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지안스님_선가귀감

지안스님 특별법문 선가귀감 _ 제7회 선가귀감7 (43:44)

Buddhastudy 2012. 1. 15. 22:13

  방송 보기: 불교TV

다음에 또 알아야 될 걸 여러 가지를 얘기하는데요. 사람의 목숨이 호흡에 있는 줄 아는가? 42장경에 나오는 말인데. 부처님이 어느 날 제자들 공부하는 방에 슬쩍 들어갔습니다. 그러다가 한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사람 목숨이 어디에 있느냐? 사람 목숨이 얼마 사이에 있느냐? 이런 뜻인데. 이 물었어요. 그러니까 처음 제자가 한 말은 목숨이라는 거는 며칠 사이입니다. 며칠 사이라고 말을 했어요. 인생이 쉽게 말해서 팔십을 살고 구십을 산다 해도 그거 며칠에 불과한 겁니다. 그랬더니 고개를 흔들면서 너는 아직 도를 몰랐다. 이래요. 너는 도를 모르는구나. 이랬어요.

 

또 한 제자에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한 제자가 밥한 끼 먹는 사이에 있는 거 같습니다. 한문 경 주절에는 일식경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밥한 끼 먹는 사이에 사람 목숨이 있다. 너도 아직 멀었다. 도를 모른다. 이 말이오. 세 번째 제자가 대답하기를 저는 숨 한번 내쉬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이 고개를 끄덕 끄떡 하면서 너는 도를 아는구나. 이렇게 말해준 경전의 얘기가 있는데 그 경 이름이 42장경이라는 경이에요. 사실은 이 순간에 불과한 거에요. 이 목숨이라는 게. 하루살이는 하루밖에 못 산다. 이러잖아요. 날 파리 곤충종류. 그런데 어떻게 보면 초명이라는 또 소 눈에 붙어사는 작은 벌레가 있데요. 이거는 소가 눈 한번 깜빡이는 사이에 태어났다 죽는데요. 제일 작다 그래요. 소 눈 깜빡이는 사이에 그냥 한 생애가 마쳐지니까. 焦螟초명이라 합니다. 초명이. 이름이.

 

이런 것은 전부 덧없다는 거. 찰나에 불과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들이죠. 그다음에 태어나서 부처님과 조사들을 만났는가? 이 인연도 좋은 사람 만나는 인연이 이게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신도님들께서 자녀들이 성장해 결혼정령기가 되면은 혼인시키잖아요. 혼인시킬 때 며느리 맞아들일 집안에서는 좋은 며느리가 우리 아들하고 짝지어지기를 바랄 것이고, 딸을 두신 분들은 좋은 사윗감이 우리 딸하고 짝지어지기를 바라는 거 아니겠어요? 그게 뭡니까? 사람과의 인연이 좋게 맺어지기를 바란다. 이렇게 말할 수 있죠. 그런데 이 성인을 만나는 거, 부처님, 성인 아닙니까? 또 법을 바로 아는 도를 깨친 도인들. 조사스님들. 이 만난 인연이 가족관계에서 맺어지는 인연 못지않은 중요한 뜻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어요? .

 

그래서 여기서 부처님과 조사들을 만났는가? 이렇게 물어봅니다. 그리고 이 없는 법을 듣고 희유하다는 마음을 내는가? 마음은 그 마음속에 어떤 정성이 들어 있느냐? 이게 중요해요. 마음은 누구나 다 마음은 가지고 있죠. 그러나 그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들어 있느냐? 어떤 정성, 어떤 뜻이 들어 있느냐? 전 시간에 입지가 분명해야 된다는 말도 있었지 않았습니까? 참선하는데 세 가지 요건 가운데에 분지라는 게 있었잖아요. 분지. ?을 떠나지 않고 절개를 지키는가? . 곁에 있는 사람과 잡담이나 하고 있지 않은가? 쓸데없는 얘기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지 않느냐? 공부하는 사람이 스스로 점검해 봐야 될 일들을 몇 가지 이렇게 하나하나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깨를 두드리면 시비를 일삼지 아니한가? 걸핏하면 남의 약점이나 물고 늘어지는 시비지심을 일으키는 그런 행동은 하지 않느냐? 이 말입니다. 화두가 어느 때나 어둡지 않게 잘 들리는가? 사람을 대하여 이야기를 나눌 때 화두가 끊어짐이 없는가? 간화선에 익숙해진 분들은 남과 이야기할 때도 그대로 들린다는 거에요. 저번 시간에는 잠을 잘 때도 그래도 화두가 들린다. 이런 말도 소개했죠. 보고 느낀 경계를 대할 때에 그때도 화두가 제대로 들리느냐? 지금은 이 대목에서는 이 간화선 공부하는 참선을 가지고 이야기하니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자기 공부를 분상에서 점검해야 될 게 많다. 또 이 몸의 육신이 반듯이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내가 다음 생에는 생사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이런 얘기에요. 여덟 가지 바람이 불어올 때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가?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는 바람이 있다 합니다. 팔풍이라 그래요. 이익이 올 때는, 쉽게 말해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이익이 올 때. 손해가 생길 때 기분이 나빠집니다. 기분이 좋아지고 나빠지는 그것도 엄격하게 말하면 마음이 움직이는 거에요. 그다음에 누가 나를 칭찬할 때. 칭찬받으면 기본 좋죠. 헐뜯음을 당하면은 기분 나쁜 겁니다. 이때도 마음이 흔들려요.

 

그런데 이런 경우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말라고 가르쳐요. 그래서 이(), (), (), () 네 가지와, (), (), (), (). 직접적으로 칭찬하고 비방하는 이런 경우가 있고. 괴로워지고 즐거워지는 경우가 또 있습니다. 이걸 한문 한자한자씩 말해가지고 이(), (), (), (), (), (), (), (). 팔풍이라 그럽니다.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여덟 가지 바람이다. 나뭇가지가 바람이 불면 흔들리듯이 흔들린다는 거죠. 그리고 마지막에 어떤 말을 했느냐?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이 몸을 제도하리오. 불교는 자신을 스스로가 제도하도록 하라. 이게 주 가르침이에요. 여러 가지 수행방법을 개인의 근기에 맞춰 해서 결국 스스로 제도하라.

 

물론 부처님이 중생을 제도한다. 타력적인 의미로 하는 말들이 있지마는 불교의 그 본령은 자력입니다. 내 스스로 나를 제도한다.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마음에 또 어떤 내용이 있느냐? 은혜를 알면서 공부하라. 말하자면은 윤리적인 정신이 선행되어야 된다. 도덕적인 그런 의식이 올바로 서 있어야 된다. 이런 말씀 끝에 다음에는 말과 행동이 하나가 돼야 된다. 하는 걸 강조해요. 말과 행동이 어긋나면 허실을 알 수 있다. 知行合一지행합일이라는 말이 있는데. 중국의 순자나 왕양명이 같은 분들이 내세운 학설이죠. 사람이 아는 것하고 실제 행동하는 거 하고 일치가 돼야 된다는 거에요.

 

여긴 어떤 말이 또 나오느냐 하면요, 말만 배우는 무리들은 말을 할 때는 깨달은 거 같으나 경계를 대하면 도리어 미혹하니 이는 말과 행동이 서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언행이 일치가 되도록 해라. 물론 앞서 소개한 말 가운데 도는 아는 거 하고 모른 거하고 상관없다. . 이런 말을 했습니다마는 우리가 불법을 그래도 실천해가는 그런 면에 있어서는 부처님 법을 현실생활에서 적용하고 실천해 가는 면에서는 행동이 구체적으로 아는 거에 맞추어 따라 일어나야 된다. 이 말이죠. 이게 중요한 거에요. 행동은 따르지 않는데 아는 것만 내세워서 자기과시를 하거나 이러면은 상에 도취된 거죠. 그리고 사람은 어떤 면에서 모르는 상태에 돌아갈 수도 있어요.

 

이게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만은 무슨 말이냐 하면 아는 지식을 가지고 행사하려고 하면 안 돼요. 지식이 때로는 필요하지만 때로는 소박하고 무심한 마음으로 돌아갈 줄 알아야 되요. 시골에 저번에 얘기한 번 했으니까 농사를 오래 짓고 사신 노 보살님이 한 분 계셨는데 달력을, 옛날엔 달력도 없었으니까.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 몰라요. 오늘이 몇 월 며칠인지 모르고 사는 사람이라면 무식한 사람이다. 이럴 거에요. 그래도 농사 잘 지어요. 한번은 유식한 집안의 박사가 하나 나왔는데, 서울에서 오래 공부를 해가지고 고향에 내려와가지고 집안 어른 할머니께 인사를 드려요. 할머니가 콩나물을 기르고 있어. 콩나물 있잖아요.

 

그러다 이 분이 콩 저거는 언제쯤 심는가? “할머니” “?” “콩은 언제 심습니까?” “?” “감 꽃필 때 심어.” 감꽃이 필 때 심는다. “감꽃 언제 핍니까?” “뻐꾸기 울 때 펴.” 그러니까 봄은 언제쯤 예를 들면 사월 초순 사월 중순 이런 식으로 말 안 하고, 자기가 평생 농사지어온 경험을 통해서 나름대로 느끼고 있는 게 있어. 감도 꽃 피지 않습니까? 감꽃 필 때 콩밭에 가서 심으면 돼. 콩 심다 보면 뒷산에 뻐꾸기가 뻐꾹 뻐꾹 울어. 그러니까 이런 소박한 얘기. 이게 어떤 면에서는 이게 진품이에요. 진품. 이게 진품이에요. 명품? 요새 서울사람들 명품 좋아한다는데. 명품 보다요, 더 좋은 게 진품이에요. 그래서 이런 소박하고 순수한 지식에 날리지 않는 이런 마음도 필요하다. 이거에요.

 

어느 작가가 쓴 소설에 보면은 우스운 얘기가 하나 있어요. 백치의 달이던가? 단편소설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어느 마을에 백치가 두 사람 살았어요. 천치바보. 백치가, 아무것도 몰라요. 이 사람들은. 그런데 머리가 좋지 않은 바보 같은 분들이 힘이 센 경우가 있어요. 지게를 지고 짐을 져다 나를 때 남보다 많이 지고,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가을에 보리농사를 짓는 일이 있거든요. 옛날 농가에서. 가을 올 때까지 논에서 일을 하고 그리고 왔어요. 가을은 해가 짧아지니까 일이 어중간할 때는 어둠이 올 때까지 일을 하는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두 천치가 들판에 가서 일을 하다가 각자 집으로 같이 들판 길을 걸어서 돌아옵니다.

 

그때 마침 산 위로 달이 떴어. 달이. 앞에 가던 이 바보 천치가 어이고 벌써 해가 뜬다. 이래요.’ 달 뜨는 걸 해 뜨는 걸로 안 것이 아니고, 이 바보는 해와 달을 거꾸로 알아서 낮에 뜨는 것이 달이고 밤에 뜨는 것이 해다. 이렇게 안 거에요. 뒤에 바보가 ~ 이 바보야, 낮에 뜨는 것이 해지. 밤에 뜨는 건 달이다. 이 사람은 해와 달을 알아. 그래서 앞에 말한 사람의 잘못된 걸 고쳐준다고 낮에 뜨는 것이 해지, 밤에 뜨는 것이 해이 아니고 달이다. 이러니까 먼저 말했던 바보가 아니다 이거요. 밤에 뜨는게 해고 낮에 뜨는게 달이다 이거요. 아이 그래서 두 사람이 자기 말이 옳다고 서로 안 지려고 그래.

 

그래서 서로 우겼어. 낮에 뜨는 것이 해지 밤에 뜨는 것이 해가 아니다. 아니다 이거야. 밤에 뜨는 것이 해지 낮에 뜨는 것이 해가 아니다. 아니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멈춰서가지고 지 말이 옳다고 우기고 있어. 그때 이 소설에는 건너 마을에 또 바보가, 이 두 바보와 비슷한 바보가 또 한 사람 있었어. 저만큼 다가오고 있어. 이래서 이 두 바보가 말하기를 저기 오는 사람한테 물어보자. 니 말이 옳은지. 내 말이 옳은지 한번 물어보자.” “좋다 물어보자.” 건넛마을 바보가 가까이 왔거 던. “당신 말해보시오.” “저 산 위에 떠오른 것이 해요? 달이요?” 건넛 마을 바보가 하는 얘기가 나는 이 동네 안 살아서 모르오.” 유명한 명언이 돼버린 거요. 나는 이 동네 안 살아서, 내 동네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데, 남의 동네 사정을 어떻게 아느냐?

 

그래서 이 바보 얘기가 우리에게 뭔가 시사해주는 깊은 뜻이 있어요. 건넛마을 바보처럼 돼버리면 끝난 거요. 공부도 끝난 거고, 참선 공부도 다 끝난 거고, 생사 문제도 다 끝난 거요. 이 동네 안 살아서 난 해인지 달인지 모른다 이거야. 그래서 어떤 면에서 철저히 몰라버리면 편안해져요. 철저히 몰라 버리면은. 그런데 우리가 아는 것 때문에 얼마나 괴로워해요. 아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거 많습니다. 번뇌. 이거 지적인 번뇌가 있거든. 五鈍使오둔사 五利使오리사 十使십사번뇌가 있는데 오둔사는 전부 지적인 번뇌에요. 잘못 아는 이것 때문에 생기는 번뇌다. . 그래서 항상 우리가 아는 데로 소박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그 소박한 마음에 의해서 아는 그걸 실천하고 살아야 된다. 실천.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지 않습니까? 소크라테스도 사대성인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서양철학이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새로 일어났다. 서양 철학의 시조라고 하는데. 철학이란 말이 애지란 말이에요. (사랑 애)(지혜 지)자를 씁니다. 그리스의 어원을 가지고 뜻을 번역을 하면은 지혜를 사랑한다. 이런 뜻이에요. 애지라는 말에 어떤 뜻이 있느냐? 사람이 아는 이유가 뭐요? 알아야 되는 이유가 뭐 있느냐? 자기 자신이 올바로 사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하다.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가 내 인생을 가장 올바르게 살기 위한 방법을 알기 위해서 지식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아는 대로 그대로 실천해야 한다. 이래서 실천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실천하는 지식. 실천지.

 

그래 이런 서양철학에서도 하는 말이 있는 것처럼 실제 수행이라는 거는 말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선도 말만 가지고 하면 구두선이라 이래요. 사실은 실참을 해야 되죠. 물론 계를 잘 지키는 그 속에서도 선이 있고, 염불을 잘하는 그 속에도 선이 있어요. 진언을 수지하는 주력을 잘하는 그 속에도 선이 있고, 경전을 잘 보는 그 속에서도 선이 있습니다. 여튼 마음이 고요해지고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이 되어서 어떤 경계에 끌려가지 않는, 그게 선이니까. 이래서 선을 하는 마음이 되면은 인생이 좀 더 심화된다 할까? 그러면서 살아가는 삶의 의미가 새로워질 수 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내내 건강하고 또 다음 주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