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58. 어떻게 귀하고 천한 것이 결정됩니까?

Buddhastudy 2019. 4. 18. 21:06


안녕하세요.

부처님께서는 2,600여 년전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태어나셔서, 그것도 지배계급의 일원으로 태어나셔서 스스로 그 기득권을 버리고 출가하셔서 수행자가 되셨고

 

깨달음을 얻으신 이후에

이 계급제도가 잘못된 허구적인 것이다.

이것을 설파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5주째 되는 날이었습니다.

바로 그 보리수 가까이에서 부처님께서 명상을 하고 있는데

한 바라문이 부처님이 수행하고 있는 그 앞을 지나가게 되었어요.

 

그때 그 바라문이 부처님께 질문을 했어요.

수행자여, 어떤 것이 고귀한 바라문입니까?

바라문은 고귀하지마는 바라문 가운데에도

더욱더 고귀한 최고로 성스러운 바라문은 어떤 것입니까?” 이렇게 물은 거요.

 

당시에 보편적인 대답은 소위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은

첫째, 출생이 귀해야 합니다.

, 바라문 출생일뿐만 아니고 그 바라문 출생 중에도 윗대로 올라갔을 때 어머니대나 아버지 대에 양쪽이 다 위로 7대까지 바라문이 아닌 피가 섞이지 않는 순수 바라문 혈통이어야 한다. 이런 얘기에요. 위로 7대까지.

 

그러면 우리 어머니가 순수혈통이다, 그러면 외할아버지 할머니도 뭐가 되어야 합니까? 순수혈통이라야 되죠.

우리 아버지가 순수 혈통이라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순수혈통이어야 되죠.

또 할머니 할아버지가 순수 혈통이라면 그 위에 다 그분들의 어머니 아버지가 순수 혈통이라야 되지 않습니까. 그죠? 그러면 8명이 되어야 되죠.

8명이 순수혈통이 되려면 그 위로 몇 명이 되어야 됩니까? 16명이 되어야 되죠.

16명이 순수혈통이 되려면 그 위로 32명이, 또 그 위로 64명이, 그 위로 128명이

이렇게 해서 7대가 되려면 27승이 다 순수혈통이라야 됩니다.

 

그것은 인도 당시에도 쉬운 일은 아니었나 봐요.

왜냐하면 바라문은 바라문끼리 결혼을 하는데, 이 바라문들이 남자는 바라문인데, 바라문보다 낮은 계급의 여자하고 결혼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바라문 여자가 자기 계급보다 낮은 계급의 남자하고는 결혼하지 못합니다.

 

이거는 우리가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요.

양반집 딸이 상놈 남자하고는 결혼을 못합니다. 그러면 죽여 버립니다.

그러나 양반이 평민의 아내를 맞을 수는 있죠.

무슨 얘기인지 이해하시겠습니까?

 

그러면 이 아들 딸은 양반이 됩니다.

그러니까 양반이라도 약간 한 계급 떨어지는 양반이 되는 거요.

그래서 신라시대에도 이게 있었죠.

이게 뭐요? 성골하고 진골이란 말이에요.

 

첫째, 출생이 7대로 순수혈통이어야 한다. 이러니까 굉장히 귀한 거요.

그다음에 태어나서 그 신을 찬미하는 노래를,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걸 다 암송할 수 있어야 되요.

소위 말하면 베다라고 들어보셨어요? 4가지 베다를 다 정통해야 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조건이 있다. 이 말이오.

이런 조건을 말해야 아이고, 훌륭하십니다.” 이렇게 되는데

 

부처님께서 뭐라고 하셨냐하면

바라문이여,

출생에 의해서 인간이 귀해지거나 천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행에 의해서 귀하고 천한 것이 결정이 됩니다.”

 

행이라는 것은 3가지에요.

말하고, 행동하고, 생각하는 이 3가지

신구의 삼업이 깨끗해야 귀한 존재가 되고

신구의 삼업이 나쁘면 천해지는 거란 말이에요.

 

그러니 정말로 이 세상에서 고귀한 사람이 되려면

우선 이 몸뚱이로는 살생하지 않고,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줘야 되고

남의 짐을 뺏거나 훔치지 않고 오히려 남을 도와줘야 되고

삿된 음행을 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타인을 기쁘고 즐겁게 해줘야 되고

거짓말 할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고

욕설하지 않을 것이 아니라 자비롭게 위로해줄 수 있어야 하고

 

이렇게 욕심을 버리고,

화내고 짜증내는 마음을 버리고,

어리석음을 버리고

이렇게 계율을 청정하게 지키고

그 마음을 고요히 하고 지혜를 증득해 나가는

이렇게 할 때 귀한 존재가 되는 거다. 성스러운 존재가 되는 거다.”

 

이런 말씀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이 바라문이 듣고는 !”하고는 고개를 탁 돌리고는 엉덩이를 씰룩씰룩 흔들고는 지나가버렸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어.

쉽게 말하면 아니꼽다. 되도 않는 얘기를 하고 있다. 뭘 모르는 소리 한다.’ 이런 태도죠.

 

그러니까 이 분은 부처님이 성도하시고 처음 만난 분이에요.

진실로 법에 귀의해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부처님의 첫 번째 제자가 될 수 있는 그런 만남이었지만, 그는 자기가 여태 살아오면서 배운 그 관념, 거기에 휩쓸려서 이 진실을 알아듣지 못했던 거요.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좋은 법을 사람들이 듣고 깨달을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드신 거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보통 사람에게 얘기해서는 안 되겠다.

그럼 누구에게 가능하겠느냐,

내가 수행할 때 나를 가르쳐준 나의 스승이라면 이 법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그 분은 연세가 드셔서 돌아가셨어요.

또 나의 다른 스승이라면 이 법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그 분도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자신이 수행할 때, 함께 6년간 수행했지마는 그러나 부처님께서 내란자라 강가에서 목욕하시고 허기져 쓰러졌을 때, 수자타의 유미죽의 받아먹는 것을 보고

고타마는 수행을 포기했다.’ 하고 비난하고 떠나버리기는 했지마는

그래도 나의 도반인 그들이라면 이 좋은 법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바라나시 성 밖에 사르나트, 녹야원으로 전법을 하러 떠나신 거란 말이요.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진실을 바로 일러줬지마는 이 자신의 어떤 고정관념에 휩쓸려서 알아듣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비난하고 힐난하고 떠나버렸다.

나중에 보면 이렇게 떠나버린 정도가 아니고, 도리어 부처님을 해치려하고

부처님에게 흙덩이를 집어던지고 부처님에게 욕설하고 이런 많은 일들이 벌어진 거요.

 

여러분들이 볼 때 왜 부처님같이 훌륭한 분이 그런 비난을 받아야 할까

왜 그들은 부처님 같은 훌륭하신 분을 비난했을까 이렇게 생각하지마는

 

당시의 계급제도라는 그런 틀, 그런 관념 속에서 사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이 부처님의 말씀은 세상을 뒤흔들어 놓는다.

그렇지 않으면 특히 바라문들은 우리들이 갖고 있는 이 고귀함, 이 모슨 기득권을 저 사람이 허물어버린다. 이런 두려움 같은 게 있었던 거요.

그렇기 때문에 계속 부처님을 해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런 가운데에서 부처님이 평생을 사신 거요.

 

그렇다면 부처님은 맨 처음에 이 문제를 제기하고 이 문제를 풀어내셨지만, 그 이후에 제자들은 어때요? 오히려 더 쉬워야 될 거 아닙니까. 그죠?

처음에 개척하기가 어렵지, 그 다음에 이 뚫린 길을 따라가는 건 어려운 게 아니란 말이오.

그런데 이 사회적 저항이 얼마나 거셌느냐하면 100~ 400년 지나가면서

불교가 세상을 정화한 게 아니고,

세상이 불교로 오히려 들어와서 불교가 세상에 물이 들어서

거꾸로 나중에 불교가 이런 신분제도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가버린 거요.

 

그래서 이 상한 논리가 형성 된 거요.

전생에 복을 많이 닦으면 이 생에 브라만이 되고,

전생에 나쁜 짓을 많이 하면 이 생에 천민이 된다.

 

그러니까 이 생에 신분이 높은 것은

바로 전생하고 연결해서 이런 설명이 되어짐으로 해서

결국은 세상에 이런 신분 제도가 타파되어야 할 대상이 안 되고,

결국은 브라만이 되는 게, 양반이 되는 게 꿈인

그래서 비록 이 세상에 천민으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열심히 봉사하면 다음 생에는 높은 계급으로 양반으로 태어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전환해서 이 브라만의 논리를 가버린 거요.

이름은 불교라는 이름을 갖고 있고, 내용은 브라만으로 바뀌어버린 거요.

 

오늘 우리가 배우고 있는 불교는 이런 불교를 지금 많이 배우고 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초기의 그 정법을 공부하는 게 아니고,

후대에 세속에 물들어서 불교가 세속화되어버린,

즉 브라마니즘 되어버린 힌두니즘으로 되어버린, 이런 불교를 우리가 배우고 있기 때문에

인도사회에서는 불교가 힌두교와 다른 특색이 점점 사라지게 됐죠.

 

그렇기 때문에 무슬림이 인도에 침입해서 스님들을 죽이고, 탄압을 했을 때 불교는 힌두이즘 속으로 들어가 버린 거요. , 차이가 별로 없다보니까 강력한 외부의 적에 같이 대응하다보니 색이 하나가 되어 버린 거요.

 

그래서 인도에 가면 불교는 힌두이즘의 일파다.

힌두교에서 나갔다가 도로 힌두교로 들어왔다.

그래서 부처님은 비슈누신의 8번째 화신이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이 힌두교신의 한 화신으로 취급을 받는 거요.

 

그러니까 인도에서는 불교를 다른 종교라고 배타도 하지 않지마는,

굳이 불교를 믿을 필요가 없는 거요.

힌두교의 일부분으로 보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그런 역사로 인해서 생긴 거다.

 

오늘 우리 사회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불교도 이런 요소가 많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법에 의지하지 않고

수행정진해서 해탈하는 게 목표인 불교가 아니고

 

다음 생에 좋은 데 태어나는 게 목표인

이런 윤회전생에서 벗어나는 게 목표가 아니고

윤회전생 안에서 천상에 태어나는 게 목표인

, 복 받는 게 목표인

이러한 종교로 변색된 게 아닌가.

 

이런데서 우리는 이런 종교가 이런 불교는 잘못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이게 현재의 불교, 현실의 불교다.

 

그러니 이런 사상으로 신앙해 가는 사람들은 가도록 놔두되

해탈을 목표로 하는 사람,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좀 벗어나서

법에 귀의해서 수행하는 쪽으로 나아가야 된다.

 

그리고 이렇게 법을 믿고 이해하고 행해서 그 깨달음이 체험이 되고 안목이 열리게 되면

개인이 행복한 것뿐만 아니라,

바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이 법을 전하는 강력한 전법의 열의가 저절로 일어나며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 많은 모순이 눈에 보이고,

그런 모순을 해결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

 

그런데서 불교의 사회적 여러 실천적 활동들이 나오게 되고

이 세상이 알지 못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깨우쳐주고

비전을 제시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된다.

 

신라시대에도 보면 불교가 번창했지만 후기에 가게 되면

불교가 세상과 야합을 해서 그냥 기득권자를 왕족을 귀족을 옹호하는

이런 불교가 되어버립니다.

 

원효대사의 삶의 일대 전환은 바로 이런 불교를 벗어나서

중생을 위한 불교로 진실의 불교로 돌아가고자 하는

하나의 혁명적인 전환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거기도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오거든요.

경흥국사는 왕의 스승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왕을 만나러 궁중에 출입할 때도 말을 타고 궁 안에 까지 들어와도 되는 특권이 부여된 분이에요.

그러기 때문에 이분이 길에 지나가시면, 많은 사람들이 다 왕을 대하듯이 그런 예우를 했어요.

 

왕이 지나가면 모든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쳐다보면 안 됩니다.

그런데 한 사나이가 머리는 기르고 승복은 입고, 이런 존재를 비승비속이라고 그래.

중도 아니고 속도 아니고.

그런 사람이 망태기에다가 마른 생선을 몇 마리 넣어 둘러매고는 경흥국사가 지나가는데 고개도 안 숙이고 떡 서서 길을 가로막는 거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야단을 쳤어요.

어떻게 왕의 스승이 우리 국사님이 지나가는데 이렇게 고개를 쳐들고 길을 막고 있느냐.

하물며 부정한 물건인 그런 고기를 메고 서 있느냐. 냄새를 풍기면서 말이야.

빨리 썩 물럿거라 이렇게 하니까

 

이 비승비속이 하는 말이

, 어떤 사람은 산 고기를 사타구니에 끼고 다니는 사람도 있는데

나야 뭐 저자에서 파는 마른 생선 몇 마리 갖고 있는데 이게 뭐가 문제냐.”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하는 거요.

 

산 고기를 사타구니에 끼고 있다. 이 말이 무슨 말이오.

말을 타고 간다 이 말이지

그 소리를 듣고 말에서 급히 내렸고,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다시는 말을 타지 않았다.

 

이게 바로 불교가 어떻게 변해갔는가

상류층 사회에, 기득권과 결탁해 갈 때, 또 어떤 비판이 제기 되었는가

그런데서 우리는 그 시대의 불교를 볼 수 있다.

그런 어려움이 있었지마는 그것을 극복하려는 운동도 있었다. 이렇게 볼 수가 있죠.

 

또 다른 예를 보면 왕이 불국사제에 참여를 하는데, 어떤 초라하고 늙은 노승이 자기도 거기 참여하려고 갔는데, 행색이 초라하다고 안 넣어주는 거요.

왕이 들어가다가 그런 스님을 보고

왜 거기 서 있냐?” 하니까

행색이 초라하다고 안 넣어준다는 거요.

왕이 특명으로 그 사람 넣어줘라그랬어. 그래서 들어가게 된 거요.

 

그래서 왕이 자랑스럽게 말했어요.

당신 내 덕택에 들어간 줄 알아라.”

제가 끝나고 왕이 나오다가 그 스님을 만났어. 그러면서 그 스님에게 충고를 한 거요.

 

어디 다니면서 왕이 참여한 제에 참여했다고 말하지 마시오.”

이 사람이 자랑할 거 아니오.

, 대왕님이 참석한 제에 참석했다.’

 

그러니까 그 초라한 노승이 하는 말이

알겠습니다. 그런데 대왕님께서도 어디 가셔서 부처님 진신이 참가한 제에 참가했다.’ 그런 말은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그러고는 허공을 날아서 없어진 거요.

 

왕이 그때 크게 깨닫고 그 스님을 추적했는데, 그 스님이 저 남산 산기슭에 가서 바루와 주장자를 놓고 없어져버렸어.

그래서 왕은 그 곳에다가 무불사, 부처님이 사라진 곳이다. 이렇게 절을 지었다고 그래요.

이것도 우리가 얼마나 상에 집착을 하는 그런 신앙을 하는가, 하는 것을 말하죠.

 

그러니까 오늘 우리 불자들이 정말 부처님 법에 귀의해서 비록 세상은 돈과 권력과 인기와 이런 것으로 추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 불자들은 그것이 우리를 해탈케 하는 게 아니다.

그것이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니다.

이것을 확연히 아셔서

그런 것을 너무 부러워하고, 거기에 열등의식을 느끼고, 그렇게 살지 않아야 한다.

 

부부간의 갈등, 여러분이 자식이 두고 걱정하는 것도 다 그런 문제들로 사실은

사랑하는 사람과 실망하고 다투고 괴로워하고

자식들보고도 거기에 혹시 빠질까 해서 야단치고 싸우고,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요.

 

그래서 그것은 다만 우리가 사는데 필요한 것들일 뿐이지,

그것이 우리를 참으로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뛰어넘어야할 것이지,

따라가야 할 것은 아니다.

 

이것을 좀 더 깊이 아셔서 수행 정진해 나가신다면

여러분들에게도 해탈과 열반이라는 것이 바로 가까이에 있다.

하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