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지안스님_선가귀감

지안스님 특별법문 선가귀감 _ 제12회 선정에서 청정한 지혜가 생긴다 (20_43)

Buddhastudy 2012. 2. 26. 20:43

  방송 보기: 불교TV

불교에서 인연이란 말을 많이 하죠. 이 세상 모든 것이 인연 소치다. 또 교리의 주축을 이루는 내용이 인연설, 인연설이 연기설입니다. 그래서 인연이란 말을 많이 하시는데요. 이 인연이 시간적으로 맺어지는 것이 있고, 공간적으로 맺어지는 것이 있다. 그런데 인연이 시간과 공간을 옷, 천이 짜지듯이 교직을 한다 그래요. 교직. 그래서 시공이 교직 되면은 그게 인연이라는 거에요. 그 인연 속에서 중생의 업이 지어지고 중생이 태어난다. 이렇게까지 설명합니다. 그런데 먼저 시간적으로 생각해 보면은 시간이라는 게 앞이 있고, 중간이 있고, 뒤가 있거든요. 어제가 있고, 오늘이 있고, 내일이 있는 것처럼. 이걸 삼세라 합니다. 삼세.

 

과거 현재 미래. 인연이 항상 삼세의 인연을 맺어있다는 거요. 그러니까 사람 사는 게 뭐냐? 우리가 시간을 가지고 말할 때 오늘, 현재 오늘 내가 하고 있는 일, 활동하는 게 있잖아요. 그래서 오늘을 내가 산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오늘을 살고 있다. 그런데 오늘 속에 어제도 들어와 있는 거에요. 어제도. 어제 없는 오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오늘 속에 내일도 있는 거요. 내일. 그러니까 시간적으로 현재를 기준으로 말하지마는 오늘 속에 어제 과거도 있고, 내일도 있고, 미래도 있고, 그래서 항상 우리의 삶, 달리 말하면 생활 속에는 삼세의 인연이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에 불교의 인생관이 설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보면은 서산스님께서 계율을 잘 지키고 수행을 하면은 부처님이 항상 곁에 계시는 거와 같다. 이런 말씀을 합니다. 계율 존중하기를 부처님처럼 하면 부처님이 항상 곁에 계시는데, 내 옆에 있다. 이 말이오. 부처님이 내 옆에 있다면은 부처님이 나를 제도해 준다는 그런 뜻이 되죠. 이 말을 불교의 계정혜 삼학 가운데에 계학을 강조하는 내용이다. 앞 시간에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마는 쉽게 말하면은 사람 마음이 착하면은 착한 그 마음속에 부처님이 항상 있다 이런 뜻이에요. 간단하게 설명하면은.

 

그래서 수행에 있어서 불교에서는 인간의 삶 전체를 수행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수행에 있어서 이 말은 삶에 있어서 항상 착한 마음, 윤리 도덕적인 성근을 심으면서 삶아야 된다. 이런 뜻이 내포돼 있는 말입니다. 만약에 계율을 지키지 아니하면은, 착한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지 아니하면은, 비루먹은 여우의 몸도 받지 못한다. 여우가 병이 들어서 우리 흔히 비루먹은 강아지 이런 말을 쓰지 않습니까? 건강하지를 못해요. 그래서 사람이 한 생을 금생을 계를 지니고 살지 못할 때, 착한 마음으로 살지 못할 때, 다음 생에 가서 인간의 몸을 잃어버리고 비루먹은 여우 몸도 받기가 어렵다. 이런 뜻이에요.

 

이게 불교는 앞서 삼세의 인연을 설명했습니다마는 우리의 한 생도 금생의 이생도 전생과 연결돼 있고, 내생과 연결 돼 있다는 거에요. 이래서 삼세의 걸쳐서 내가 지은 업이 다 이어져가면서 그 과보가 시절 인연 따라 적시에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말합니다. 옛날 큰 스님들이 하신 말씀 가운데에 사람 몸을 잃어버리지 말아라. 이런 말씀이 있어요. 우리 지금 사람 몸 받아 태어나 인간으로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람 몸을 잃어버리지 말아라. 하는 말은 다음 생을 두고 하는 거에요. 금생에는 사람 몸을 받아서 한 생을 살았지마는 업을 잘못 지어 놓으면은, 악업을 지어 놓으면은, 다음 생에는 사람 몸을 받지 못하고 악도, 축생도도 악도고, 아귀도도 악도고, 지옥도 악도입니다. 악도에 간다. 결과에 가서는 사람 몸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사람 몸을 잃어버리지 말라. 이런 견책하는 말씀을 자주 해 왔습니다. 그래서 올바르게 살지 못하면 다음 생에 사람 몸을 잃어버린다. 여기서는 비루먹은 영*의 몸도 받지 못한다. 하물며 청정한 깨달음의 열매, 보리과를 말이에요. 깨달음의 열매를 바랄 수 있겠는가? 그래놓고 밑에 보충 설명을 하시기를 계를 존중하기를 부처님처럼 하면은 부처님이 항상 곁에 계신다 이거요. 내 옆에 부처님이 있다 이 말이오. 모름지기 草繫초계鵝珠아주. 초계라는 말이 있고 아주라는 말이 나옵니다. 옛날 어느 스님이 산길을 가다가 도둑을 만났어요. 옛날은 물자가 귀하던 시절이라 옷을 벗겨 가져가 버렸어. 옷을.

 

그래서 옷을 벗겨 가져가 버리면서 도둑이 그 스님을 풀에다 묶어 놓았다는 거요. 산에 가면 길게 자라는 풀이 있습니다. 그 풀에다가 스님 몸을 묶어 버렸다는 거요. 그래서 초계라는 말은 풀의 매여 있다. 묶여 있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 이제 도둑은 가버렸어. 이 스님이 지극한 경우 극진한 경우의 한 사례를 소개하는 얘기죠. 풀에 묶인 채 가만히 있는 거요. 풀잎에 묶여 있으니까 힘을 써서 일어나서 갈 수가 있어요. 그런데 힘을 써서 가려 하면은 일어나려 하면은 풀이 떡~ 끊어 질 거다. 풀이. 그러니까 식물인 풀도 다치지 않게 하겠다는 뜻에서 지나가는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는 거에요. 기다려가지고 묶여져 있는 풀을 하나하나 풀어 주면은 풀을 상하지 않고 그냥 갈 수가 있다.

 

이런 지극한 경우를 예를 들어 말한 겁니다. 이런 예가 있었다는 거에요. 또 아주라는 말은 (거위 아)자가 있어요. (나 아), 옆에 (새 조)를 붙인 한자가 (거위 아)자입니다. 어떤 스님이 탁발을 나갔어요. 탁발은 스님들이 마을에 다니면서 동냥하는 걸 탁발이라 합니다. 그런데 마침 찾아간 집이 이 보석을 세공하는 옥공이라 할까? 옥을 다듬지 않습니까? 구슬을 만들고, 이렇게 그 가공을 하는 사람의 집에 탁발을 갔어요. 그랬더니 마침 그때 옥을 다듬는 이가 작업대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어요. 옥을 이제 말하자면 갈고 있었다 이 말이오. 그 스님이 탁발하러 왔으니 스님에게 곡식을 조금 주려고 광으로 들어갑니다. 庫房고방이라고도 했죠.

 

그래서 바가지에 곡식을 담아 와가지고 스님에게 주었어요. 보따리 같은데 넣어 준겁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앉아서 아까 갈다가 두었던 그 옥을 다시 갈려 했는데, 그새 없어져 버렸어. 안보여요. 갈다가 둔 보석, 옥이 없어진 거요. 스님이 옆에 계속 서 있었다. 이거요. 그래서 스님, 조금 전에 내가 이 작업대 위에 옥을 갈다가 스님에게 곡식 퍼다 주려고 광 갔다가 나온 사이 안 보인다 이거야. 없어졌다. 이거요. 스님이 옆에 계셨으니까 물은 거죠. 어떻게 되었느냐? 스님이 혹 만졌느냐? 스님이 갑자기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려요. 아무 말을 안 해요. 그래 이 주인이 이상한 거에요.

 

잠시 광에 가서 곡식 떠 온 사이에 갈다가 둔 옥이 없어졌다. 이거요. 스님은 곁에 서 있었다. 이거요. 그래서 스님,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묻지 않을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스님이 벙어리처럼 말은 안 한다 이거요. 이 주인이 화가 납니다. 아까 탁발 왔다고 말하더니 왜 지금부터 말을 안 하느냐? 이거요. 화가 나요. 스님이 어디 훔쳐서 감추었소. 이렇게 또 말이 나와요. 그래도 이 스님이 가타부타 말을 안 해. 화가 나가지고 이 주인이 그만 스님을 폭행을 합니다. 스님이 맞고 얼굴이 터져가지고 피가 나고 이래요. 그래도 말을 안 해. 말할 때까지 광에다 가둬야 되겠다 생각하고 스님을 광에다 가둬버렸어요. 문을 잠가 버렸어요.

 

그러면서 하룻밤을 지냅니다. 옥공이 이해가 안 돼. 이해가. 안 돼. 스님이 왜 말을 도대체 안 하느냐? 그리고 아무도 온 사람은 없고, 그 스님만 곁에 서 있었단 말이오. 갈다가 둔 옥이 어디 갔느냐? 스님들이 보태서 말하기를 그때 갈던 옥이 나라 임금님 명으로 갈던 거래요. 그랬는데 그걸 세공을 해서 궁중에 갖다 바쳐야 되는 거요. 만약에 그걸 바치지 못하면은 벌을 받게 된다 이거요. 그래서 자고 난 이른 아침에 사정을 합니다. 스님에게. 스님, 어제 제가 갈다 둔 옥을 찾아 주십시오. 그것은 나라 임금님의 명으로 세공을 해서 궁중에 갖다 바쳐야 됩니다.

 

내가 그걸 못 갔다 바치면은 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 이거요. 이러니 본대로 훔쳤으면 도로 돌려 달라. 사정을 했어요. 이렇게 사정을 했더니 스님이 한마디 하는 거요.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오. 조금 더 기다려 보라는 거요. 이래서 좀 기다렸습니다. 날이 훤히 밝고 해가 떴어요. 그때 다른 게 아니고 그 옥공이 거위를 한 마리 기르고 있었어요. 거위. 이 거위가 마침 어제, 그러니까 이 주인이 광으로 곡식 뜨러 갔을 때, 그 작업대 근처 가가지고 그냥 갈다 둔 옥구슬을 콕 쪼아서 삼켜버리는 걸 스님이 봤어. 그런데 왜 스님이 그러면 꿀 먹은 벙어리 행세를 했느냐?

 

거위가 집어삼켰소. 본대로 말을 하면은 주인이 틀림없이 거위를 죽일 거란 말이오. 배를 갈라서 옥을 찾아내기 위해서. 그래서 그 수모를 당하면서도 거위가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루만 지나면은 다음날 거위가 똥을 눌 테니까, 그 똥 속에 그 구슬이 도로 나올 거다 이거요. 스님은 그걸 생각하고 있는 거에요. 그래 거위가 나와서 거위가 마당 가로 다니더니만 한쪽에 가서 똥을 누는 거요. 그걸 보고 스님이 저 거위의 똥을 헤쳐 보시오. 어제 갈다 두었던 옥이 거위 똥 속에 들어있는 거요. 이런 일화, 大莊嚴論經대장엄논경이라는 경전에 원래 나오는 설화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극한 마음으로 살생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애를 썼고, 풀에 묶여 있던 스님이 풀잎이 끊어질까 봐 지나가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묶인 채로 기다렸다. 극진한 얘기. 이런 얘기를 소개했습니다. 그다음에 또 어떤 말씀이 나오느냐? ~ 불교는 중생이 생사윤회를 거듭한다. 윤회. 그러니까 자꾸 나고 죽는 생사를 반복한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이 불교의 근본 목적이 생사해탈입니다. 특히 선에서 이걸 강조합니다. 생사해탈. 그러니까 불교가 선도 있고, 교도 있고, 염불도 있고, 주력도 있고 네 가지 수행방법이 있다 하지 않았습니까? 선에서 하는 얘기는 또 선적인 어떤 입장에서 여러 가지 설하는 말씀의 특징이 있습니다.

 

또 염불수행을 할 때는 염불수행을 강조하기 위해서 거기 맞춰서 또 설하는 말씀의 특징이 있어요. 다 특징이 있습니다마는 근본은 불교의 근본사상을 해탈사상이라고 한다고 말씀드렸죠? 상사를 벗어나자는 거에요. 생사. 그래서 이 대목에도 생사를 벗어나야 되는데, 생사를 자꾸 있게 하는 거, 나고 죽고 나고 죽고, 하는 생사를 반복되게 하는 그 근본이 뭐냐? 이걸 애욕이라 이렇게 명시를 합니다. 윤회의 근본은 애욕이다. 애욕. 애는 (사랑 애)자고, 욕은 (욕망 할 때 욕)자입니다. 정으로써 뭔가를 원하고 갈구하는 거, 그래서 이 대목에서는 생사를 벗어나려면은 생사해탈을 하려면 이 말이오. 먼저 탐욕을 끊고, 욕심. 욕심부리는 거, 탐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