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70. 매일 정진해야 하는 이유

Buddhastudy 2019. 7. 11. 20:33


안녕하세요.

발심을 해서 수행생활을 하지만 수행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바른 길로 가기보다는 늘 잘못된 길로 가기가 쉽습니다.

출가한 스님들도 처음 낸 발심처럼 생활하기가 어렵고

중간에 가다가보면 출가할 때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그냥 세속적인 마음으로 살아가기가 쉽고

또 재가신자들도 처음 법문을 듣고 기뻐하고 법을 만난 그런 기쁨은 시간이 경과되면서 온데간데없어지고, 그냥 불교신자라는 이름만 가지고 일상적으로 살아가기가 쉽습니다.

 

또 이렇게 부지런히 정진하겠다고 해도 그게 뜻대로 잘 안 됩니다.

신자라면 화내지 않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

그런데 경계를 보면, 꼬라지만 보면 화가 불쑥불쑥 나고

또 계율을 청정히 지키려고 하더라도 자기도 모르게 자꾸 계율을 어기게 되고

아침에 일어나서 정진하겠다고 해도 늘 그대로 못하는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러니까 너는 잘못했으니까 수행자가 될 자격이 없다.

또는 아이고, 나는 수행하고 인연이 없나봐. 나는 안 되네.’

이렇게 좌절하거나 절망하거나 또는 내치거나 해야 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바른 길로 가야하는 즉, 해탈과 열반을 목표로 해서 그 길로 나아가야 된다 하는 것은 불자로서의 하나의 목표 원칙이라면

다생겁래로 이 업에 끌려서 살아온 우리들의 삶의 현실은 어떠냐?

그 길로 가는 데에서 쉽게 가지지 않고, 자꾸 과거 살아온 데로 자꾸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곁길로 자꾸 가게 되는 거요.

 

쉽게 얘기하면 길을 간다면 자꾸 넘어지게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넘어질 때는 일어나서 또 가야 된다는 거요.

넘어지지 않고 가면 좋지만,

넘어질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가는 걸 포기해야 되느냐?

아니다.

다시 일어나서 가야 된다.

 

그럼 이 넘어졌을 때 다시 일어나서 가는 그런 안정된 장치들이 있느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참회다.

 

수행의 목표를

나는 화내지 않는 마음을 갖겠습니다.’ 이렇게 수행의 목표를 정했다.

그런데 경계에 부닥칠 때마다 사람의 말이나 행동을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화가 불쑥 일어나버리게 된다.

그러면 우리는 그때마다 금방 화가 일어나는 자기 마음을 알아차리고

, 내가 또 화를 내는구나, 내 마음에서 또 화가 일어나는구나이렇게 하면서 그것을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이것이 필요하다.

이건 수행이죠.

 

그런데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안 일어나면 좋지만, 일어났다하더라도 알아차리고 내려놓으면 되는데

알아차리지도 못해서

화가 나서, 벌컥벌컥 화를 내고, 남을 탓하고

이렇게 지냈단 말이오.

 

그랬는데 1시간이나 또는 하루나 한참을 지나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기가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

이랬을 때 바로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 내가 잘못했구나하는 것을 한 참이 지난 뒤에라도 알아차려야 된다.

즉시 알아차리면 좋지만, 즉시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한 참이 지난 뒤에라도 알아차려야 된다.

 

틀린 것을 틀린 줄 알고

잘못을 잘못인 줄 알고

모르는 건 모르는 줄 알아야 된다.

바로 그거 아는 것, 이게 지혜에요.

틀린 것을 틀렸다고 아는 게 지혜란 말이에요.

 

이렇게 알아차리고

,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틀렸구나. 내가 몰랐구나. 내가 사로잡혔구나.’

이렇게 알아차리고 사로잡힌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걸 뭐라고 그러냐?

이것을 참회라 그럽니다. 참회.

 

제가 잘못했어요.” 어디 가서 용서를 손을 싹싹 빌고 이런 것만 참회가 아니고

자기의 잘못을 알아차리는 게 참회에요.

그래서 지나간 자신의 과거의 잘못을 이미 지나가버렸지마는

, 내가 잘못했구나요렇게 알아차리고, 그리고는

, 다시는 잘못을 하지 말아야지.’ 이렇게 다시 발심을 하는 거요.

 

그래서 참회는 지나간 잘못을 알아차리는 것,

, 뉘우치는 것과

다음에는 이런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지라고 하는 이 원을 세우는 것

2가지가 겹친 게 참회에요.

 

그래서 이것을 굳이 분류하면 참회와 발원,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

참회 속에 참회와 발원이 같이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바른 길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현실 속에서 이 바른 길로 가지 못하고 소위 실수를 자꾸 할 때, 이 실수를 극복하고 다시 도전하는 것, 이게 바로 참회다.

그래서 오늘 우리 수행자들은 참회정진을 해야 됩니다.

 

우리는 참회정진하면 무

조건 절하는 것만 참회정진이라고 생각하는데

참회정진은 절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핵심이 아니고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려 뉘우치고

다시는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마음을 내는

이런 행위가 참회다.

 

그러면 그렇게 발심을 해도 또 경계에 부닥치면 또 잘못을 저지를 수가 있죠.

또 경계에 팔려버린다 이 말이오.

그러면 그때 또 알아차리고 발심을 하는 거요.

10번 넘어지면 11번째 일어나고, 100번 넘어지면 101번째 일어나는 이런 행위

넘어지면 일어나는 행위가 같은 것이 뭐냐?

참회다.

 

그래서 참회를 하게 되면

과거의 허물이 소멸이 된다.

, 지은 죄가 사라진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지나간 잘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자신이 잘했다고 우기고 있다.

잘못해놓고도 잘했다고 잘못알고 있기 때문에

가슴속에 한이 맺히는 거요.

한이 바로 까르마, 업이 됩니다.

이것은 바위에 새겨놓은 업하고 같아.

바위에 새겨놓은 금하고 같아.

바위에 새겨놓은 금이다.

 

그런데 내가 어떤 잘못을 저지르고 그것이 하루가 지나지 않아서

, 내가 잘못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은 어떤 거냐?

이것은 모래에 새긴 금하고 같아.

바위에 새긴 금은 잘 안 지워져.

그런데 모래에 새긴 금은, 금은 그어져있지만 지우려면 쉽게 지워진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잘못을 저지르고 즉시

, 내가 잘못했구나.’ 이렇게 알아차리면 어떠냐?

그것은 물에 긋는 금과 같다.

금이 생기는 즉시 사라져버린다.

다시 말하면 번뇌가 일어나자 동시에 사라져버린다.

 

그다음에 아예 경계에 끄달라지 않으면 어떠냐

그것은 허공에 긋는 것과 같다.

허공에는 금을 긋지만 그어지지가 않죠.

그러니까 이런 행위가 아라한의 경지다.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경지다.

경계에 부닥치더라도 그 경계에서 분별심이 일어나지 않는다.

 

분별심이 일어나지만 즉시 알아차려버린다.

그건 물에 긋는 금과 같다.

 

분별심을 일으켰지만 하루가 지나도록 알아차리지 못하고 움켜쥐고 있다.

그건 모래에 긋는 금과 같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기 전에 알아차리면 어떠냐?

금방 지워질 수가 있다.

 

그런데 이것이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계속 움켜쥐고 있는 경우는 어떠냐?

그것은 바위에 새긴 금과 같다.

그것은 세월이 흐르면 잊어버린 것 같아. 그래서 없는 것 같아.

저는요, 아무 한도 없어요. 다 잊어버렸어요. 명도 없어요.”

그런데 딱딱딱딱 건드리면 30년 전 것도 도로 화가 되어서 일어나고

슬픔이 되어서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빗자루 갖고 살살 쓸면 다 묻혔던 금이 바위에 도로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런 것들은 지우기가 어렵다.

우리는 이 묵은 과거에 새겨진 것과 같은 금, 이게 우리들이 지금 갖고 있는 까르마, 업입니다.

 

이 마음에 굉장한 상처가 있고

상처에 의해서 계속 상처를 더 받는 악순환을 하고 있죠.

수행을 통해서

깊이 자기를 돌아보면서 자기의 내면에 묻혀있는 업, 업장, 까르마

이걸 자꾸 소멸시켜 나가야 된다.

바위게 새겨진 금을 자꾸 지워 나가야 된다.

 

그러지만 우리가 과거에 이미 지나가버린 건 그렇다 치더라도

앞으로는 어떠냐?

앞으로는 더 이상 이런 바위에 새기는 금은 만들지 말아야 되겠다.

그런데서 우리가 매일매일 정진을 해야 된다.

 

그럴 때 우리가 현재에 깨어 있는다.

현재에 깨어 있어서 경계에 휘둘리지 않는 것이 좋고

그러나 경계에 깜빡 휘둘렸을 때는 금방 알아차려서 놓아버리는 게 좋고

그것도 놓쳐버렸다 하면 하루를 넘기기 전에 알아차려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매일 하루에 한 번은 시간을 정해놓고 정진해야 한다.

아침에 하든 저녁에 하든

그러나 우리는 주로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어제의 하루를 돌아보면서

 

내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걸린 게 있느냐.

그래, 어제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고 내가 화가 나서.

그래? 그놈이 그런 말을 했기 때문에 화가 났잖아.

 

아니다. 화가 났다는 것은 내가 옳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다.

그는 다만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

그는 나를 화나게 하려고 그런 말을 한 게 아니라

그는 자기 생각대로 그런 말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네 생각은 틀렸다. , 내가 옳고 너는 틀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얘기를 듣는 동안 화가 났고 또 미움이 생겨났다.

그러니 내가 옳다는 생각이 근원이다.

내 옳다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사로잡혀서 이런 미움이 생겨났구나.

그래서 그것을 놔버리게 된다.

, 제가 옳다는 생각 버리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말을 했겠습니다.

그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내 어리석음을 반성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딱 돌이키게 되면 어떠냐?

내 마음 속에 맺혀있던 게 딱 사라져버립니다.

다시 말하면 모래에 그은 금이 그냥 파도가 밀려오면서 싹 지워버리는 것처럼.

 

요렇게 하루를 돌아보면서 우리가 잡았던 기준,

여러분들 같으면 그것이 기도문이든, 이런 것들을 딱 기준으로 해서 자기를 늘 정화시켜 나가야 된다.

 

이게 참회중의 스스로 참회하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늘 점검해 가는 거요.

 

그런데 사람들은 저한테 물어요.

스님, 제가 공부가 얼마나 됐습니까?” 이렇게 묻는 사람이 있어.

그렇게 묻는 사람은 공부가 안 된 사람이야.

 

? 자기가 자기를 점검할 줄 모르잖아.

자기가 자기를 늘 깨어있어서 점검하는 사람은 자기가 공부가 안 되었는지를 자기가 알 수가 있죠.

그런데 자기가 됐는지 안 됐는지도 모른다 하는 것은 멍청하다는 얘기 아니오.

자기가 자신에게 깨어있지 못하다.

자기에게 어떤 번뇌가 시시때때로 경계에 부닥칠 때마다 일어나는지를 자기가 못 알아차리니까, 어떤 추상적인 공부를 하니까

제가 공부가 되었습니까?” 이런 질문을 한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는

스스로 이렇게 자기 점검을 하는데, 나는 이렇게 스스로 점검이 되는데

내가 계율을 어긴 것들, 법에 어긋난 것들에 대해서 나는 점검을 해서 그것을 버렸는데

같이 사는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어때요?

, 저 사람, 계율을 어겼다. 저 사람 계율을 어겼다.” 그 사람에게는 의혹이 남는 거요.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내가 잘못을 저지르고 뉘우쳐서 소멸하고 해도 잘못은 그거로 끝납니까? 또 일어납니까?

또 일어나고 소멸하고 일어나고 소멸하고 나는 되는데

상대편이 볼 때는 쟤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도 아니고 세 번도 아니고 네 번도 아니고 계속 저렇게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느냐.

이럴 때는 상대에게 의심을, 의혹을 불러일으키는 거요.

 

그러기 때문에 혼자 살 때는 괜찮은데 여러 사람이 살 때는

내 마음속에 있는 업은 지워졌는데,

내 잘못된 행위가 상대의 마음속에 업으로 쌓여서 누적되고 있다.

 

그래서 우리도반끼리 모여서

나의 이 잘못을 알아차린 이 잘못을 대중 앞에 드러내어 참회합니다.

같이 모여서.

이걸 발노發怒참회라 그래. 스스로

, 제가요, 그분이 말씀을 할 때, 제가 순간적으로 화가 일어났고 그래서 화를 냈습니다.

그런데 내가 가만히 돌이켜보니까, 그 순간에 내 옳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그랬던 같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순간에는 모르고 상대를 비난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자기 알아차림을 대중에게 드러내어 참회하는 것, 이게 발노참회다. 이 말이오.

 

스스로 혼자서 참회할 때는 온갖 것들을 가지고 다 참회해도 됩니다.

그런데 발노참회라 때는 우리 대중이 같이 지키기로 한 약속

그 범위 안에서만 발노참회하면 됩니다.

사사로운 그런 개인 거 다 드러내서 할 필요는 없다.

 

불자로서 어떤 상태에서 5계를 같이 받았다하면 5계에 대해서 참회하고

10계를 같이 받았다하면 10계에 대해서 참회하고.

 

발노참회를 할 때는 아무나 참석하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공동체 구성원들, 계율을 같이 받은 사람, 규칙을 같이 정해놓고 같이 하기로 한 사람끼리 모여서 어떻게 한다?

돌아가면서 발노참회를 하는데,

 

이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키기로 한 계본을 누군가가 낭독을 합니다.

그러면 그 계본을 하나하나 들으면서 내가

, 저 계본? 내가 어겼구나. , 저 계본? 내가 어겼구나.’

이렇게 해서 참회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포살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원래 보름마다 한 번씩 포살을 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보름마다 한 번씩 포살을 하게 되면, 같이 사는 공동체 구성원 사이에 의혹이 서로 없어지기 때문에, 대중의 화합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럴 때 어떻게 진행을 하느냐?

제가 한번 읽어드리겠습니다.

 

사회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은 전기 포살일입니다.

만약 여러분께서 의의가 없으시면 승가는 포살을 베풀겠습니다.

승가에 청정함은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청정함을 말합니다.

지금부터 제가 외우는 계본을 잘 듣고자 잘 생각하여 스스로 허물이 있다고 자각하게 되면 대중들께 드러내어 참회하십시오.

그러면 곧 청정해질 것입니다.

 

허물이 없는 사람은 잠자코 있을지니 잠잠하면 곧 청정하다고 하겠습니다.

물을 때는 마땅히 대답을 해야 합니다.

이같이 3번을 물을 것이니, 3번을 질문 받고도 허물이 있으면서 드러내어 고백하지 않는다면 이는 고의적인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고의적인 거짓말을 한 사람은 수행자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승가의 구성원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허물이 없다고 기억되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청정하기를 원한다면

그 허물을 대중 앞에 드러내십시오.

드러내고 참회하면 곧 청정함을 얻을 것입니다.

 

이렇게 시작을 해서 예를 든다면 첫째 계본, 우리가 불살생 같으면

살아있는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말라.

어떤 행자라도 이 계본을 어기면 허물이 됩니다.

이제 여러분께 묻겠습니다.

이 계본에 대해서 청정합니까?

다시 묻겠습니다.

이 계본에 대해서 청정합니까?

세 번째 묻겠습니다.

이 계본에 대해서 청정합니까?

 

이렇게 물으면 그 계본을 잘 듣고

, 내가 이렇게 살생을 했구나.

, 내가 순간적으로 이렇게 폭력을 행사했구나.

이런 것들이 알아차려지는 거요.

 

그런데 스스로 참회하는 거는 이런 외부적 자극 없이 자기가 스스로 알아들으니까 놓쳐버리고 지나가버리면 어때요?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보름마다 한 번씩 정기포살을 하면, 그 계본을 낭독하는 소리를 딱 들어보면 , 내가 3일전에 그걸 놓쳤구나.’

, 자기가 스스로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거요.

 

이렇게 해서 자신이 놓쳐버린 것들을 찾아서 스스로 참회하고

또 대중들에게 의혹을 풀어주기 위해서 대중에게 드러내어 참회하는 것을 포살이라고 한다.

 

이렇게 포살을 하게 되면 전체 승가가 다 구성원이 청정화합해진다.

우리도 집에서 부부와 자식들이 보름마다 한 번씩 방에 앉아서 포살하면 좋겠죠.

, 이렇게 해서 아버지가 맨날 아들보고 너 잘못했다 그러고, 아들은 아버지보고 속에 불만 있어서 말도 못하고. 이게 아니라

 

지적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둘러앉아서

, 저는 이런 거를 제대로 못했습니다.

저는 이거 하기로 해놓고 제대로 못했습니다.”

각자 돌아가면서 자기 참회를 하고, 그러면 옆에서 격려해주고,

, 그랬구나. 그 얘기 듣기 전까지 난 의혹이 있었더니 너한테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이렇게 가정에서 포살.. 가정이 얼마나 화목해지겠어요.

 

그런데 여기서 포살만 갖고 또 안 돼.

왜냐하면 이거는 아무튼 자기가 자기 잘못을 자각할 때만 가능하잖아.

그런데 우리가 어떤 잘못을 저지러놓고도 내가 잘못했는지 안했는지 모를 때도 있잖아요.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하느냐?

이것이 자자입니다.

 

이것은 대중이 둘러앉아서 먼저 청합니다.

여러분, 저를 위해서 저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시오.

지난 몇 달 동안 저의 말이나 행동을 보고, ‘계율에 어긋났다. 수행자로서 어긋났다라고 할 만한 것이 있다면 저를 위해서 지적해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기꺼이 받아들여서 잘 고쳐나가겠습니다.

이렇게 대중 앞에 절을 하면서 청해듣는 거요.

그러면 대중들은 도반으로서 지켜보다가 , 저 분은 저것을 어기고 있구나하고 있을 때, 그것을 분별심으로

너 그거 수행자가 그렇게 해서 되겠어?”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서 청할 때 해주는 거요.

 

그래서 수행자는 청하지도 않는데 지적을 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청하면 그를 위해서 지적해주면 기꺼이 받아들여서 고치도록.

, 도반을 통해서 자기 수행을 해나가는 거요.

그런데 이건 수준이 조금 높아야 됩니다.

 

수준이 낮은 사람끼리 이 자자를 하게 되면

? 나만 그랬나? 너는 안 그랬나?

네가 나한테 그렇게 지적할 수가 있어?

그럼 너 차례 되면 보자.”

이렇게 감정이 상하면 이것은 분별심이지,

자자가 아니다, 수행이 아니다. 이 말이오.

 

그래서 이 자자는 함께 생활하는 수행정도가 조금 높은 사람들끼리 자자를 행하게 된다.

저희들은 이렇게 1년에 한차례 내지 두 차례 자자를 하고

매월 한 차례 포살을 하고 이렇게 해나가고 있죠.

이렇게 함으로 해서 이 공동체 구성원들이 점점점점 성숙해 간다.

 

그래서 이런 포살과 자자라고 하는 좋~~~은 제도가 우리 불법 안에 있다.

매일 스스로 참회하고

보름마다 함께 모여서 포살하고

그다음에 1년에 적어도 한차례씩 자자를 행한다면

오늘 우리 승가의 스님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재가신자들 가정에 얼마나 좋~~~~은 수행의 모범이 될까.

 

이런 좋은 제도가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지금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이런 좋은 부처님의 가르침

좋은 불교의 제도를 생활화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