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지안스님_선가귀감

지안스님 특별법문 선가귀감 _ 제7회 선가귀감7 (22:47)

Buddhastudy 2012. 1. 15. 22:12

  방송 보기: 불교TV

하여튼 올해는 소원성취 잘하시고, 뜻깊고 보람된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해가 바뀌었다고 그런 것이 아니고, 항상 사람은 새로워져야 돼요. 순간순간 새로워져야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시간을 가지고 말하면은 초침이 째깍째깍 하고 지나가지 않습니까? 그 순간순간 초침이 지나갈 때 우리에게 몰래 던져주는 메시지가 있다. 생각하셔야 돼요. 그 메시지가 뭐냐? 새롭고 새로워져라. 순간순간, 이 불교는 생각, (생각 염)자 있지 않습니까? 이걸 시간으로 해석합니다. 생각이 시간입니다.

 

念念生滅염념생멸 이런 말이 있는데 찰나라는 말을 번역하면은 (생각 념)자 거든요. 이게 겁하고 반대죠. . 겁이라는 말하고. 그래서 한 생각 일어나는 순간이 찰나에요. 그래서 이 생각을 맑게 하면은 뭡니까. 시간 청소가 되는 거에요. 시간을 청소한다는 말은 못 들어 보셨죠. 사람이 생각을 맑게 하면은 내가 누리는 시간이 맑아지는 거에요. 오탁가운데 처음 겁탁이라는 말이 있는데. . 겁이 조금 전에 설명 드린 대로 찰나의 반대말이거든요. 긴 시간을 뜻한 말입니다. 시간을 말하는 거에요.

 

그래서 중생세계는 오탁가운데 먼저 겁탁이 있는데, 이 겁탁이 있기 때문에 항상 질병이 있어요. 그리고 범죄가 있습니다. 전쟁이 있어요. 기근이 일어나요. 천재지변같은. 이런 걸 겁탁 때문에 일어난다. 이렇게 말해요. 그래서 생각을 맑게 하면은 그런 탁한 것이 정화가 되죠. 그래서 불교는 정토를 구현한다. 이래요. 정토. 깨끗한 국토. 부처님 세계를 정토라 안 합니까? 그래서 그런 생각을 맑게 하는 것이 불교공부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공부가 불교는 전부 마음공부입니다. 선도 마음공부고, 염불도 마음공부. 주력도 마음공부. 경전을 보는 것도 마음공부입니다.

 

그래서 마음 공부라는 게 이게 불가사의한 거에요. 마음공부가 잘 되면은 인생이 잘 되는 거에요. 마음공부가 잘못되면은 인생이 잘못되는 거에요. 이렇게 인생의 가치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불교에서는. 21장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공부가 조금 되면은 악업에 끌려가지 않는다. 공부를 해 놓은 게 좀 있으면은 죽을 때요. 악업에 끌려가지 않는다. 공부가 만약에 어느 정도 되면은 비록 금생에 뚫어내지 못하더라도 이 말은 이 화두를 타파해서 깨치지 못하더라도 이런 뜻입니다. 눈빛이 땅에 떨어질 때에. ???란 말을 번역한 말인데 임종시를 말하는 거에요.

 

임종시에 악업에 끌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마음공부가 중요하다. 인생을 결산하는 게 앞서 말씀드린 데로 마음공부에요. 보통 사람이 죽을 때 그 사람 살아생전에 지은 업력이 뭉쳐진다. 이런 말도 있어요. 그래서 그 업력에 끌려서 악도에 가든지, 또 선업이 지중할 경우에는 선도에 가든지. 판결이 난다. 이럽니다. 선수행으로 공부가 어느 정도 되면 금생을 마치고 죽을 때에 악업에 끌려 악도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건 공부의 어떤 효용과 이익을 말하는 거죠. 이 마음 자체가 불교에서는 반야라 그래요. 반야심경, 반야. 반야가 뭐냐? 우리 마음자체가 반야, 지혜라 번역 안 합니까? 지혜라는 거에요.

 

그래서 마음공부를 하면은 선 공부를 하면은 본래의 지혜가 회복된다 할까. 이래서 마음이 밝아지는 거에요. 밝은 등불은 어둠을 물리쳐요. 불을 켜놓으면은 어둠은 사라지는 거거든요. 그래서 공부가 되면은 중생의 어두운 무명업력을 물리친다. 이 말이에요. 이 비유가 딱 참 정교한 비유입니다. 등불이 있으면은 어둠이 없어진다. 그와 같은 논리에요. 그래서 공부해놓은 정도가 어느 정도 되는가? 이게 죽을 때의 다음 생을 결정하게 된다. 불교는 기본교리에 많이 나오는데. . 까르마. 업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잖아요. 그리고 산다는 게 업 쌓는 거에요.

 

물론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한 분들을 두고 말할 때 업적을 쌓았다 이러잖아요. 좋은 일 많이 한 거. 사회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훌륭한 일을 많이 한 그런 분들에게는 큰 공을 세웠다는 말을 큰 업적을 이루었다, 쌓았다. 이럽니다. 그러나 개개인 누구나 생존 자체가 업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거에요. 업이라는 말을 이해를 잘하셔야 되요. 업이라는 말을. 업이 다 다르거든요. 사람마다 업이 다 다릅니다. 옛날 시골에서 닭을 기를 때 어미 닭이 달걀을 둥지에 넣어 두면은 이 품어서 병아리를 까내게 합니다. 부화하는, 요새는 부화기 같은 것이 있지마는 옛날에는 부화기가 없었잖아요.

 

그때 이런 경우가 있어요. 오리 알을 달걀하고 섞어서 어미 닭이 품게 합니다. 그러면 계란, 달걀하고 오리 알을 같이 어미닭이 품어요. 삼주, 21일 되면은 부화가 되 나오거든요. 저번에 줄탁동시 얘기했죠. 이번에는 오리 알과 달걀에서 까 낸 병아리와 오리 새끼가 어떻게 다른가? 설명하는 얘깁니다. 처음에 갓 까져 나왔을 때는 병아리나 오리 새끼나 구분이 잘 안 돼요. 저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많이 봤습니다. 오리 새끼가 조금 작아요. 그리고 자세히 보면은 주둥이, 부리라 하지 않습니까? 조금 뭉툭해요. 그런데 똑같이 어미 닭을 따라 다닙디다. 병아리들이 종종종. 똑같이 어미 닭 따라다니거든.

 

그러다가 시골에는 집 밖, 대문 밖이나 때로는 울타리 해놓고 있는 농가도 있었잖아요. 울타리 밖으로 나가면은 조금 집 밖으로 나가면은 개울 같은 게 있거든요. 개울 물. 그 물가에 갔을 때, 오리 새끼는 물속으로 들어가 버려요. 물속으로. 그때 어미 닭이 깜짝 놀라는 시늉을 합니다. 오리 새끼, 지 새끼 아닌데 지 새끼인 줄 알고, 한쪽 날개를 치켜들고 뱅뱅이를 도는 시늉을 해요. 모성이 그게 발동하는 겁니다. 물에 들어간 지 새끼가 빠져 죽는 줄 아는 거에요. 짐승이면서도. 그래서 이상한 소리를 냅니다. ~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한쪽 날개를 치켜들면서 뱅뱅이를 도는 걸 본 적이 있어요.

 

그런데 오리는 본래 물속에 사는 짐승이오. 병아리가 물속에 들어갔으면은 속절없이 죽지만은 오리 새끼는 안 죽어요. 원래 물에 헤엄치고 다니는 새라. 오리 알에서 깨어난 오리 새끼와 달걀에서 깨어난 병아리와 병아리가 물에 들어가면은 죽어버리는데 오리 새끼는 안 죽는다. 뭐요? 업력이 다른 거요. 업력이. 참 묘하죠. 그래서 업력을 갖고 사는 존재다. 중생이. 그래서 죽을 때 내가 지은 업을 아무 데도 못줘요. 내가 고스란히 가지고 간다.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걸 달리 말하면은 내가 내 자신에게 내가 지은 업을 상속시키는 거에요. 다음 생의 나에게. 재산은 부모가 죽으면은 자식에게 상속이 되잖아요.

 

내가 지은 업은 아무에게도 주지를 못해. 내가 고스란히 가져가야 돼요. 다음 생의 나에게 상속을 시켜야 된다. 그래서 이 업 이론이 불교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업 이론. 업을 가지고 사는 존재. 업이 좋아야 된다. 공부를 하면은 업이 좋아진다는 얘기. 업이 좋아져서 죽을 때 악업에 끌려가는 일이 없어진다. 그런데 요즘 뭐 죽는 얘기는 듣기 싫어하잖아요. 살아 있는 얘기만. 그런데 사람이 누구나 때가 되면 가기는 가잖아요. 시절 인연이라는 게 있어서. 언젠가 떠나가야 될 때가 오거든. 그래서 죽음을 분명히 알고 있지마는 그 생각을 싫어나는 거에요.

 

그리고 죽은 다음의 일은 보통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겠죠. 내 알바 아니다. 죽은 다음의 문제는 내가 알 바 아니다.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이리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불교에서는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걸 단견이라 해요. 죽음 다음에 있는 모든 문제를 부정한다는 뜻이에요. 단견. (끊을 단)자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부정해 버리는 소견을, 없다고 부정해 버리는 소견을 단견이라 합니다. 물로 또 무조건 있다고 집착해도 안 된다 그랬어요. 그러면 상견을 이루어요. 그래서 단견을 가지거나 상견을 가지면은 불법을 바로 알 수 없다.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다음에는 공부하는 사람이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할 게 있다. 참선하는 사람이 알고 있는가? 서산스님이 특별히 참선 수행하는 이들에게 은혜를 알고 공부하라. 하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이 중요한 말이죠. 요즘은 현대 사회가 지식, 얼마나 지식이 많아졌습니까? 그런데 지식도 물론 분야를 나눠서 구분하면은 과학적인 지식, 예술적인 지식, 학문적인 지식. 이렇게 구분할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이 아는 게 지식이 도, 깨달음하고는 상관없다는 거에요. 이게 불교에서도 하는 얘깁니다. 남존보원선사, 趙州從諗조주종심선사 당시에 선가에서 많이 설하는 말이 있어요. 회자되던 말이 있는데. , 不屬不知불속부지라는 말이 있거든요. 도는 아는데도 속하지 아니하고 모르는데도 속하지 아니한다.

 

말하자면은 유식하고 무식한 거하고 상관없다는 거에요. 지식으로 도를 터득하는 게 아니라는 뜻에서 한 말이죠. 그런데 지금 현대 이 사회는 모든 게 지식. 그래서 뭐 과학적으로 생각해야 된다. 물론 타당한 말이죠. 합리적으로 생각해야 된다. 물론 여러 가지 말들이 있는데. 인간이 가장 먼저 알아야 될게. 뭡니까? 굳이 이걸 지식으로 말하면은 윤리적인 지식. 도덕적인 지식이 먼저 갖추어져야 되요. 예를 알아야 되고, 범절을 알아야 되고, 어떻게 올바른 행동을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해야 되는가? 이런 문제를 먼저 알아야 된다는 거에요. 가령 학생들이 학교 다니면서 공부를 합니다.

 

학교에서는 교과서 과목을 하나하나 배우면서 지식을 익히는 거죠. 그런 지식을 익히기 전에 마음속에 어떤 예의와 범절, 또 부모에 대한 어떤 효심. 이런 게 전부 윤리적인 문제거든요? 도덕적인 문제. 윤리적인 도덕적인 기본이 갖추어져 있어야 된다. 이렇게 말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참선하는 사람이 알고 있느냐? 뭘 알고 있느냐? 은혜를 알고 있느냐? 이렇게 묻습니다. 무릇 참선을 하는 사람은 네 가지 은혜가 깊고 두터운 줄 알고 있는가? 은혜를 알고 공부하느냐 이 말이죠. 선 공부만 아니라 인간이 하는 모든 기술을 배울 때도 무슨 예술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기 예술적인 그런 뭐랄까? 공부를 할 때 마찬가지겠죠? 은혜를 알라. 네 가지 원소를 된 추한 몸이 생각마다 노쇠에 썩어가는 줄 알고 있는가? 인생무상,

 

네 가지 은혜는 불교에서는 첫째 부모은혜. 부모에 대한 은혜. 그 다음 옛날은 나라임금. 왕조시대가 있었잖아요. 나라에 대한 은혜. 이걸 임금에 대한 은혜로 말합니다. 그 다음에 스승에 대한 은혜. 스승에 대한 가르쳐준 스승. 옛날은 이 스승을 부모처럼 받들어 모셨지 않습니까? 군사부일체라는 말도 있었고. 그다음에 출가한 스님들을 두고는 시주의 은혜라고 합니다. 이웃의 은혜, 중생의 은혜. 이렇게 말하기도 합니다. 이걸 사은이라 하기도 해요. 네 가지 은혜 속에서 사는 거에요. 사람 마음에는 세 가지 밭이 있다는 말이 있어요. 우리 마음속에 3개의 밭이 있다. 그 밭이 어떤 밭이냐?

 

은혜의 밭, 이걸 은전이라 합니다. (은혜 은)(밭 전). 은전이라 그래요. 그다음에는 (공경 경)자를 써서 경전이라는 게 있어요. 공경하는 거. 우리가 법당에 오면 항상 부처님에게 절을 하지 않습니까? 공경을 표하는 행위죠. 또 비전이라는 게 있습니다. 공경의 은혜는 경전이라 하고 비전. 자비할 때 뒷 글자. 남의 처지를 불우한 사람이 있는 경우, 안타깝게 생각해주고 동정해 줄줄 아는. 남에 대해서 일으키는 동정심. 이런 게 이 비전이에요. 그래서 은전, 경전, 비전. 세 가지 밭이 우리 사람 마음속에 들어 있다는 거에요. ~ 세 가지 밭을 다 합해가지고 달리 말할 때는 이걸 복전이라 합니다. 복전. 복밭. 복이 심어지는 밭이다. 이 말이에요.

 

작물을 재배할 때 콩을 심으면 콩밭. 무를 심으면 무밭. 고구마를 심으면 고구마밭. 이렇게 부르듯이 중생의 마음이 복을 심는 밭이다. 복전이라 하고. 그 복이 은전, 경전, 비전, 셋으로 구분된다. 해서 공부하는 사람이 첫째 은혜를 알아야 되고. 두 번째 이 몸이 언젠가 없어진다는 것. 사실 한 해 두 해 나이가 많아져 가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은 죽을 때가 가까워 온다는 얘기거든요. 서양 철학자 하이데카라는 사람이 그런 얘기를 했어요. 인생이 뭐냐? 한발자국 한발자국 공동묘지로 다가가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