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전우용 사담

전우용의 픽 25화 - 혐한과 반일

Buddhastudy 2019. 7. 30. 20:38

 

전우용의 픽입니다.

얼마 전, 일본 아베 정권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가 이루어지면서

한일 관계에 대해 여러 이야기가 나오고 있고

국내에서도 우리 정부가 잘못한 일이니 우리 정부가 풀어야 한다.’ 이런 식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아베 정권의 왜 그랬느냐 질문에 대해서 우리가 잘못했기 때문이다. 라고 판단하고 하는 이야기들이 있죠.

일본은 이성적이고 한국은 감정적이다.

일본인은 냉철한데, 한국인은 흥분하게 잘한다.

 

이런 식의 담론은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뿐만 아니라 일제강점기, 더 나아가서 개항기에도 대단히 일반적인 담론이었습니다.

늘 그렇게 일본을 이성으로 놓고 한국을 감정으로 놓는 그런 대립 속에서 양국관계를 인식하는 틀이 자리잡아 온 거죠.

 

그래서 오늘은 이런 식의 생각의 역사,

혐한과 반일의 역사에 대해서 말씀드려볼까 합니다.

 

어느 나라나 근대국가가 성립하는 과정에서는 자기 국민들에게 고유의 정체성을 만들어주려는 시도가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고,

우리는 무엇으로 단결할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그 이전에도 아주 옛날에도 양국 사이에는 서로에 대한 감정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삼국시대부터 왜구에게 시달려왔기 때문에 한국인들에게 일본인들에 대한 감정이 좋을 수는 없었습니다.

 

문무왕이 바다에 무덤을 쓴 이유도, 장보고가 청해진을 건설한 이유도, 다 왜구 때문이었죠.

반면에 우리 한국인들이 일본을 침략한 적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몽골의 압력에 밀려서 여몽연합군을 조직해서 일본 해안 가까이 접근한 적은 있었지만,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한국인들에 대한 감정은 그렇게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기들끼리 분할되어서 싸우는데 여념이 없었죠.

 

그러다가 근대국가성립기에 서로에 대한 인식을 새로 하게 됩니다.

자기만 인식하고 있던 단계에서 이웃과의 비교를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구축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거죠.

 

근대 이전의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중세적 배회주의라면

근대에 들어와서 근대적 민족주의라고 하는 것이 형성되기 시작하는데,

그때부터 일본은 한국을 가장 기본적인 비교대상국가로 삼았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1876년 강화도 조약 이전부터, 강화도 조약을 계기로 해서 교류를 시작하면서부터 일본에 잡지나 신문에는 한국의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여러 삽화들이 실렸는데

그런 삽화들에서 대게 한국인은 갓을 쓴 노인이나 기생으로 묘사가 되곤 했습니다.

반면에 일본인들은 자기들의 대표를 양복 입은 건장한 남성으로 묘사했죠.

 

그런 그림이 일본인들의 의식에 자주 침투함으로서 일본인들은 자연스럽게 문명하고 건장한 일본인들이 미개하고 노쇠한 조선인들을 병합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그런 식의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근대혐한의식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한 이후에 이 의식은 두 가지 차원에서 더 심화하고 확산했습니다.

첫 번째는 일본이 정책적으로 혐한의식을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입니다.

근대과학이라고 하는 도구를 사용해서 한국의 민속, 문화 역사 등을 조사했고, 거기에 자기들 마음대로 과거의 선입견을 그대로 바탕에 깔고 정의를 내렸습니다.

 

한국인은 나태하며, 신의가 없고

작은 이익에 쉽게 흔들리며 배은망덕하고

도덕심이 부족하고 공공질서를 지키려는 의식도 없다!

등등 수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졌습니다.

 

둘째로는 생활면에서 일본인들의 이런 혐한의식을 강화하는 조건들이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말로 조선인이죠.

조선인 여성들을 가사 노동자, 하인으로 부렸습니다.

그들은 뭐라고 불렀느냐하면 어머니, 또는 여보 라고 불렀습니다.

 

일본식으로 부르면 이름이나 성 뒤에 상을 붙여야 했는데, 그런 식으로 사람처럼 대접하기 싫었다는 의사표현이었던 거죠.

일본인들이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게 가난하거나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인력거꾼 지개꾼들

 

그런 사람들을 접하면서 일본인들은 자연스럽게 조선인들이 못나서 식민지 백성이 되었고, 못나서 가난하고 못나서 험한 일을 한다는 그런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이른바 조선인을 낮춰보게 된 것은

빈곤의 일반적인 속성을

한국민족의 고유속성으로 왜곡해 인식했던 탓이죠.

 

1945년 일본은 패망했고, 한국에 살던 일본인들은 일본으로 귀환했습니다.

그들 머릿속에 새겨져 있던 한국인에 대한 생각과 의식은 그대로 가지고 갔습니다.

거기에 일본사회 내에 오랫동안 잠복해 있었던 거죠.

 

패전이후, 일본인들 내부에서도 반성의 기운이 일었습니다.

그동안 일본인이 잘났다고 생각하고, 잘난 일본인이 못난 주변 민족을 침략해서 수탈하고 또 학대하고 모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권리이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다. 라고 생각하고 반성하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반성의 기운이 한 세대를 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1980년대 중후반,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다시 휩쓸고, 일본에 다른 잠재적 위협으로 느껴졌던 현실사회주의권이 몰락하면서 일본인들 내부에 오랫동안 잠복했던 혐한의식이 다시 표출되기 시작했고

그것이 80년대 말 이후로는 공공연하게 표출되면서 동시에 그 정치적 짝으로써 정치적 표현으로써 일본의 정상 국가화라는 구호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전범국가이기 때문에 군대를 보유할 수 없고, 그리고 먼저 군사행동을 할 수 없는 것은 국가로서 심각한 결격사유다.

이 결격사유를 가진 비정상국가를 침략할 수 있는 정상국가로 바꾸는 것이 일본의 국가전략이 되어야 한다. 이런 얘기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죠.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의식 안에,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의 가장 핵심적인 지식기반이 바로 혐한의식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혐한하는 것은 한국인들을 혐한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너무나 당연한 문화현상이라고 용인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반대해서 한국인들이 반일을 한다면 어땠을까요?

, 반일을 하는 것은 반일 의식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잡혀가서 고문당하고 감옥에 가고 심지어는 죽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일본인들에게 혐한은 무한정 허용되었지만,

한국인들은 절대로 반일을 해서는 안 되는 조건, 그런 상황이

일제강점기의 일반적인 상황이었던 거죠.

 

한국인들은 이 일본인들의 혐한에 어떻게 대응했을까요?

3가지 형태의 대응방법이 있었습니다.

 

1. 일본인들의 혐한의식에 그대로 동조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우리가 못나서 나라를 빼앗겼다. 우리가 못난 상태로 있어서는 독립의 길도 요원하다.

우리 스스로의 악습과 악덕을 없애버리고 거기에 새로운 미덕을 채워야 한다.

그런데 그 미덕은 누구냐? 누구의 것이냐?

아시아에서 가장 성공한 민족이 일본 민족이니까 일본민족으로 채워야 한다.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본인들의 혐한에 동조해서 같은 민족인 한국인들을 일본인들과 함께 혐오했고 그리고, 한국인들의 반일은 절대로 안 된다고 극구 말리는 그런 태도를 일관되게 고수했습니다.

 

해방직후에 정부수립직후에 반민특위가 만들어지고, 반민특위에 체포되어갔던 이광수가 그런 말을 했다고 그러죠.

민족을 위해서 친일했소.”

 

그가 생각했던 한국인들의 미래는 일본민족과 똑같이 되는 것이었고, 일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반일을 절대로 용인하지 않았습니다.

혐한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한국인들의 악습을 고치기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었죠.

 

2. 일본인의 혐한에 반대해서 똑같은 방식으로 혐일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더 잘났고, 우리가 더 우수한 민족이고, 일본은 열등한 민족이고,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던 것이죠.

그러나 현실에서 실제로 한국인이 약하고, 가난에 찌들고, 일본인들에게 학대받는 현실에서 그런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에는 어려웠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옛날 역사로 되돌아가는 그런 모습을 보였습니다.

 

3. 이런 식의 혐오와 차별과 모욕과 학대의 관계 자체가 불이하고 부당하다고 판단하고, 그것을 다른 차원에서 극복하려고 노력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한국인들에게 일본의 혐한에 대한 의식은 이렇게 다층적이었죠.

그들은 불법적이고 부당한 민족을 경계로 해서 이루어지는 차별과 학대의 관계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을 했고, 그리고 그런 것이 보복이나 복수로 표현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백범선생이 전에도 한번 소개해드렸습니다 만은

내가 남의 침략을 받았기에 남을 침략하지 아니한다라는 말,

우리는 돈으로 힘으로 세계 제일의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라

문화로 세계제일의 나라가 되고자 한다는 말,

그 말이 이런 생각을 담은 것이었죠.

 

한국인들도 해방이후 이 3가지 기억, 또는 3가지 생각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물론 1960년대 주로 한일국교정상화 이후에

우리 안에 있는 이런 혐한의식을 청산하자,

과거처럼 여전히 일본을 우리가 본받아야 할 상대로 일방적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극복하자.

이런 운동 꽤 오래 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벌어진 사태를 보면 상황들을 보면, 이 운동이 정말 어느 정도나 성과가 있었나 돌아보게 만들 정도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협한 의식에 포로가 되어서 반일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한국인들을 꾸짖으면서 야단치면서, 일본인들의 혐한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는 한국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가 진정 미래지향적인 동반자적 한일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서로에게 필요한 것은

일본 내에서 혐한의식을 떨어버리는 것이고,

한국 내에서도 그런 이른바 민족간 차별의식을 떨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전우용의 픽, 이걸로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