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부처님이야기

[법륜스님의 부처님 이야기] 78. 자등명 법등명

Buddhastudy 2019. 9. 4. 20:21


안녕하세요.

부처님께서는 바이샬리의 암나빨리 망고원에서 마음껏 머무신 다음, 아난다에게

아난다여 벨루바나 마을로 가자

이 벨루바나라는 말은 벨루는 대나무라는 뜻입니다. 바나는 숲이니까 중림으로 가자, 중림마을로 가자 이런 얘기가 되겠죠. 대나무가 많이 있는 어떤 마을이었나 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마을에서 머무시는데, 마침 우기가 시작될 때였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을 많이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지금은 가뭄이 많이 들어서 공양을 받기가 매우 어렵소.

그러니 각자 자기 아는 사람, 지인이나 지기, 벗들을 찾아서 한 마을에 한 명씩 가서 우기를 보내시오.”

이렇게 지시를 합니다.

 

그러니까 그 해는 그 전에 가뭄이 너무 들어서 농사를 다 망치게 되었어요.

그래서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동네사람들, 마을사람들도 굶고 굶어죽는 사람이 생기는 그런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니 하물며 밥을 얻어먹는 사람에게 얻어먹기가 쉽지가 않죠.

그런데 이 거지가 한 마을에 한명씩 있으면 괜찮은데 수십 명이 모여 있다면 감당을 할 수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까 한 마을에 한명씩 흩어져서 안거를 보내라, 이렇게 지시를 하셨어요.

원래 안거는 흩어져서 보내는 게 아닙니다.

모여서 함께 지내는 게 안거인데, 탁발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에 맞게 다 흩어져서 보내도록 하셨습니다.

 

부처님은 아난존자를 데리고 두 분만 벨로바나 마을에 머무셨어요.

그때 얼마나 공양 얻기가 어려웠나, 탁발을 하러 가서 못 얻을 때도 많고, 또 사람이 먹을 것이 없어서 말먹이 꾼한테 가서 말이 먹는, 말먹이, 밀기울을 얻어다가 먹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아주 흉년이 심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해였습니다.

 

그 해에 부처님께서는 아주 심한 병이 걸리셨어요.

거의 죽을 뻔 한 그런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난존자가 너무너무 걱정스러워서 안절부절 했어요.

이 우기에 주위에 아무 제자들도 없는 이 상태에 부처님이 만약에 열반에 드신다면 어떻게 할까?

이렇게 안절부절못합니다.

 

그러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마음에 안심을 합니다.

부처님께서 부처님이 열반하신 뒤에 어떻게 해라, 하는 이런 유언을 남기지 않으셨기 때문에 열반에는 들지 않겠다. 이렇게 또 위안을 삼기도 합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사정을 잘 아시고, 지금 이런 안거중이기 때문에 누구도 움직이지 못하거든요. 안거 때는.

그러기 때문에 내가 지금 여기서 열반에 든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번다하게 하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셔서 다시 정신을 오롯하게 하시고 몸을 추스르십니다.

이것을 유수행이다. 이렇게 말해요.

 

유수행이라는 것은 수명을 조금 연장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자연 상태로 라면 이때 명을 마쳐야 되는데, 이런 특별한 상황에서 명을 조금 연장하는 것을 유수행이라고 그래요.

 

유수행을 행하셔서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르시고 나오셨습니다.

그러자 아난다가 너무너무 기뻤던 거요.

그러면서 아난다가 부처님께 질문을 합니다.

 

부처님, 저는 부처님이 편찮으셔서 너무너무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는 중에도 저는 또 안심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부처님 열반 후에 아무런 지시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열반하실 때는 아닌가보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는 어떻게 이 상가를 이끌어야 합니까?”

이렇게 질문을 했던 거요.

 

다시 말하면 유언 같은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이렇게 얘기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아난다여, 비구들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

아난다여 나는 안과 밖이 다르지 않는 가르침을 설하였느니라.

아난다여, 여래의 가르침에는 중요한 것은 비밀로 한다는 스승의 주먹 안에 든 그 어떤 것도 없느니라./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 술 담그는 것도 비법이 있지 않습니까?

그 비법을 딱 움켜쥐고 자기자식한테만 전해주죠.

빵 만든다, 뭐 만든다 어떤 것도 비법이 있습니다.

그걸 딴 사람한테 안 알려줘요.

종교에도 보면 그런 게 있죠.

 

그러니까 보통 설법은 다 하고, 수행을 가르쳐주고 마지막 핵심적인 비법은 움켜쥐고 있다가 누가에게만 준다. 이런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처님께서는 그런 것은 없다.

나는 내가 깨달은 바를 투명하게 모든 사람에게 다 그대로 설했다.

누구나 다 그 가르침대로 따라 정진하면 해탈할 수가 있다.

나는 눈 있는 자 와서 보라라고 할 만큼 이렇게 투명한 가르침을 폈다는 거요.

그러니 나에게 마지막으로 또 남겨둔, 내 주먹 안에 든 어떤 비밀이 있어서 또 전할 그런 가르침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법에 대해서 아주 투명하게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불교 안에도 지금 보면 이렇게 무슨 비법이 전해지는 것 같은 이런 분위기가 아직 좀 남아있죠.

그러나 이 근본 가르침에서 볼 때는 붓다가 그런 것은 없다.

나의 가르침은 누구나 다 보면 알 수 있는 그런 객관적인 것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고요.

 

/비구의 모임을 내가 지도하고 있다든가

혹은 비구의 모임은 나의 지시에 따라 따르고 있다.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나는 내 스스로 이 상가를 내가 지도하고 있다든지, 이 상가는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든지 이런 생각을 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거요.

여기 있는 사람은 법에 따라 정진하고, 다 자발적으로 모여서 해탈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지, 누구의 지도에 따라 누구의 지시에 따라 누구에 의지해서 이런 게 아니라는 거요.

그러니 나에게 후계 따위 같은 것은 묻지 마라.

부처님 열반하시면 다음엔 누가 지도자가 되고, 후계자가 되고, 이 사람들을 끌고 가야 됩니까? 이런 얘기는 하지마라.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 비구들 수행자들을 모독하는 게 된다.

그들은 다 한 사람 한 사람 다 법에 의해서 정진하는, 그런 수행자들이다.

그들은 누구에 의해서 지도되는 게 아니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아난다여, 이젠 나도 늙었다.

나이를 먹어 고령이 되었느니라.

장년기를 지나 노년기에 이르렀다.

나도 이제 나이 여든이 되었다.

아난다여, 마치 낡은 수례를 가죽끈으로 묶어 겨우 움직이는 것처럼

나의 몸도 가죽끈으로 묶어 겨우 조금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으니라./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이 육신이라는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이 몸뚱이가 영원한 것은 아니다.

이 몸뚱이라는 것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어 죽는 것이다.

이 우주도

이루어지고 머무르고 흩어지고 사라지고.

우리들의 마음도

일어나고 머무르고 흩어지고 사라지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이 무상한 것을 영원한 것인 줄 잘못생각하고

거기에 집착하게 되면

바로 늙음을 갖고 괴로워하고, 병듦을 갖고 괴로워하고, 죽음을 갖고 괴로워하게 된다.

 

이런 법의 이치를 알게 되면

비록 늙은 몸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늙음에 괴롭지 않고

병든 몸을 갖고 있으면서도 병듦에 괴로워하지 않고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을 갖고 있으면서도

죽음에 두려움이 없고 괴로움이 없는 그런 경지로 나아가게 된다.

이런 얘기겠죠.

 

그러면서 부처님께서는

/타인에게 의지해서는 안 된다.

수행자는 자기 자신에게 의지해야 된다.

타인을 등불로 삼아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아야 된다.

 

또 수행자는 오직 법에 의지하고, 법을 등불로 삼아야지,

법 아닌 것에 의지하고, 법 아닌 것을 등불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이것을 우리가 한문으로

자귀의 법귀의:

스스로에 귀의하고 법에 귀의하라.

자등명 법등명: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

 

그런데도 우리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자기는 없어져버리고 남에게 의지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이 세상 살면서 아내는 대부분 누구에 의지하고 삽니까?

남편에게 의지하고 살죠.

자식은? 부모의지하고 살죠.

늙은 부모는? 자식을 의지하고 살죠.

또 남편은? 아내에 의지하고 살죠.

 

그렇게 의지하고 살다보니

남편이 죽었다거나 아내가 죽었다거나 부모가 죽었다거나 자식이 죽었다 그러면

완전히 하늘이 무너진 것 같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애통해 하고, 괴로워하고 그러죠.

 

또 우리는 머니머니해도 믿을 거는 머니밖에 없다 이래서 또 돈에 지나치게 의지하죠.

요즘은 자식도 믿을 게 못돼, 남편도 믿을 게 못, 아내도 믿을 게 못돼.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못 믿고 돈을 믿고 돈을 별도로 보관하고

아내가 남편을 못 믿고 별도의 주머니를 차야 된단 말이오.

말없는 돈이 그래도 제일 믿을 수가 있다.

 

그래서 주식을 샀는데 주식 값이 폭락한다든지,

부동산을 샀는데 땅이 안 팔린다든지,

현금을 맡겨놨는데 잃어버렸다든지,

이렇게 되면 그 괴로움 또한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또 우리는 사회적 지위나 명예, 또는 자신의 건강, 이런 것에 의지하게 되죠.

그런데 그것은 다 언젠가는 무너지고, 사라질 거다.

그런 데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거요.

 

또 수행을 하게 되면 스승의 가르침을 법에 따라 정진을 해야 되는데,

그냥 스님이라든지, 스승이라든지, 이런 어떤 모양과 형상에 의지하죠.

그래서 우리가 불교나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지마는, 어떤 큰 스님이 계시는데 신도들이 우우 있다가 돌아가시면 어때요? 또 다 흩어져버리죠.

 

이것은 자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사람에게 의지한다.

법에 의지하지 않고, 법 아닌 이런 형상에 의지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법에 의지하라.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라.

하는 이 말씀을 부처님이 계시지 않는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정진해 나가야 할 것인가,

이런 것을 아주 분명히 얘기했다. 이렇게 볼 수 있겠습니다.

 

/아난다여, 어떤 비구가 만일 내가 죽은 다음일지라도

자신을 의지처로 하고 자신에게 귀의하면 타인에게 귀의하지 않고 살며

또 진리를 귀의처로 하고 다른 것에 의지하여 산다면

아난다여, 그런 사람은 내가 부정하는 어두운 세계를 초월하여

배움을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니라./

 

한마디로 말하면 그가 참으로 수행자라고 말할 수가 있다.

이렇게 해서 자등명, 법등명을 말씀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아난다를 데리고 차팔라영지에 가서 혼자 아주 깊은 명상을 하셨습니다.

그때 다시 악마가 유혹을 합니다.

 

부처님이시여, 이제 열반에 드소서.”

 

다른 말로 하면 빨리 목숨을 마쳐도 된다.

유수행을 해서 명을 연장시킬 필요가 없다.

그러면서 옛날에 피팔라 나무아래에서 부처님이 스스로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이 좋은 법을 세상에 전하는 것은 저 어리석은 사람이 알아차리려면 너무 어렵다 이거야.

그것을 깨우치려면 그 또한 수고로운 일이니, 그냥 이 자리에서 열반에 드소서.

 

이렇게 속삭였을 때, 범천의 이름으로

아닙니다. 부처님. 이 세상 사람들은 아직은 어리석음에 묻혀있지마는

아주 약간만 바른 법을 건드려줘도 그들은 깨우칠 수가 있다.

 

마치 연꽃이 수면위에 올라온 것도 있고, 수면에 있는 것도 있고 수면 바로 밑에 있는 것도 있어서 금방 필 수 있는 것처럼

어리석은 중생들도 많지만, 그러나 이 좋은 법을 만나면 깨달을 수 있는 그런 사람들도 많으니 법을 전하소서.

이렇게 해서 부처님이 설법을 하셨잖아요.

 

이렇게 해서 부처님이 설법을 하시는 중에 또 어느 때 나타나서 말합니다.

이제 설법을 충분히 했으니 열반에 드소서.”

그런데 부처님께서는

아니다. 저 비구들이 충분히 법에 귀의해서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저 비구니들이 충분히 법에 귀의해서 깨달음을 얻을 대까지

저 재가남자 신자들이, 저 재가여자 신자들이 법에 귀의해서 충분히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나는 법을 설하리라.

 

그랬는데 부처님께서 그 전에는 열반에 들지 않겠다고 했는데

부처님 지금 당신이 원하는 게 다 이루어졌다는 거요.

 

얼마나 많은 비구들이 법에 귀의해서 해탈을 했으며

얼마나 많은 비구니들이, 얼마나 많은 재가신자들이 그런 경지에 이르렀으니

이제 더 이상 부처님께서 그런 일에 마음 안 두셔도 된다.

이렇게 속삭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나의 청정한 행이 나 홀로만의 것이 아니라

온 세상에 번성하여 널리 알려지고,

많은 사람들의 것이 되며,

많은 사람들에게 충분히 해명될 때까지는

나는 결코 열반에 들지 않는다./

 

이렇게 원을 세우시고, 법문을 하셨는데, 이제 그러한 일들이 거의 이루어졌다.

그러니 나는 3개월 후에 열반에 들리라.

이렇게 해서 대중들을 대림정사에 모이게 하고, 마하바나, 대림, 큰 숲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곳에서 사념처에 대해서 다시 법문을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의지해야 될 것은

이 몸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

몸이라는 것은 부정한 것이다.

이것은 의지하거나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그리고 우리들의 느낌, 이거 관찰하면

이것은 고든 락이든 다 근본은 고다.

 

그리고 우리들의 마음은 무상한 것이고,

제법은 무아인 것이다.

 

4가지를 깊이 깨닫게 되면

우리는 어떤 괴로움에도 빠지지 않게 된다.

 

이런 설법을 하시고 난 뒤에

나는 3개월 후에 열반에 들겠다.

이렇게 열반을 선언하시게 됩니다.

 

이 열반을 선언하신 곳이 바이샬리입니다.

그러니까 벨로바나 마을에서 심한 병에 걸리셔서 그 고통을 겪으시다가 유수행을 하셔서 다시 수명을 좀 연장하시고,

그리고 우기가 끝나자 모든 대중들을 정사로 모이게 해서 거기서 다시 법문을 하시고는

3개월 후에 내가 열반에 들겠노라,

이렇게 선언을 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부처님께 이렇게 시로 읊으셨습니다.

 

이 몸에도 늙음은 닥쳐오고

생명의 불꽃 가냘파지니

버려야 하지 않겠는가?

 

자신을 귀의처로 하고

끝없이 정진하라.

 

비구들이여 게으름 피우지 말고

사유를 다스리며

자신의 마음을 지켜라.

 

내가 설한 법을

게을리 하지 않고 정진하면

세세생생 윤회를 끝내고

괴로움의 끝을 다하리.

 

이렇게 열반에 임해서 마지막으로 설법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바이샬리로 탁발을 가셔서 돌아오시다가 바이샬리를 이렇게 돌아보면서 그 돌아보는데 어떻게 묘사가 되어 있느냐

코끼리가 고개를 돌리듯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코끼리가 고개를 돌리면 큰 짐승이니까 고래를 빨리 돌려요? 천천히 돌려요? 천천히 돌리죠.

그것처럼 부처님이 고개를 뒤로 돌리면서이 말은

이미 몸이 늙고 병들었기 때문에 부처님의 동작이 그만큼 느리다 하는 것을 말하죠.

 

그렇게 바이샬리를 보시면서

내가 이 아름다운 바이샬리를 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이구나.”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에게 말해서 다시 여행을 떠나십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은 간타키강을 건너서 북쪽으로 다시 여행을 떠나시는데, 그때 이 바이샬리 사람들은 부처님을 뵙는 것이 마지막이겠다. 이렇게 알았기 때문에

부처님이 간타키강가에 이르도록 배웅을 하고 돌아가야 되는데 안 돌아가고 계속 부처님을 따라 왔어요.

간타키 강변까지 이르렀어.

부처님이 배를 카고 제자들과 간타키강을 건너 건너편으로 갔는데도

이쪽에서 재가신자들이 돌아가지를 않고 계~~~속 강변에서 부처님을 배웅하고 있었어요.

그러자 부처님께서 자신이 갖고 있던 바루, 이것을 강물에 띄워서 강 건너편에 있는 바이샬리 재가신도들에게 가도록 줍니다.

 

그림을 보면 강물이 흐르는 데 바루가 하나 떠내려가는 그림이 있거든요.

이것은 부처님이 마지막으로 바이샬리 재가신자들에게 정표로 바루를 보내셨어요.

 

이렇게 해서 부처님께서는 바이샬리를 떠나셔서 북쪽으로 북쪽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반다마을을 지나고, 하티마을을 지나고, 압빠마을을 지나고, 잠바마을을 지나고 보가나가라 마을을 지나게 된다.

바로 그곳에서 부처님은 다시 설법을 행하시게 됩니다.

 

이것이 부처님의 마지막 여행의 코스를 제가 하나하나 말씀을 드리고 있고요

이 마지막 여행의 코스에도 부처님은 가는 곳마다

제자들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그 지역 주민들을 위해서

계속 설법을 하면서 지나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