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64. 마음의 문을 열면 외롭지 않다

Buddhastudy 2019. 5. 29. 21:22


안녕하세요.

경전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코살라의 프라세나지드왕이 세존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왕이므로 죽여야 할만 자를 죽이고, 재산을 몰수해야할 자를 몰수하고, 추방시켜야 할 자를 추방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데 제가 재판석에 올라 그런 자를 재판하고 있을 때 제가 하는 말을 가로막는다든지, 방해한다든지 하는 부하가 있습니다.

재판을 할 때는 재판관의 말을 중단한다든지 방해한다든지 해서는 안 된다고 타일러도 그렇게 하는 자가 가끔 있습니다.

 

그러나 세존의 비구들의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세존이 수백의 대중을 앞에 놓고 법을 설하실 때는 세존의 제자들 중에 기침 하나 하는 자도 없습니다.

 

어느 때인가 세존이 많은 대중들을 앞에 두고 설법하시는 자리에 참석한 적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한 비구가 기침을 했습니다.

그러자 대뜸 비구가 무릎으로 툭툭 치면서 조용히 말을 했습니다.

조용히 조용히,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되네, 우리들의 스승 세존께서 지금 법을 설하고 계시네.”

 

세존이시여, 그때 저는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참으로 희유한 일이다.

칼이나 몽둥이를 쓰는 일 없이 대중이 이렇게 정숙한 것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런 모음일 이전에는 본적이 없습니다.

그것 때문에 저는 세존은 전각자이시다.

세존에 의해 법은 잘 설해졌다.

세존의 제자들의 승가는 잘 실천한다 라고 저의 느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렇게 경전을 읽어드리는 것은 이 프라세나지드왕의 고백이에요.

왕은 가장~~~~~~ 큰 권력을 가지고 있죠.

그래서 그 나라에 있는 모든 재산, 모든 사람, 재물, 이거 다 왕이 마음대로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땅히 사람을 죽여야한다면 죽이기도 하고, 재산을 뺏어야 한다면 뺏기도 하고, 추방해야 한다면 추방도 하고, 어떤 것도 그가 마음먹고 명령을 하면 안되는 게 없다는 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왕에게 반역을 해서 왕을 죽이기도 하고, 또 쫓아내기도 하고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습니까.

이 프라세나지드왕은 이런 막강한 권력을 가졌는데도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아들한테 나중에 축출이 되어서 길거리에서 죽었어요.

 

또 자신이 그런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데도 이렇게 극단적인 저항은 아니라하더라도 사람들은 늘 불평하고 반대하고 그래서 늘 감시감독을 하고, 형벌을 주고, 이래야 겨우 잠잠하다는 거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칼을 쓰는 것도 아니고, 몽둥이를 쓰는 것도 아니고, 재물 갖고 유혹하는 것도 아니고, 지위로 억압하는 것도 아니고 사람을 달래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유혹도 하지 않고, 협박도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뭘 주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이 이렇게 부처님을 존경하고 아무도 거역하지 않고, 어떻게 보면 순한 양처럼 이렇게 순종을 하느냐,

 

그것을 자기가 보면서 역시 부처님은 나와 다르구나.

부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구나. 그분은 전각자구나.

또 승가에 모인 이 수행자들은 정말 배운 대로 실천하는 사람이구나.

 

이런 생각이 자기가 들어서 자기는 왕이지마는 부처님께 귀의하고, 스님들을 존경하고, 이렇게 말석에 앉아 법문도 듣고 이렇게 한다는 거요.

자기도 이미 마음속에서 이런 존경이 있다는 거죠.

 

이것은 프라세나지드왕 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에 가장 큰 나라엔 마가드국의 국왕인 빔비사라왕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에 부처님께서 왕에게 찾아가서

대왕이시여, 저는 옷이 하나도 없는데 저에게 옷 한 벌을 주십시오.

대왕이시여, 저는 늘 박한 음식만 먹었는데, 진수성찬을 한번 저에게 대접하십시오.

저는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살고 집이 없습니다. 그러니 당신의 많은 집 가운데 하나만 주십시오.”라든지, 이렇게 했다면 왕이 어떻게 부처님을 존경했겠습니까?

 

왕이 부처님을 존경해서

부처님이시여, 제가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으니 왕궁에 오셔서 식사를 하십시오.” 이렇게 해도 부처님께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고맙게 받아들였지마는, 왕궁에 출입은 하지 않으셨어요.

 

밥 먹으러는 안 갔다. 이런 얘기에요.

설법을 하러는 가셨습니다.

왕궁 안에서 어떤 사람이 고통스러울 때, 그를 위로하러 가신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부처님은 궁 안에는 출입을 하지 않으셨다.

 

그러기 때문에 빔비사라왕은 자신이 힘들 때마다 스스로 부처님을 찾아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말 못할 일들을 부처님을 찾아와서 하소연을 하고 또 위로도 받고, 또 부처님의 좋~~~~은 지혜의 조언을 듣고 마음을 편안하게 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부처님을 존경하고 따랐던 거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실 때, 아난존자는 부처님께서 사람들이 별로 많지 않는 외진 곳, 시골 쿠사나가라에서 열반에 드신다고 했을 때,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께 이런 질문을 했어요.

 

부처님이시여, 저 라자그라 왕사성이나, 쉬라바스티 사위성이나, 카시 바라나시나, 바이샬리나 부처님을 따르는 이 제자들도 많이 있고, 또 왕을 비롯한 재가신자들도 많이 있고, 또 장자 즉, 부자들의 신자들도 많이 있고, 그런 곳에서 마지막 죽음을 맞이하는 게 옳지 않느냐.

그러면 얼마나 편안하게 부처님께서 돌아가실 수 있느냐.

그런데 왜 이런 외진 곳에서 돌아가십니까?”

 

이렇게 부처님께 여쭌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야, 그런 생각은 하지 마라.”

 

바로 우리는 붓다라고 하는 인격, 우리가 이 수행을 하게 될 때, 우리는 이 수행을 통해서 붓다 가르침 그 담마를 통해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느냐?

바로 어떤 경우에도 구애받지 않는,

 

, 칭찬과 비난에도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 많고 적음에도 구애받지 않는

몸이 건강하고 아픈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설령 삶과 죽음에도 구애받지 않는

해탈, 열반을 성취하는 게 목적이란 말이오.

 

그런데 오늘 우리는 그렇지가 않죠.

이 부처님의 법을 가지고 우리는

부처님을 믿고 따르면 법을 공부하게 되면, , 건강에 좋다더라.’ 이렇게 되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식을 낳는다더라. 병이 낫는다더라. 지위가 높아진다더라. 복을 받는다더라.’

그 복이라는 건 재물을 말하는 거요.

그러니까 이런 쪽으로 그것을 이용하는 거죠.

 

그건 마치 부처님의 명성을 가지고 부처님이 왕에게 가서 재물을 얻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떤 지위를 얻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부처님의 그 높은 인격에 감동을 해서 즉, 부처님이 깨닫기 이전에도 이미 수행생활 할 때도 빔비사라왕이 부처님을 만났죠.

그때도 빔비사라왕이 그 부처님의 늠름한 태도를 보고 감동을 해서, 또 출신을 왕족이라는 걸 알고는 이 마가드국의 2인자가 될 수 있는 자리를 제안했죠.

 

요즘말로 하면 대통령이 국무총리자리를 제한한 거와 다름없는 거요.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을 해서 바로 이 왕국을 같이 다스리자.’

그때 부처님께서 고개를 옆으로 흔드셨어요.

 

그러자, 2인자로써 만족 못하는 줄 알고,

자신의 자리를 내놓겠다.’ 당신이 왕이 되라. 이거야.

당신같은 훌륭한 사람이 나라를 다스리는 게 정말 좋은 일이다.’

그랬을 때도 부처님이 고개를 흔드셨어요.

 

그러자 남의 것을 갖기가 미안해서 그런 줄 알고

내가 많은 군대를 당신에게 빌려 줄 테니까 이웃 나라를 쳐서 큰 왕국을 하나 건설하라.”

이렇게 제한을 했을 때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은

 

대왕이시여, 나는 내 나라도 버렸습니다.

내 나라, 나에게 주어진 내 나라의 왕위도 버렸다.

그런데 왜 내가 남의 나라에 가서 2인자가 되겠으며, 왜 내가 남의 나라의 왕이 되겠으며, 내가 왜 남의 나라를 뺏어서 왕이 되겠느냐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입안에서 가래가 더럽다고 해서 탁 뱉었다가 남의 더 큰 가래를 집어삼키지 않는 것과 같다.”

이렇게 그 태도가 아주 분명했습니다.

 

이 불법은 세상에 욕망, 세상의 분노, 세상의 이런 명예, 지위,

이런 것으로부터 떠난다.

 

그런데 이런 것으로부터 떠난다는 것이 세상을 외면한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세상을 외면한다는 것은 남이 굶어죽거나, 병들어 죽어나, 세상이 혼란스럽거나 이건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다.

나는 세상에 무관심하다. 나는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런 뜻이 아니에요.

 

부처님께서는 두 마을이 싸워서 전쟁이 일어나려니까

그 현장에 가서 중재를 서서 말리기도 하고,

대군을 혼자 막기도 하고,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하면 다 가서 상담하고,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주고 했단 말이오.

 

바로 왕의 스승이 되시고, 그 후 장자들의 스승이 되신 거요.

고통 받는 수많은 사람들의 구세주가 되셨다.

이게 어떻게 세상을 외면한 사람의 태도입니까.

 

세상을 너무나 아끼고 사랑하고,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의 10가지 명호 중에 세간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세간을 훤히 다 아시는 분이다.

 

천인사_인간과 하늘 신들의 스승이다.

조어장부_마치 말 다루는 사람이 말을 잘 다루듯이 중생의 이 마음을 아주 능수능란하게 다루시는 분이다. 이런 이름이 있단 말이오.

 

이것은 세상에 대한 대자대비심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거요.

이것은 외면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 세상에 그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 또는 세상에 재물과 권력과 명예 이것은 가래침을 보듯이 거기에 대한 버림의 행위가 분명했다.

 

그런데 오늘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의 이름으로,

불법의 이름으로 버린 가래침을 주워 담는 것처럼

이렇게 재물을 구하고 지위를 구하고 명예를 구하는데 불법을 이용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탐욕을 부리고 분노하고 어리석음을 가중시키는 데

오히려 불교가 이용되거나

 

이렇게 하는 것은 옳지가 않다.

이것은 세상의 구제가 아니다.

이것은 세속화 된 거다. 세속과 결탁한 거고 세속에 물들은 거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이런 소위 소비주의 문화에 물들어가고 있죠.

그래서 사람들이 저에게 묻기를

스님, 절이 잘 됩니까?” 이렇게 물어.

 

절이 잘 되느냐, 어떻게 하는 게 잘 되는 걸까,

어떻게 하는 것이 잘 되는 겁니까?”

간단하죠. 신도가 많으냐, 이게 잘 되는 기준이고

두 번째는 경제적으로 보시금이 많이 들어와서 넉넉하냐

 

신도수가 많고, 보시금이 많이 들어와 경제적으로 넉넉해서 빌딩도 짓고, 사업도 이것저것 하면 잘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 절이 잘 되느냐하는 말이 장사가 잘 되느냐하는 말하고 똑같지 않습니까.

장사가 잘 되느냐가 뭐요?

손님이 많으냐? 수입이 많으냐? 이 두 가지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게 자본주의적인 개념과 동일한 개념이에요.

 

월간정토를 내는데, 월간정토가 잘됩니까? 이건 뭐요? 부수가 많이 나가고, 재정적으로 안정되면 잘되는 거죠.

그런데 이 생각은 세속적인 생각이라는 거요.

잘된다 하는 담마, 법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바로 이러한 절이 있음으로 해서

법당이 있으므로 해서

고통 받는 사람이 그 고통이 얼마나 경감이 됐는가?

외로운 사람에게 얼마나 위안처가 됐는가?

어리석은 자가 얼마나 깨우쳐졌는가?

 

이게 기준이 되어야 된단 말이오.

그것이 경제적으로 큰 손실이 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숫자가 얼마 안 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이 기준이 되어서 평가가 되어야 된다.

 

어떤 사람이 정토.. 이런 편지가 왔어요. 교도소에요.

자기는 부인으로부터 고발을 당해서 감옥에 왔다는 거요.

너무너무 분해서 분노가 치밀어서 지금 나갈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나가기만 하면 이번에는 아예 죽여 버리겠다고 결심을 했다는 거요.

 

그런데 정토지를 읽고 거기에 쓰여져 있는 부처님의 말씀이나 큰 스님의 법문을 듣고,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었냐, 자기가 얼마나 잘못됐냐 이것을 깨우쳤다는 거요.

그래서 이야기는 이 분노의 칼을 내려놓게 되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럴 때 이런 사람이 한 명만 있으면 바로 돈으로 따지면 100만원을 투자할 값어치가 있고, 천만 원을 투자할 값어치가 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 한사람이 이렇게 변하게 되면 이건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요.

그런데 그 책을 만드는데 뭐 한 달에 몇 십만 원이 적자냤냐? 몇 백만 원이 적자냤냐? 이런 거 갖고 말할 게 아니다.

 

그것이 정말 사람들에게 얼마나 보탬이 됐느냐?

이게 잘되느냐 안 되느냐의 기준이 되어야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우리도 일상생활에 이미 이렇게 자본주의에 젖어있습니다.

 

부모가 아이들에게 물건을 사줘도 제일 물어보는 게 뭐요?

엄마, 이거 얼마 줬어.” 이러잖아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반지를 선물해도

여보, 이거 얼마짜리야.” 이렇게 묻잖아. 그죠?

그러니까 이것으로 전부 표시가 되는 거요.

 

자식을 위해서 부모가 시골에서 상치 키우고, 배추 키우고, 무 키우고 이렇게 해서 그 자식이 맛있게 먹으라고 보따리 보따리 싸서 고속버스 타고 온다.

그러면 마중 나갔던 아들이 뭐라고 그럽니까?

이거 무겁게 뭐 하러 들고 옵니까? 이거 몇 푼 된다고.”

 

그런 것은 돈으로 환산이 안 되는 거요.

거기에는 사랑이 깃들어 있고, 정성이 깃들어 있단 말이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다 없어져버린 사회.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부부지간에 매일 몸에 부대끼고, 껴안고 자면서도 소외라는 말을 쓰잖아요. 외롭데요.

남녀가 껴안고 자면서 외롭데요.

껴안고 자는데 왜 외로워요?

 

수행자는 산속에서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데

왜 남녀가 부둥켜안고 자면서 외롭다 그러냐?

뭐가 외로운 거요?

바로 마음이 닫혀있다.

 

요즘은 한 아파트 안에 딱 아이들하고 다 요렇게 살지 않습니까.

화장실도 집안에 있잖아요.

그런데도 외롭데요.

세상에 나가면 길거리에 부딪히는 게 사람이지 않습니까.

 

지하철에 가도 버스터미널을 가도, 길거리에도.

그런데 외롭다고 그러잖아요.

 

이 외로움은 어디서 오느냐?

마음이 닫혀있다는 거요.

 

사람을 믿고, 사람을 사랑하고, 아끼고 보살피고 이런 게 없다는 거요.

그러다보니까 믿을 거는 뭐밖에 없다?

돈 밖에 없는 거요.

 

마치 왕이 그 아들에게 배신당하듯이 그러니까, 돈이 배신 안 당한다는 거요.

그러다보니 사람한테 자꾸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니 요즘은 사람보다 뭘 좋아합니까? 강아지를 좋아하잖아.

 

강아지를 못살게 굴잖아요.

이발을 시키지, 색깔을 하지, 옷을 해 입히지.

자긴 잘한다는 거요. 강아지를 사랑한다는 거요.

 

바로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행위란 말이오.

그러니까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바로 법에 귀의해서 마음의 문을 열게 되면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다.

그리고 둘이 있어도 귀찮지 않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홀로 있으면 외로워.

둘이 있으면 귀찮아.

같이 있으면 헤어지고 싶고,

혼자 있으면 만나고 싶고.

 

그런데 여러분들이 수행을 하시면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고

둘이 있어도 귀찮지 않다.

 

그래서 같이 있으면 같이 있어서 좋고

혼자 있으면 혼자 있어서 좋다.

 

산이 있으면 산이 좋고

저자에 오면 저자가 좋다.

이것이 걸림 없는 삶이다.

 

그런데서 이러한 부처님의 법을 듣고 우리가 체험하고 경험하기 때문에

우리는 붓다에 대한 존경이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온다.

어떤 강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보고

왕이 감동을 해서 부처님께 고백한 그런 내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