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60. 스스로 운명의 주인이 된다

Buddhastudy 2019. 5. 2. 20:28


안녕하세요.

오늘은 여성 출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제 말씀 드렸듯이 부처님 당시에 이미 여성수행자, 비구니 제도가 생겨났습니다.

 

이 여성에 대한 사회적 차별은

어떤 계급제도의 차별보다도 더 심한 것이었기 때문에

천민들이 출가해서 수행자가 되는 것도 어려웠지마는 여성이 출가해서 비구니가 되는 것은 그 10배도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처음에 제도를 만들기도 어려운 일이었지마는 그것이 유지되는 과정에서도 많은 문제가 생겨났습니다.

 

당시 인도 사회에서 여자는 하나의 독립된 인간이 아니고,

반드시 남자에 의지해서 자기 존재가 있는 부차적, 이차적 존재였단 말이에요.

 

그런데 여자 분들이 출가해서 한 사람의 독립된 인간으로 숲속에서 빈집에서 이렇게 정진을 할 때, 그 당시 풍속으로는 이것은 버려진 여인이었습니다. 주인 없는 여인이었다 이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아무나 데려가려고 그랬어요.

요즘 말로하면 성폭행 사건도 매우 많았다.

 

이러다보니까, 이 여성은 출가하기는 해도, 수행생활을 계속 하기는 이 남자 출가 승려인 이 비구들처럼 똑같이 할 수가 없었습니다.

사회가 그것을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그런데 당시 사회에 주인없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이미.

누구였겠습니까?

유녀, 기생이었습니다. 기생은 특정한 어떤 남자가 주인이 아니다. 이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주인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아무 남자나 가질 수가 있었다.

 

그러니 이 출가한 비구니 스님들이

당시 사회적 통념으로는 유녀와 같이 느껴진 거요.

그렇기 때문에 특히 이 성적인 유혹, 폭력, 이런 게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 피해가 아주 많았습니다.

 

그러니 여성이 수행한다는 것은 이런 조건에서는 남성들에 비해서 그 결심도 12배 더 강해야 했고, 그 수행의 과정도 훨씬 어려웠습니다.

이런 문제들에 봉착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비구니들은 안거를 할 때 비구니끼리 모여서 안거를 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왜냐하면 워낙 이 성폭행 사건이나 납치 사건이 많았기 때문에.

 

그래서 비구니들이 안거를 할 때는 반드시 비구처소가 있는 가까이에 안거를 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바로 비구들이 그들을 보호할 수 있도록.

또 세상 사람들도 그 비구들로 인해서 이 비구니들에게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이렇게 해서 비구처소 가까이에 비구니들이 안거를 한다. 비구니는 비구들처럼 혼자서 아무 곳에나 안거를 할 수가 없다.

혼자서 몇 달 동안 정진한다이런 거를 할 수가 없도록 정한 거요.

 

이제 이런 식으로 똑같은 출가수행자인데 여성들에게는 백가지 제한이 있었다.

이 문제는 당시 사회로 돌아가서 살펴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배경이 있는데, 그런 걸 다 무시하고 지금의 입장에서만 보면 부처님도 여성을 차별했다. 여성은 출가할 때 3번이나 거절을 했고, 출가한 뒤에도 8가지 이런 제약을 뒀다. 8가지 제약이 팔경계라는 거예요. 팔경법 또는 팔경계라는 거요.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비구니들은 홀로나 자기들끼리 숲속에서 정진을 할 수가 없고,

안거를 할 때는 반드시 비구가 있는 처소 가까이에서 해야 된다. 이런 식으로 제한이 있었다.

-비구니들은 포살을 할 때, 자기들끼리 단독으로 하지 않고, 반드시 비구 처소가 있는 곳에 가서 포살을 하도록 한다든지,

(포살: 자기의 허물을 뉘우치는 것을 말하죠)

-비구니스님들은 비구들을 당신 잘못했소.’ 이런 식으로 꾸짖어서는 안 된다든지,

-비구니들은 비구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든지,

 

지금 보면 누가 봐도 좀 차별이 있다. 차별이 심하다. 이렇게 볼 수 있는 항목입니다.

그러나 당시 시대적인 조건하에서는 이런 8가지 제약이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까? 비구니제도를 허락했다는 게 중요한 겁니까? 허락했다는 게 중요한 거요.

 

예를 들어서 오늘 우리 불교에서 법문을 한다. 또는 목탁을 치고 집전을 한다고 할 때, 옛날에는 이것은 스님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만약에 재가자가 이렇게 하면 야단을 맞았다. 이거요.

 

이럴 때, 스님이 계실 때는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러나 스님이 없을 때는 목탁을 쥐고 집전을 할 수 있다. 이렇게 정했을 때, 이 승속 차별이 있는 조건에서 차별이 없는 거로 한발 다가간 거요? 차별이 더 심화된 거요?

 

목탁을 칠 수 있다. 집전할 수 있다. 설법할 수 있다는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차별이 없는 것으로 봤다. 이 말이오.

다만, 이 상황, 시대적 조건하에서 스님이 계실 때는 스님이 한다. 이런 조건이 붙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재가자도 스님과 똑같이 할 수 있다 하는 이 사실이 혁명적으로 바뀐 거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이해하시면 이 문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시대적 상황이 그랬다. 2가지 요인이 있죠.

비구니들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과

이런 시대적인 상황, 저항을 조금 누그러뜨리기 위해서 이러한 몇 가지 조건이 있는 하에서 허락이 되었다.

 

저는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에 의해서 이런 8가지 조건이 있었을까, 아니면 후대에 내려가면서 이런 조건이 만들어졌을까. 이런 생각이 가끔 들기는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고, 500년 안쪽에 이 비구니제도는 없어져버립니다.

인도 전통사상에서는 여성은 남성보다 못하기 때문에 여성은 이 세상에서 위대한 자는 될 수가 없다. 그 위대한 자가 다섯 사람이 꼽혔습니다.

 

첫째가 전륜성왕, 왕중의 왕

그리고 깨달은이 붓다. 인드라신인 제석천, 자제천왕인 마왕, 대범천왕인 범천왕,

이 다섯은 여자는 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여자는 복을 많이 지어서 다음 생에 남자로 태어나서 남자 몸으로 될 수 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바로 여성의 수행의 길을 허락했다는 것은 바로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될 수가 있다. 이런 얘기죠.

 

몸뚱이가 여자다, 남자다 하는 것은 하등 중요한 게 아니다.

여성이 차별받는 것은 몸뚱이로부터 오는 게 아니고,

하나의 이런 성차별이죠.

 

마치 피부가 희고 검고를 가지고 성스럽고 부정한 걸 정하지마는,

사실은 그것은 우리들의 허위의식에서 온 거지, 피부빛깔에서 온 것이 아닌 것처럼

남성은 귀하고 여성은 천하다는 것은 이 존재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라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여성도

그 마음이 깨끗하고, 말이 청정하고, 행이 청정하면

다 붓다의 길로 갈 수가 있다.

 

이래서 비구니제도를 허락했는데, 불교 안에 이 바깥 세속적인 사상이, 이교도의 사상이 점점점점점 불교 안으로 침투를 해서 스님들이 쓴 유명한 글인 논장에는 이 5가지가 도로 들어와 있습니다.

 

여성은 아무리 위대하게 되어도

여성의 몸으로는 이 5가지가 될 수 없다 라는 5불가설이 있게 된 거요.

 

그러니까 여성의 몸으로 부처가 될 수 없다면 여성은 굳이 승려가 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죠?

부처가 되려면 남자 몸을 받아야 되니까, 여자의 몸으로는 남자 몸을 받는 게 지금의 목표가 되어야 되고, 남자 몸을 받아서 출가해서 수행을 해야 부처가 될 수 있다.

이런 데서 비구니제도를 없애버렸다.

 

여기서 대승불교가 일어나면서 다시 대승불교 안에서는 비구니제도가 여성성불론이 다시 제기된다.

오늘 우리 한국 불자들은 마침 그래도 대승불교의 전통에 있기 때문에

여성성불론이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고, 또 비구니제도도 이렇게 온전하게 남아있지마는

남방불교에서는 비구니제도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남방 불교의 여성들은 불교 자체가 여성을 차별하는 종교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전통적으로는 불교적 신앙을 갖고 있는데,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하거나 여성 해방론에 눈이 띄게 되면 이 자기 신앙에 대한 갈등이 생겨서 이 남방에서도 똑똑한 여성들은 대부분 결국은 유학 가서 종교를 바꿔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이것은 잘못된 불교가 얼마나 큰 불교발전에 위해가 되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 거요.

 

불교야 말로

계급해방의 선구자였고,

성해방의 선구자였다.

 

그 성해방이 단순히 서양의 여성 해방운동처럼

남자도 술 먹는다, 우리도 술 먹자.

남자도 담배 피운다, 우리도 담배 피우자.

남자도 바람피운다, 우리도 피우자.

남자도 직장 가진다, 우리도 가지자.

재산도 똑같이 나누자,

가정일도 똑같이 해라,

애도 반씩 나눠보자,

이런 식의 평등이 아니다. 이거야.

 

불교에서의 평등은

완전한 인간이 되는데 있는 거요.

붓다가 되는 데 있다.

 

술이 나쁘다면

남자들이 먹더라도 여자는 먹지 말아야 하며

담배가 몸에 나쁘다면

그것은 남자들이 하더라도 여자는 하지 말아야 하며

욕설하는 것이 나쁜 것이라면

남자들이 하더라도 여자는 하지 말아야 돼.

그걸 본받는 게 그걸 같이 하는 게

평등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서양적 평등관은 잘못하면 보살행과 반대가 된다.

따지고 싸우고 이렇게 되기가 쉽습니다.

 

그러니 재산을 부부가 공동명의로 하자든지, 이런 거를 주장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바로 나의 행복을 누구에 의지해서 얻겠다는 이 의지심을 버리는 것,

이것이 진정한 주인의 길이다. 해방의 길이다.

이런 것을 우리가 다시 새겨봐야 한다.

 

오늘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아직도 여성들은 이 관습적으로 남자에 의지해서 살아온 전통의 관습에 젖어있기 때문에 요즘은 공부도 똑같이 하고, 이렇게 능력도 비슷합니다.

 

그러니 신체에서 능력이 결정되는 게 아니죠.

그동안에 사회적인 제약 속에서 능력이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마치 여성은 열등한 존재인 것처럼 인식되었을 뿐이지, 오늘 똑같이 교육을 받고, 똑같이 훈련을 받을 때 능력에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여기, 아직도 잔재가 남아 있는 게, 뭐 좀 하다가 어려우면, 취직이 안 되거나 하는 사업이 안 되거나 이렇게 하면 어떤 마음을 한다?

에라 시집이나 가버리자.”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말을 해서도 안 된다.

 

또 남편이 직장을 잃거나 쉬면

가장이 돈을 안 번다.”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뭔가

남자는 돈을 벌고,

남자는 나를 보호해야 되고,

남자는 나의 의지처고,

좋은 남자를 만나서 거기 의지해서 행복을 얻겠다하는

이런 생각이 있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생긴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주인이 되어야 된다.

바로 내가 보살이라면

바로 남자하고 대들어 싸우고, 이런 것이 아니라

바로 돌볼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된다.

거기 의지하는 게 아니라

도와주고, 보살펴주고, 보호해주는 이런 마음이 되어야 된다.

 

그렇게 될 때 부부관계도 좋아지고,

또 남편이 실직을 했다하더라도 그거로 괴로워하지 않고, 실망하지 않고,

또 남편이 나보다 먼저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것도 죄의식을 갖지 않게 된다.

 

옛날에는 남자가 주인이기 때문에 남자가 죽으면 여자는 주인을 따라 죽어야 되는데, 죽어야 되는데 차마 못 죽어서 이 세상에 사는 게 그저 하늘 쳐다보고 살 수가 없다. 죄인이다. 그래서 미처 못 죽은 사람이다. 그래서 뭐다? 미망인이다. 이렇게 되는 거요.

 

그래서 옛날에는 남편이 죽으면 여자를 같이 묻었습니다.

이런 문화는 많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죽을 때 여자를 같이 묻었어. 살아있어도 묻었어. 죽이거나.

화장을 할 때는 같이 화장을 하게 되죠.

 

주인이 죽으면 종들을 그 무덤 속에서도 또 저 딴 세상에 가서도 시중 들으라고 같이 묻습니다.

소위 이것을 순장이다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이런 것도 다 이게 신분이 낮거나 여성은 바로 주인의 종과 같은 존재가 주인의 부속품이다.

 

바로 이런 것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바로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자신이 되는 거요.

 

비구니가 된다는 것은

스스로의 운명의 주인이 된다.

자신이 누구의 무엇으로 불리는 게 아니고

자기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이러한 제도가 옛날에 없었다 하더라도 요즘은 생겨나야 하죠. 시대가 바뀌었으니까.

그런데 이 남방불교에서는 부처님 당시에 2600년 전에 있었던 제도가 지금 복구하기가 어렵다고 할 때,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이거요.

 

부처님 당시에 없었다 하더라도 시대가 이렇게 바뀌었다면 생기는 게 법에 맞다.

그런데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 것이 이런 세속적인 문제에 의해 없어졌다면, 법에 귀의한 자라면 법에 눈뜬 사람이라면 이것이 복원이 되어야 된다.

 

그런데 이것만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 모든 불자는 부처님 법에 귀의해서 붓다의 길로 가는 겁니다.

거기에 출가해서 전념하는 사람이 있고,

재가해서 복을 지으면서 가는

2가지 길이 있을 뿐입니다, 여기 아무 차별이 없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들은 출가한 스님만 수행해서 해탈의 길로 가고

재가한 신도는 법에 귀의해서 수행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재가자 스스로가 생각하거나 또 스님들이 재가자를 그렇게 취급을 한다.

그렇지 않다.

 

모양과 형식에 남녀가 있듯이, 비구 비구니가 있듯이

출가자와 재가자가 있을 뿐이지

법에 귀의해서 해탈의 길로 가는 이 길에서는 남녀도 없고 승속도 없는 거다.

 

그러니 우리 모든 불자들은

법에 귀의해서

수행정진해서

마음의 번뇌가 없는 이 행복의 길로

다 똑같이 나아가야 한다.

 

이 수행의 가르침이 불교인데,

불교가 브라만교처럼 힌두교처럼 이렇게 종교화되어서

스님은 사제계급이 되고, 재가자는 신도가 되어서

복을 빌어주고, 복을 비는 이런 종교화 돼 버렸기 때문에

바로 우리가 부처님의 진실한 법을 잊어버리고 있다.

이것을 우리가 다시 되새겨서 수행정진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