해.

그래서 맨날 화내고 짜증을 내.

내일 당장 가서 법당에 데려와야지.’

이렇게 생각하면 얼른 보면 아주 적극적인, 포교 같지 않습니까. 그죠.

기건 포교가 아니에요.

 

자기에게 맞게, 상대를 뜯어고치려는 거요.

자기가 불편한 것을 자기로부터 해방되지 않고, 상대를 고쳐서 상대가 내 맘에 맞도록 해서 내가 편하려고 하는 지극히 세속적 관점이다.

 

그래서 집에 가서

오늘 스님이 말씀하시는데, 사람을 남을 이해해야 된답니다.

남을 이해하지 못하면 자꾸 화가 나고 짜증이 난답니다.

그런데 요즘 당신 화나고 짜증나는 걸 보니까 당신이 남을 이해 못해서 그래요.

당신이 아이들을 이해 못하니까 맨날 아이들보고 짜증내잖아요.

그러니까 당신, 이제 짜증 그만 내세요.

그러려면 당신 아이들을 이해하세요. 나도 좀 이해하고.

그러려면 당신 법문 좀 들으세요. 내일 절에 갑시다.”

이런 식이다.

 

여러분들이 법문을 듣다가 너무너무 옳고 지당한 말씀이라 고개를 끄덕끄덕하면서

자기를 뉘우쳐야 이게 법문을 듣는 마음이다.

그때 퍼뜩 딴 사람이 떠오르는 거요.

이 법문은 저 사람이 들어야 되는데.’

 

이것은 똑같은 법문임에도 불구하고,

그 법문을 가지고 타인에게 적용하면

이미 그것은 감로와 같은 법문이 아니고,

그 사람에게 날카로운 칼날이 된다. 비수가 되는 거요. 시비의 칼이 된다.

이걸 우리가 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 부처님께서

내가 어떻게 하는가와

내가 타인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이 문제를 늘 말씀하시는 거요.

 

내가 다른 사람을 보고 가만히 있는 사람을 보고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마라.

왜 가만히 있는 사람을 보고 화를 내고 짜증을 내느냐.

그의 하는 행동이 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내 기준 때문에 생긴 거요.

그는 그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뿐인데, 그게 내 기준에 안 맞는 거요.

 

가끔 부인들이 상담 할 때, 시어머니 때문에 이런 상담을 하죠.

스님, 시어머니 때문에 힘들어 죽겠어요.”

왜요?”

너무너무 잔소리가 많아요.”

같이 살아요?”

아니오.”

그런데 왜 그래요

가끔 오시거든요. 가끔 오시는 데 너무너무 잔소리가 많고 간섭이 많다는 거요.

 

그냥 오셔서 밥해드리면 밥 드시고, 구경시켜 드리면 구경하시고, 며칠 쉬셨다가 가시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와서 음식에 대해서 옷에 대해서 살림에 대해서 다 잔소리를 하니까, 오시면 어쨌든 마음이 불편하고, 그것 때문에 부부간에 싸우고, 그렇다는 거요.

 

이 부인의 얘기를 들으면 이해는 됩니다.

그러나 이 부인의 얘기는 옳은 것은 아니에요.

이 부인은 시어머니를 나무토막이나 보릿자루처럼 생각하고 있는 거요.

살아 있는 생명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고, 그냥 물건으로 생각하는 거요.

 

언제 와라 하면 오고, 밥 먹어라 하면 밥 먹고, 밥 먹었으니까 가만히 있어라 그러면 가만히 있고, 구경 시켜 줄 테니까 가자 하면 가야되고, 오라 하면 와야 되고, 했으니까 가만히 있으라면 가만히 있고, 용돈 주면 받아야 되고. 갈 때 되면 가라 하면 가야 돼.

이거 다 내 맘대로 하겠다는 거요.

 

연세 드신 어머니 마음대로 하고 내가 따라야지,

어떻게 내 맘대로 하고 어머니가 내 비위를 맞추겠어요.

이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다 자기식대로 하겠다는 거요.

 

그래서 자세히 들어보면,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분들이 있거든요.

제가 빨래를 해놓으면요, 남편에게 옷을 안 다리고 그냥 입힌다고 잔소리하죠.

음식을 해 놓으면, 이건 너무 짜다. 이건 너무 싱겁다. 이거는 삶아야 되는데 왜 볶았느냐,

볶아야 되는데 왜 삶았냐. 온갖 얘기를 다 합니다. 그러니 어떻게 비유를 맞추겠습니까?”

이렇게 말해요.

 

그런데 우리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남편은 나에게 있어서는 남편이지마는, 시어머니에게 있어서는 아들이죠.

그럼 나는 남편하고 같이 사니까 남편 성질을 잘 알아.

우리 어머니는 아들을 키웠으니까 아들의 취향을 잘 알죠.

 

그런데 아내가 남편에 대해서 더 잘 알까요? 어머니가 아들에 대해서 더 잘 알까요?

어느 쪽이에요? 어머니가 아들에 대해서 더 잘 알죠.

내가 아무리 많이 알아도 두 번째로 아는 사람입니다.

절대로 어머님보다는 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어머니에게는 간이 조금 안 맞아도 안 맞는다고 그러고, 불편하면 불편하다고 말하기가 쉽습니다.

물론 남편이 아내에게 말하죠. 다 자기 얘기하지만,

그래도 어머니하고 아내하고 누구한테 말하기가 쉬울까?

어머니에게 말하기가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머니 입장에서 보니 우리 아들은 항상 어릴 때부터 와이셔츠를 다 다려서 입혀서 학교를 보내고 출근을 시켰다는 거요.

그런데 자기가 보니까 며느리가 툭툭 털어 그냥 보낸단 말이오.

자기는 내의까지도 다려서 입혔는데, 겉옷까지도 그냥 입힌단 말이오.

그러니까 어머니가 보기에 마땅치 않는 거요.

 

음식도 또 보면, 다 간을 보니까 이건 아들의 입맛에 안 맞는 거요.

이럴 때 어머니가 잔소리를 한다. 이건 내 기준 일나 말이오.

내 기준을 버리면 어떻게 되느냐

, 어머니 그러세요.”새로 앎이 있잖아.

, 난 남편이 털털 털어서 주니까, 그냥 입고 다니 길래 본래 수수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알고 봤더니 그렇지 않았구나. 속으로 많이 불편했겠다.

그래서 아침마다 늘 옷 갈아입을 때마다 아침에 한 번씩 성질을 내고 나가는데,

저 사람이 왜 아침마다 성질을 내나 했더니 아, 옷 때문에 그랬구나.”

아는 맛이 있잖아.

 

그러면 어머니가 와 계시는 동안에 내가 배우는 게 굉장히 많다는 거요. 돈 안주고 배우잖아.

내가 시어머니라면 절대로 안 가르쳐줍니다. 돈을 많이 받고 가르쳐주지.

그런데 어머니니까, 공짜로 가르쳐준단 말이오. 얼마나 자비심이 많습니까. 그죠. 가르쳐 달라지도 않았는데. 공짜로 막 가르쳐주잖아 그죠,

음식은 이래야 되고, 옷은 이래야 되고 뭐는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이렇게 마음을 딱 바꾸면 내 기준을 내려놓고 어머니 입장으로 돌아가서 들으면 이건 잔소리가 아니고, 나에게 굉장히 유용한 정보가 된다는 거요.

 

이래서 자기 기준을 내려놓게 되면,

즉 아상을 버리게 되면

내가 행복해지는 거요.

 

나에게 기쁨이 생기는 거요.

나에게 배움이 생긴다.

 

아상을 움켜쥐고 있으면 어떠냐?

내가 옳다 하는 생각을 갖고 있으면

내가 피곤해집니다.

귀에 들리지가 않는 거요.

잔소리처럼 되고. 그래서 미워지는 거요.

 

그래서 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나에게 적용하면 양약이 되는 거요.

그런데 이 가르침을 거꾸로 타인에게 적용해.

네가 옳다는 생각을 버려. 너 부처님 화내지 말라는데 화내고 있어. 이거 고집하네.

, 불자가 그래서 되겠어.”

이런 식으로 하면 도리어 불교로 인해서 갈등이 생기는 거요.

 

그래서 두 부부가 여기 와서 법문을 듣고 둘 다 자기에게만 적용하면

아주 화목해집니다.

그런데 두 부부가 여기 와서 법문을 듣고

아내는 속으로 남편이 오늘 법문 잘 들었겠지. 이제 안 그러겠지.’

남편도 오늘 우리 부인이 법문 들었는데 이제 버릇 고치겠지. 오늘 스님이 그렇게 예를 들어서 고구정녕 일러줬는데, 마누라가 아무리 귀가 어둡다 하더라도 오늘은 깨쳤겠지.’

이래서 둘이서 갔는데, 가면서부터 다투는 거요.

 

아니, 당신 오늘 스님 뭐라고 법문 하셨는데, 법당 문 열고 나오자마자 또 그래, 그 버릇이야.” 이러면서 상대에게 적용한다. 이 말이오.

 

그래서 아무리 좋은 법도 상대에게 적용하면 비수가 된다.

그러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직 자기에게 적용해야 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질 것인가,

어떤 마음을 가질 때 내가 가장 행복해지는가.

내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 법이 어떤 것인가.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란 말이오.

 

남을 훈계하고 남을 평가 하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섣불리 불교를 남에게 전한다고 하면서 교리 등 지식을 가지고 설명을 하거나

안 그러면 남을 가르친다면서 타인에게 법을 적용해서 비판을 하고 비난을 하고 훈계를 하고 이런 경우가 많죠.

 

그래서 계율에 뭐가 있습니까?

남을 가르치려고 하지 마라.

 

어떻게 가르쳐야 되는데,

이 좋은 법을 가르쳐야 되는데

왜 가르치려고 하지 말라고 그러냐.

이 정신을 알아야 됩니다.

 

법은 오직 나를 향해서 설해진 거다.

나에게만 적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양약이 됩니다.

이것을 만약에 타인에게 적용해서 시비의 잣대로 삼으면 이것은 독약이 된다.

 

그래서 여기 부처님께서 이 사람을 두고는 부처님이 이렇게 설법을 하지 않겠죠.

이 사람이 말이 거칠어.

그러면 부처님이 그 사람을 두고는 뭐라고 그럴까?

말을 부드럽게 해라.

비록 마음속에 어떤 그런 미움이 없다 하더라도

너의 거친 말이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아마 이렇게 법문 하실 거요.

 

그런데 이 거친 말을 하는 사람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시비심이 일어나서

저 사람 거친 말 합니다.” 이렇게 왔기 때문에

지금 거친 말 하는 사람이 시비심을 일으킨 거요?

그걸 보고 시비심을 일으킨 거요?

 

거친 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거친 말을 하는 사람을 보고 시비심을 일으켜서

부처님께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그를 이해한다면 너희들의 시비심이 사라지리라.

그는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이 이미 깊은 습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가 비록 마음에서 악심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의 입에서는 말이 그렇게 나온다.

그러니 그건 다만 말일 뿐이다.

 

일본 사람들은 아무리 마음이 착해도 한국말 안하고 일본말 하죠.

그것처럼 그가 마음이 착하다고 하더라도

그는 이미 말이 그렇게 습관이 되어서 그렇게 나오니

그것을 말에 매여서 듣지 마라. 이런 얘기에요.

 

이런데서 저희 신도님 가운데서 이런 걸 깨치신 분이 계세요.

남편이 항상 아내보고 몸이 좀 뚱뚱하고 얼굴이 넓적하다고

에이고 못난 게, 못난 게

이러니까 부인이 그 말에 너무너무 상처를 입었어.

 

그래서 성질이 나서

못나면 딴 여자하고 살지 왜 나하고 살자고 그래? 안 살면 되잖아.”

이러면서 그거 갖고 10년 이상을 싸우고, 거기에 대한 많은 상처가 있었어.

 

그런데 부처님의 법을 따라 수행을 하면서 크게 깨달은 거요.

에이, 못난 거, 뚱뚱한 게이 말이

여보, 당신 예뻐.” 이런 소리로 귀에 들리기 시작한 거요.

 

? 정말 그러면 그 사람이 나하고 안 살겠지.

그게 귀엽다는, 예쁘다는 그 식의 표현이라는 걸 안 거요.

 

그래서 에이고 못난 게, 뚱뚱해서.’

이러면 아이고, 내가 예쁘다고요?” 이렇게 대꾸를 하면

남편도 웃어버린다는 거요.

 

또 어디 절에 가려고 그러면

가지마.”

그러다가 가겠다고 그러면

가려면 다시는 오지 마.” 이런 다는 거요.

 

그러면 내가 나쁜데 가냐, 왜 나를 못 가게 하냐이래서 화가 나고 짜증이 나고 이랬는데

이제는 어떠냐,

그게 마음은 안 갔으면 좋겠다 하는 마음이라서 가지마라고 하는 말은 첫 번째 말이고.

 

두 번째 말은

갈려거든 오지 마이 말은 갔다가 빨리 오라는 말이구나.

라고 귀에 들리는 거요.

 

그래서 가려거든 오지 마이러면

,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이러면 남편이 웃어버린다는 거요.

이것은 말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렇게 마음이 되니까, 이 말이 그가 그렇게 아직도 남편이 말을 하더라도 전에는 그 말 때문에 늘 시비가 되었는데,

지금은 그 말 때문에 시비가 된 게 아니라, 이렇게 내가 대응을 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게 늘 서로가 웃는 해프닝으로 끝나는 그런 재미있는 일이 된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가 상대의 거친 말을 그를 이해하는 관점에서 보라.’ 하는 이 부처님의 말씀을 우리가 좀 더 깊이 귀담아 들어야 할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