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66. 죽음에 대하여

Buddhastudy 2019. 6. 14. 20:29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닥치는 일 가운데, 가장 슬프고, 막막한 일, 가장 큰 일은 바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이 죽었을 때를 뭐라고 그래요? 큰일이라고 그러잖아요.

큰 일 가운데 물론 결혼을 한다든지 이런 것도 큰일이지마는 바로 장례식보다 더 큰일은 없죠.

그럼 일이 많아서 큰일이 아니라 우리들의 마음이 받는 충격이 가장 크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또는 아내나 남편이 돌아가시거나, 그렇지 않으면 자기 앞에 자식이 죽거나 이랬을 때, 우리는 큰 슬픔에 빠진다. 부모가 죽은 슬픔, 물론 큽니다.

그러나 자식은 죽은 부모의 슬픔보다 더 큰 것은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쉬라바스티에 한 부자가 아들을 잃고 완전히 절망에 빠져서 괴로워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누가 위로를 해도 그 아들 잃은 슬픔이 달래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런 고통 속에 있는 것을 아시고, 부처님께서 그 장자를 위해서 그 집을 방문 하셨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이렇게 물으셨어요.

재가신자여, 그대에게 무슨 슬픈 일이 있는가?”

너무너무 그렇게 절망에 빠져있으니까. 그래서 그 재가신자가 말하기를

, 저는 오직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습니다.”

 

요즘도 아들을 잃으면 슬프죠. 그러나 외아들을 잃으면 더 슬프지 않습니까?

그런데 당시에는 요즘보다 더 심해요.

사람이 죽어서 슬프다 하는 것은 같을지 몰라도

당시에는 상속권이 남자에게 밖에 없기 때문에 아들을 낳기 위한, 아들을 갖기 위한 노력이 굉장했습니다.

 

아들이 없으면 모든 재산이 다 국가에 뺏기게 됩니다. 왕에게 뺏기게 됩니다. 당시 법이 그랬습니다. 제도가 그랬고 관습이 그랬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이 신체에 장애가 있다고 하더라도,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튼 아들이 있어야 되요.

그것은 그냥 하나의 아들이기를 넘어서서 그의 재산에 속하는 거요.

 

그런데 그 아들이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으니까 아들 잃은 슬픔과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 이런 거 까지 다 겹쳤다. 이렇게 볼 수 있죠.

거기다 재산까지 많았으니까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그때 부처님께서 그분을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재가신자여, 슬퍼할지 말지니라.

죽음이란 어느 한 장소나, 어느 한 가정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니라.

죽음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들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 죽음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곳에서 항상 일어나는 것이니라.

그대여, 이 세상에 태어나는 생명들은 그 어느 것도 필경 죽지 않는 것은 없느니라,

그러므로 자식의 죽음에 대해 너무 슬퍼하는 것은 옳지 않느니라.

무릇 바른 수행자는 죽음을 똑바로 직시하여 이 같이 생각하여야 하느니라.

 

, 이 세상에 태어나는 생명은

언젠가는 반드시 죽게 되어있다.

이를 모면할 자는 아무도 없다.

 

이 육신은 죽음에 최후가 되는 것이니

나는 죽음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다스려 나가야 하느니라.

 

그리하여 감각적 쾌락에 빠지지 않고,

자기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모든 현상을 잘 관찰하여

마음을 고요히 하여야 하느니라.

 

재가 신자여, 자식을 잃고 슬퍼하다가 어느 사이에 그대 또한 숨이 멈추고 말지 모르는 일이 아니겠느냐.

그대는 이일로 해서 너무 슬퍼하거나 놀라지 마라.

무릇 슬픔과 공포는 애정과 애착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니라./

 

이렇게 위로를 하신 뒤에 이렇게 게송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랑 때문에 슬픔이 일어나고

사랑 때문에 두려움이 일어난다.

사랑으로부터 해탈한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거니 어찌 두려움이 있으랴/

 

아마 우리는 이런 좋~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도 죽음을 당면한 사람들은 위로가 안 될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태어나면 다 죽지 안 죽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

 

그러나 개개인으로는 죽음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있어서만큼은 일어나지 않는 일처럼 지금 생각하고 있다.

또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가족에게만큼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을 하고 있다.

 

생각은 누구나 태어나면 죽지. 그래 죽는 거야.’ 이렇게 생각하지만,

마음의 저 깊이 무의식의 세계, 잠재의식의 세계에서는

죽음이 없는 영원한 삶을 살 것 같은 지금 착각을 우리들이 하고 있다.

 

여기부처님의 말씀대로 죽음이라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온 정말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그런 일이 아닙니다.

우리 주위를 돌아보면 죽음이라는 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지금 계속 일어나고 있는 하나의 현상이다.

 

마치 바다에 가면 파도가 계속 일어나지만 계속 사라진다.

파도는 끝없이 일어나고 끝없이 사라지죠.

 

파도가 사라지고 있는 것은 지금 어느 바다에나 어느 때나 계~~~ 속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한 파도에 집착해서 한번 일어난 그 파도가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그런 착각을 일으킬 때, 그 파도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괴로워하거나 슬퍼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보고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시간과 공간을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처럼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죽음이라는 것은 삶과 마찬가지로 늘 일어나는 파도와 같은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

 

봄이 되면 무수한 새싹이 돋고 나뭇잎이 피어납니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무수한 풀들이 나뭇잎들이 떨어져나간다.

 

지금 산부인과 병원이나 이런 데서는 아이들이 계~~ 속 태어납니다.

그러나 또한 다른 병원에서는 지금도 계~~ 속 그 수만큼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렇게 앉아있는 이 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다.

이것은 다만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 같은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가 그 파도 하나를 아끼고 사랑해서, 그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것이 영원할거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일어난 파도가 사라질 때 몸부림을 치고 우는 것과 같다.

그것은 잘 살펴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사람이 거기에 집착하고 거기에 빠지게 되면, 마치 그 일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은, 참으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갑자기 일어난 것 같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마땅히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다.

 

어느 곳에서도 항상 일어나고 있는 일일 뿐이다.

다만 내가 거기에 집착되어질 때, 거기에 사로잡히게 될 때, 그것이 큰 슬픔이 되고 큰 괴로움이 될 뿐이다.

 

그러기 때문에 죽음으로부터 벗어난다,

생로병사에서 해탈한다는 것은

태어난 것이 죽지 않는 것이 죽음으로부터의 해탈이 아닙니다.

 

태어나고 사라짐은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삶이라는 것은

그냥 태어나고 사라지고, 태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바다 전체를 보면 그냥 물결이 출렁이고 있을 뿐이다.

 

사실은 일어난다 해도 일어난 게 아니고,

파도가 사라진다 해도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냥 물결이 출렁거릴 뿐이다.

 

그래서 이것을 뭐라고 그럽니까?

생겨났다 해도 생겨난 것이 아니다.

사라졌다 해도 사라진 것이 아니다.

이것이 불생불멸이다.

 

생이라 하지만 생이 아니다.

사라고 하지만 사가 아니다.

멸이라고 하지만 멸이 아니다. 이런 얘기요.

 

생겨난 것이 사라지지 않는 것이 불생불멸이 아니고

일어나고 사라짐은 하나의 현상일 뿐이고

그 본질은 생겨남도 아니고 사람도 아니다.

 

다만 그렇게 우리들에게 인식되어지는 거죠.

마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같이 인식되어 진다.

하나하나에 집착하게 되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바다 전체를 볼 때는

그것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출렁거릴 뿐이다.

 

나뭇잎 하나, 풀 한포기 여기에 집착하면 어떠냐?

그것은 생겨나고 죽습니다.

그러나 지구 전체로 볼 때는 어떠냐? 나무 전체로 볼 때는 어떠냐?

그것은 나고 죽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다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처럼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여기 화분에다 씨앗을 하나 심었습니다.

얼마 지나니까 싹이 돋았어요.

또 시간이 경과되니까 점점 자라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말라죽었다.

이것을 우리는 나고 죽음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속도를 점점점점 빨리해서

씨를 심고 싹이 트고 자라서 꽃피고 열매 맺고 죽는 시간이

한 달로 좁혔다.

다시 하루로 줄였다.

다시 1시간으로 줄였다.

다시 1분으로 줄였다.

다시 1초로 줄였다고 한 번 해봅시다.

 

이걸 찍어서 필름을 아주 빨리 돌린다 이 말이오.

그러니까 씨앗에서 다시 열매로 가는 데까지 1초밖에 안 걸린다.

이렇게 돌린다면 이것을 과연 나고 죽는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이게 과연 생기고 사라진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

그냥 하나의 현상이 있다.

하나의 변화가 있을 뿐이다.

 

거기는 난다해도 맞지 않고, 죽는다 해도 맞지 않다.

다만 변화가 있을 뿐이다.

 

이 세상에 모든 것들은 항상 하는 것은 없고

그것은 변화 한다.

다만 바다 물결이 출렁거리듯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그냥 출렁거릴 뿐이다.

변화할 뿐이다.

 

거기는 난다해도 맞지 않고 죽는다 해도 맞지 않다

생겨났다 해도 옳지 않고 사라진다 해도 옳지 않다.

그냥 출렁거릴 뿐이다.

 

그것은 마치 예를 든다면 얼음으로 된 구슬을 통에 담아서 어린아이에게 줬을 때

그 어린아이가 그 구슬을 가지고 논다.

그러다가 어린아이가 구슬통을 두고 밖에 나가서 딴 놀이를 하다가 다시 구슬통을 봤을 때는 그 구슬통에는 물만 담겨있다.

 

그랬을 때 이 어린아이는 뭐라고 하느냐?

엄마, 내 구슬 어디 갔어? 내 구슬이 없어졌어. 누가 내 구슬통에 물을 담아놨어?

물이 여기 어디에서 생겨났어?”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러니까 여기는 고체인 얼음과 액체인 물은 형상이 다르기 때문에 별개로 본다.

그러기 때문에 형상이 다만 변했을 뿐인데, 본질적으로 보면 이것은 생겨나고 사라진 것이 아니고, 다만 형상이 변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형상에 집착하게 되면 어떻게 되느냐?

얼음과 물을 별개로 본다.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그럴 때는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되면 어떠냐?

얼음의 형상에 집착하게 되면 얼음이 사라졌다고 인식이 된다.

물은 생겼다고 인식이 된다.

 

그래서 물이 생겼다. 얼음은 없어졌다.

이것이 생멸이다.

범부중생은 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생멸관에 빠지게 된다.

 

그러나 그 본질을 꿰뚫어 보면 어떠냐?

얼음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물 또한 생겨난 것도 아니다.

사라진 것이 아니다. 생겨난 것도 아니다.

이것이 바로 불생불멸이다.

 

그래서 이 불생불멸이라는 용어를 영원하다, 변함이 없다이렇게 잘못 이해하고 있다.

불생불멸이라고 말하는 것은 생하고 멸한다하는 것이 잘못된 인식에 속한다.

그것은 상에 집착했을 때, 현상에 집착 했을 때, 인식상의 오류에서 생겨난 것일 뿐이다.

 

그러면 본질은 어떠냐? 실제는 어떠냐?

그것은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라진 것도 아니다.

그럼 뭐냐?

다만 변화만 있다.

 

그래서 사물을 어떻게 인식해야 되느냐?

무상한 것이로구나.’ 이렇게 인식해야 한다.

 

무상하다 이 말은 허무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무상하다 하면 허무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제행이 무상하다하니까 불교는 허무자의자다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에요.

무상하다는 것은 어떤 주관의 관념이 아닙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사물의 본질, 사물의 실제 모습, 실제의 세계, 그것을 묘사한 말이다.

실제의 세계는 어떠냐?

무상한 거예요.

 

어떤 형상도 어떤 존재도 항상하는 것이 없다.

영원 불멸하는 것이 없다.

항상 변화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 변화를 알지 못하고 그 형상에 집착해서 그 각각의 존재들이 개별적 단독자로, 그리고 영원하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그러기 때문에 그 형상이 바뀌게 되면 어떠냐?

사라졌다’ ‘생겼다이렇게 잘못 인식을 한다.

 

그래서 생멸에 빠진다.

이 생멸관에 빠지기 때문에

태어났다고 좋아하고, 사라졌다고 슬퍼하게 된다.

 

다만 그 현상을, 그 본질을 있는 그대로 궤똟어 볼 수가 있다면

그냥 하나의 변화로 본다.

 

생겨난 것은 사라진다.

더 본질은 생겨난 것도 아니고, 사라진 것도 아니다.

하나의 출렁거림에 불과하다.

 

그러니 오늘 우리들의 육신은 바로 지수화풍의 인연따라 모인 것에 불과하고

죽음이라는 것은 인연따라 흩어지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도 화분에 있는 흙들이 인연따라 모이게 되면 하나의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났다가 인연따라 흩어지게 되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거요.

 

다시 말하면 이렇게 변화가 있지

사실은 잘 살펴보면 거기에는 난다 할 것도 없고 죽는다 할 것도 없다.

그러기 때문에 난다고 기뻐할 것도 아니고

죽는다고 슬퍼하지도 않게 되고,

다만 현상을 현상으로 있는 그대로 보게 된다.

 

이렇게 될 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 버린다.

죽음을 그냥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초단위로, 분단위로, 시간단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은 슬프지 않지 않습니까?

? 거기에 집착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슬픔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하나의 현상에 집착하게 되면 어떠냐?

거기에 바로 슬픔이 생겨나게 된다.

 

지금 초단위로 사람들이 태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기쁘지 않지 않습니까.

? 거기에 집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만약에 여러분들이 어떤 한 아이, 어떤 한 사물에 집착하게 되면

거기에 아이가 태어났다, 아들이구나이렇게 기쁨이 생겨나게 된다.

 

그러면 집착되어지지 않는 지금의 상태,

기쁨이 없다그럼 이건 괴로움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집착되어 있지 않은 상태, 지금 괴로우냐? 안 괴롭다.

 

바로 집착되어지지 않는 상태는

거기는 고도 없고 락도 없다.

이 고도 없고 락도 없는 그러한 경지,

거기가 바로 진정한 안온의 경지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고락을 떠나야 해탈한다. 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늘 집착하기 때문에 고와 락의 윤회의 수레바퀴를 돌고 도는 거요.

 

고의 극치가 지옥이고, 락의 극치가 천상이에요.

그 중간에 굳이 나눈다면 여섯까지 도로 나눌 수가 있다.

그래서 고락의 수레바퀴에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에 갇혀서 뱅글뱅글 도는 게 육도윤회다.

또는 윤회라고 말하고.

거기로부터 벗어나버린다. 이것이 해탈이다. 이 말이에요.

 

사물의 본질이 존재의 본질이 무상한 줄을 확연~~~히 볼 수 있으면, 조견할 수 있으면, 그것을 경험할 수 있으면, 우리는 고도 락도 사라지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순간순간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에 집착을 하죠.

그래서 착각을 하는 거요. 그래서 거기에 생이 있고 사가 있는 바로 분별을 일으키는 거요.

그럴 때 괴로움이 생겨나게 된다.

 

이 괴로움이 생겨났을 때 바깥에 집착을 하게 되면

죽었기 때문에 괴롭다.’ 이렇게 바깥 경계를 탓하게 된다.

괴로움이 일어나는 즉시 , 내가 집착되었구나이렇게 자기 쪽으로 돌이키게 되면 어떠냐?

설령 괴로움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금방 거기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게 된다.

 

괴로움을 참고 억누르는 것, 분노를 참고 억누르는 것이 수행이 아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괴로움이 일어날 때,

, 내가 바깥 경계에 사로 잡혔구나 집착되었구나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놓아버리게 될 때

바로 분노가 사라지고 괴로움이 사라지는 거다.

그것이 수행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분노를 참고, 이런 괴로움의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마치 훌륭한 수행자인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는 해탈은 할 수가 없다.

 

괴로움을 참을 수는 있지만

그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괴로움이 경계에 사로잡히면서 생기는 줄 알고

바로 그 사로잡힘에서 벗어날 때

그것을 놔버리게 될 때

괴로움이 사라지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해탈의 길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바다에 가서 파도를 응시하듯이

삶과 죽음을 응시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죽음의 현장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고요~~~히 응시 하고

다만 하나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구나

이렇게 바라볼 때, 우리는 경계에 집착하지 않게 된다.

마치 얼음이 녹는 것을 그냥 사실대로 응시하듯이.

 

그런데 우리는 그것이 내 가족이다, 내 부모다할 때는 그렇게 되어지지 않는다.

? 거기에 애착이 있기 때문에.

그 변화를 움켜쥐고 변하지 않도록 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변화하지 못하도록 하려고 한다.

 

그런데 변화하는 것이 객관적 사실인데,

그 변화를 막으려고 하니까 막아지지 않는다.

그래서 더 큰 괴로움이 발생하게 된다.

 

이런 데서 우리가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우리들의 감정에 치우친, 즉 경계에 사로잡힌 그 무지의 상태에서는 도무지 우리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 같지마는

우리가 그 경계로부터 한발 물러나서 찬찬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귀담아 들어보면

그것은 마치 물이 높은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과 같다. 하는 것만큼이나

너무나 쉬운 이야기고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다.

이렇게 사실에 근거하게 될 때는 우리의 번뇌는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항상 사실을 사실대로 봐라.

이게 바로 정견이다.

이것이 조견이다.

이것이 바로 관이다.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봐야 한다.

 

이렇게 우리가 공부를 해나간다면, 우리는 죽음으로부터도 초연해 질 수가 있고

, 죽든지 말든지 상관없다 하는 외면이 아니다.

죽음이라고 하나의 현상을, 삶이라고 하는 하나의 현상처럼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는 살아있는 생명을 일부러 끊지도 않고

죽어가는 생명을 일부러 억지로 붙들지도 않는다.

 

파도가 일어나는 것을 억지로 못 일어나게 하지도 않고

사라지는 파도를 억지로 못 사라지게 하지도 않는다.

 

파도가 인연을 따라 일어나고

파도가 인연을 따라 사라지듯이

우리는 인연을 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하나의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게 될 때,

바로 우리들 마음속에 있는 모든 괴로움은 사라지게 된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자식이 죽었기 때문에 슬프다 괴롭다 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사물에 대한 집착이, 그래서 일어나는 이 잘못된 견해가

괴로움을 불러오는 것이지

아이 때문에 괴로움이 오는 것은 아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식이 죽은 사람도, 바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그런 기회를,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당시에는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들도

죽음을 찬양해도 안 되고,

죽음을 슬퍼해도 안 된다.

죽음은 그냥 삶처럼 하나의 현상에 불과하다.

 

그러기 때문에 살아있는 생명을 억지로 죽여서도 안 되고,

죽어가는 생명을 억지로 온갖 것을 집어넣고, 호흡기를 달고, 식물인간을 보전하듯이 이렇게 살리는 것도 생명의 원리에 어긋난다.

 

인연을 따라 일어나고, 인연을 따라 사라져가는 자연의 원리에 맞도록 하는 것이

바로 생명을 존중하는 태도다.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