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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품격] 조선의 엘클라시코 ‘경평축구’ – 평양에 응원간 붉은 악마

Buddhastudy 2019. 5. 21. 20:08

라이벌

2만 명 관중의 함성

 

1933년 평양 공설 운동장

평화를 상상하다 2

평양에 응원간 붉은 악마

 

193445

평양역에서 출발해

경성역(서울역)에서 내린 사람들

평양축구단

 

제 바닥(홈팀) 경성이 이길 것인가

아니면

원래(원정팀) 평양이 이길 것인가

-193446일 동아일보

 

도쿄 상하이 베이징 천진을 주름답던

조선의 축구선수들이

각각

빨간 유니폼에 V경성팀

파란 유니폼의 ()’평양팀으로 맞붙은

경성과 평양 누가 더 센지 붙어보자

 

경성 평양 축구 대항전

경평전

 

1929108

첫 대결

 

관중 7천 여명

경기장소 원서동 휘문고보 운동장

 

넓은 운동장에 빽빽이 드러찬 수천 관중은

일진일퇴하는 백열된 육박전에 열광되어

우레가튼 박수 소리가 수시로 그라운드 일대를 진동하였더라

-19291회 경평전 보도 기사 중

 

21

평양군() 승리

-19291차 경평전

 

설욕을 다짐한 경성군()

일본이 탐냈던

축구 천재 김용식 선수도 영입

 

19302회 대회 결과21패로 경성팀이 승리한다

 

1933년엔

4월 평양, 9월 경성, 10월 평양

두 도시를 자유롭게 오간 축구

 

경성역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원정을 간

경성팀을 기다린 건

 

평양 공설 운동장을 가득 매운

2만 여명의 관중

 

경성

조선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인 경성과

 

평양

서양문물을 거침없이 받아들인 평양

 

두 도시의 자존심이 격돌한

조선의 엘 클라시코

(* 엘 클라시코: 스페인의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라이벌전)

 

경평 대항 축구전을 통해 두 도시의 시민 뿐 아니라

전 조선 민족이 축구의 재미를 알게 되었고

자기 고장, 자기 팀에 대한 자부심도 느꼈다.”

- 경성팀 김용식 선수, 1985년 별세

 

그리고

상대팀을 상대로 이기기 위해 경기를 했지만

선수들의 마음속에 적은

오직 일제였다.”

-경성팀 이유형 선수, 2003년 별세

 

불온한 대회

일제의 불안에 중단과 재개가 반복된 경평전은

해방 1년 후인 1946년 재개된다.

 

하지만 이미 남과 북을 갈라놓은 38

(1945)

 

그럼에도 평양팀은

38선을 넘어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서울(경성)에 도착한다

 

1차선 경성 승리

2차전 평양 승리

1946년 경평전(서울 운동장)

 

경기 후, 육로가 아닌

뱃길로 돌아가야 했던 평양팀

내년엔 평양으로 원정 오십시오

 

하지만

다음 경평전은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상상해본다.

상상이라서 우울하지만 상상의 가능성마저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전쟁과 분단으로 인하여

남한은 지리적으로 고립되고

북한은 체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자동차로 서너시간이면 오가는 거리면서도

상상력의 완전한 고립상태가

수십년 동안 지속되었다.

 

공 하나로 짐짓 으르렁대면서도

다함께 함성을 지르는 풍경이 벌어져야 된다.

 

강슛으로 골이 터지면 미안 해 할 거 없다.

끝난 후 서로 안으면 된다.

심한 몸싸움으로 넘어지면 가서 일으켜주면 된다.”

-스포츠 평론가 정윤수 경평전 부활을 상상하며

 

20XXXX

자전거로, 버스로, 기차로 걸어서

평양에 도착한 붉은 악마는

평양냉면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김일성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경기가 끝난 후

그들 중 일부는

평양역에서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기차에 올라

여름 휴가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