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지안스님_선가귀감

지안스님 특별법문 선가귀감 _ 제9회 미혹한 마음으로 닦으면 무명만 도울 뿐이다 (20:45)

Buddhastudy 2012. 2. 5. 22:49

  방송 보기: 불교TV

오늘 28장에 보면은 어떤 말이 나와 있느냐? 122쪽입니다. 미혹한 마음으로 닦으면 무명만 도울 뿐이다. 迷心修道미심수도는 但助無明단조무명이라. 하는 말이 나옵니다. 그러니까 돈오하고 나서 수행이 시작된다는 거에요. 돈오. 단박에 깨닫고 나서 닦는다. 이때 돈오를 규봉스님같은 중국 당나라 때 계셨던 스님은 解悟해오라. 이렇게 설명하기도 했죠. 말하자면은 목적지를 알고 가야 된다. 이 말이오. 목적지를 모르면은 헤매잖아요. 사람이 길을 갈 때 자기가 가고자 하는 그 목적지의 방향을 분명히 알고, 어떻게 해서 가는가? 그 길을 알고 가야 된다는 뜻이에요.

 

눈이 목표물을 먼저 보는 게 돈오입니다. 내가 어떤 서울 시내 경우를 예를 들어서 말하면은 큰 높은 건물이 있는데, 거기를 찾아가야 된다. 그러면 그 건물이 내 눈에 보여지는 게 그게 돈오에요. 그걸 보고 찾아가는 거에요. 걸음을 걸어서 가는 거, 이런 뜻으로 이해하면 되는 대목인데, 미혹한 마음으로 도를 닦는 것은 단지 무명을 도울 뿐이다. 무명, 캄캄한 어둠, 어리석음, 달리 말하면은 길을 모르고 가면은 헤맬 뿐이다 하는 논리와 똑같은 말입니다. 깨달음이 철저하지 못하면, 돈오를 하지 못하면 이 말이오. 목표물을 눈으로 보지 못하면 닦은들 수행을 한다고 해도 참된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거에요.

 

깨닫고 닦는 것은 뭐와 같으냐? 옛날 등잔불을 켜고 살던 시절에 종기가 있습니다. 기름을 담는, 기름이 그 종기 안에 담겨져야 불이 켜질 수 있는 거에요. 여기도 그런 비유를 합니다. 깨닫고 닦는 것은 기름이 있어야 등불이 밝으며, 요즘 주로 배터리를 사용하죠. 배터리 그 약이 다 소모되지 않고 남아있어야 전등을 켤 때도 손전등 같은 거, 랜턴을 켤 때도 불이 오는 거에요. 그거 다 떨어지면 불이 안 켜지는 거에요. 이 논리에요. 그래서 기름이 있어야 등불이 밝으며 눈과 발이 서로 돕는 거와 같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눈이 목표물을 보고 그쪽으로 행해서 걸어가는 경우. 이와 같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은 먼저 깨달은 다음에 시작된다. 이렇게 말하고 있어요. 이게 돈오에요. 그러면은 이걸 조금 알기 쉽게 다시 보충해 말씀드리면은 불교는 부처 찾는 수행입니다. 그렇죠. 성불이 목적 아닙니까? 우리 불자님들끼리 상호 인사를 할 때도 요즘 성불하십시오. 이런 말로 인사를 하죠. 그럼 어떻게 부처가 되느냐? 또 달리 말하면 부처가 어디 있느냐? 부처는 내 마음속에 있다는 거에요. 내 마음속. 내 마음속에 있는 불성, 저번 시간에 마음을 믿어라. 라는 말이 나왔죠. 자기 마음을 믿어라. 내 마음속에 부처가 있다. 불성, 그것을 확실하게 믿는 게 돈오에요. 그걸 확실히 믿으면은 부처를 찾을 수 있다. 부처를 찾는 것은 부처가 된다는 뜻 아니겠어요?

 

그래서 이 대목에서 돈오가 선행되어야 된다. 하고 돈오를 강조합니다. 돈오가 선행되지 않는 수행은 무명만 도와줄 뿐이다. 그래서 깨닫지 못하고 수행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해요. 여기서 깨닫는 건 解悟해오, 이해해서 깨닫는 거, 달리 말하면 쉬운 말로 바꾸면 바로 아는 것을 뜻한다. 이런 것을 뜻한다. 바로 아는 것, 길을 알고 가야 된다. 이 논리요. 비유로 말한 기름과 불이 서로 도운다. 옛날 등잔불에 있어서. 기름이 담겨야 심지로 기름이 빨아올려 져서 불이 불꽃이 계속 켜질 수가 있거든요. 그다음에 눈이 보아야 발이 방향을 잡아서 목표물을 향해서 걸어갈 수 있다. 그걸 목적상좌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 돈오를 특별히 강조해가지고 깨닫고 나서 수행은 시작되는 것이다. 이렇게 서산 스님께서 강조해 놨습니다. 다음에는 또 어떤 말이 이어지느냐 하면은 달리 성인이라는 견해가 없다(별무성해) 중생 보통 사람 범부를 떠나서 달리 부처가 없다. 이 말이오. 중생 속에 부처가 있다는 거에요. 중생이 없으면 부처가 없다는 거에요. 서양종교는 절대자, 신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없어도 신이 있는 거에요. ? 신은 창조주고 인간은 피조물이에요. 이런 논리 아닙니까? 유일신 종교는 그렇게 설명하거든요. 그런데 불교는 중생이 부처다. 부처나 중생은 똑같은데 깨닫고 깨닫지 못한 차이가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걸 중국의 육조 스님 같은 경우에는 이런 비유를 들어 설명하기도 했죠. 요즘 금값이 많이 올라갔다. 그렇게 소문이... , 금이 본래는 광석 속에 들어있던 거에요. 물론 노다지 금덩어리가 있는 경우도 특별한 경우에는 있겠지만은 광석 속에 들어있는 금을 광석을 채취해서 제련소에 가져가가지고 용광로에 녹입니다. 그래서 금 성분만 추출이 돼 나오면 이게 순금이 되는 거에요. 그런데 광석 속에 들어있는 잡순물하고 섞여 있는 금이 결국 추출 되 용광로에 녹여져서 추출 되 나오면은 순금이 되는 거에요. 금은 잡순물하고 섞여있던 광석 속의 그 금이 결국 순금으로 제련돼 나온 것이다. 이거요.

 

이럴 때 광석 속에 있는 금 성분 이것이나, 금방에 패물로 만들어져 있는 금이나, 똑같죠. 그래서 중생은 말하자면은 광석 속에 들어있는 금이라 한다면은, 부처는 이미 제련된 순금이다. 이렇게 비유해 말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중생과 부처가 똑같다는 거요. 그래서 중생 속에서 부처가 나온다는 거에요. 중생이 없으며 부처가 나올 때가 없다는 거에요. 이게 불교의 특별한 주장이라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서는 달리 부처라는 게 따로 없다 이거에요. 중생이 있기에 부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어떻게 또 고문에 설해져 나오느냐 하면 修行之要수행지요는 但盡凡情단진범정이니 別無聖解별무성해라. 이렇게 원문이 한문으로 되어 있는데 풀이를 하면은 수행에서 중요한 것은 다만 범부의 번뇌가 없어지면 그만이다.

 

망정이리라는 말은 허망 된 생각을 말합니다. 번뇌에요.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각이 그릇된 이 망념, 이것만 없어지면 된다는 거에요. 이것만 없어지면은. 그것만 없어지면 그냥 부처라는 겁니다. 잡순물만 제거되면은 순금이다. 앞서 말한 그 뜻하고 비유로 하면은 일치가 되죠. 그래서 부처는 번뇌가 없어진 사람이 부처이지, 따로 부처가 있는 거는 아니다. 병이 나, 더 이상 약을 쓰지 않으면은, 병이 나으면은 치료하는 약을 먹을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있습니까)? 본래 회복한 상태의 건강을 그대로 되찾잖아요. 그래서 달리 성인이라는 견해. 부처라는 견해는 없다. 중생을 떠나서 따로 부처는 없다.

 

그래서 화엄경같은데서도 앞서 그 얘기를 한번 소개해 드렸습니다마는 마음과 부처, 중생이 아무 차별이 없다. 때로는 마음이라 하고, 때로는 중생이라 하고, 때로는 부처라고 달리 부르지마는 똑같은 것이다. 이 세 가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걸 지금 오늘 몇 장에서 설해지는 말은 평소 불교 공부하면서 또 선공부를 하면서 반드시 알아두어야 될 사항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다음 그러면 중생이 부처니까 중생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이다. 또 이렇게 등치를 시킨다 할까? 일치를 시키게 되죠. 그래서 다음 말은 중생의 마음을 버리려 하지 말라.(不用捨衆生心불요사중생심) 중생의 마음이 부처의 마음, 그대로니까 버릴 게 없죠.

 

大摠相法門대총상법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대승기실론의 내용을 요약해 놓은 법문인데, 그 첫 구절에 나오는 말이 이렇게 시작되죠. 대총상법문이라는 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을 어우러져, 하나로 다~ 합쳐서 전체적으로 말하는 것. 이걸 대총상이라 그래요. 이 세상 모든 것이 함께 합쳐져 있는 거, 모아져 있는 거, 이 세상 모든 것이 함께 합쳐져서 모아져있는 이 법문이 있다. 이거요. 그러니까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포함하고 있는 법문이 하나 있는데, 그 법문이 뭐냐? 중생의 마음이다. 이래요. 大摠相法門體者대총상법문체자는 所謂衆生心소위중생심이니. 이렇게 시작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중생의 마음이 바로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집합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중생마음 버리면 부처도 못 된다는 거에요. 중생의 마음을 버리면 부처도 못 되는 거에요. 그래서 중생의 마음을 버리려 하지 말고 다만 제 성품을 더럽히지 마라. 자기 성품 자리를 오염시키지 말라 이거요. 마음을 깨끗이 하라. 마음을.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것은 마음에 일어나는 망념을 하나하나 없앤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자성이 청정한 상태로 돌아가면은 그게 부처다. 그래서 달리 법을 구할 것이 없고, 자기 성품자리를 깨끗이 보전하면 된다. 유지하면 된다. 정법을 구하려고 마음을 내는 이것 자체도 그릇된 사법이다. 이렇게 설해져 있어요.

 

求正法구정법이 是邪시사니라. 이랬거든요. 중생의 마음을 버리려 하지 말고 다만 자기 성품, 제 성품을 더럽히지 마라. 바른 법을 구하려는 것이 이미 그릇된 것이다. 사법이다. 아주 명쾌한 말씀들이 이어져 나오고 있습니다. 요즘 어떤 스님께서는 사람이 부처다. 人佛思想인불사상을 특별히 강조하는 스님이 있어요. 시의 적절한 불교, ~ 근본대의를 드러내고 있다. 이렇게 생각되기도 합니다. 사람이 물론 환경을 놓고 볼 때, 사람사람 처해있는 환경이 다르죠. 속된 말로 잘난 사람도 있고, 못난 사람도 있고,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고. 천차만별. 신체적으로도 차이가 있고, 정신적으로도 차이가 있고.

 

그래서 한없이 차별되게 살아가고 있는 모든 인류가 낱낱이 모두 부처다. 부처다 이거요. 수행을 못 한 사람도 부처고 수행을 잘한 사람도 부처고 이런 얘기에요. 수행을 못 했는데 어떻게 부처냐? 그러나 근본 불성은 똑같이 가지고 있다. 이거요. 그 사람이 설사 업을 나쁘게 짓고 있다 하더라도 말하자면은 악업을 짓고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 부처에요. 부처. 그래서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류는 부처다. 부처다. 죄를 짓고 있는 사람, 어쩔 수 없는 자기의 업장 때문에 죄를 짓고 있지마는 그 사람을 그렇다고 죄인으로만 보면 안 된다. 부처다. 얼마나 좋은 말입니까? 이거야말로 어떤 면에서 구원의 메시지라 할 수 있는 얘기죠.

 

그래 불교의 이러한 주장, 이러한 대의, 참으로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새로운 어떤 지혜. 진리를 바로 깨우쳐주는 말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래서 중생의 마음을 버리려 하지 마라. 다만 우리는 일단 수행을 시작할 때 내가 번뇌를 좀 끊어야 되겠다. 사홍서원에도 煩惱無盡誓願斷번뇌무진서원단. 하는 말이 있죠. 다함이 없는 번뇌를 맹세코 끓으리라. 방편상, 대승정신을 일으켜서 이타 원력을 세우면서 하는 말이긴 합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끊을 번뇌가 없다. 뒤에 가면 그런 얘기가 또 나와요. 번뇌를 자꾸 끊는다고만 생각하는 거는 이성들, 성문연각들의 경계라는 거에요. 대승은 번뇌를 끊을 것도 없고, 번뇌가 안 생기면 되는 거에요. 그건 무슨 말이냐?

 

망념이 일어나도 그 망념에 지배 안 당하면 된다. 이런 뜻이에요. 가령 예를 들어 말하면은 가끔 백화점 같은데 가서 물건을 사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서 찾아가는 수도 있고, 그냥 우연히 들리는 수도 있을 수 있죠. 흔히 요새 아이쇼핑이란 말을 하기도 하더라고요. 눈으로만 보고 마는 걸 아이쇼핑이라 하는가 봐요. 그러면 아이쇼핑을 합니다. 백화점에 가서. 새로 나온 신상품이 하나 있어. 보니 아이~ 마음에 딱~ 드는 물건이 눈에 띄었어. 그래서 아이~ 이거 사야 되겠다. 그래서 돈을 꺼내 값을 지불하고 물건을 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