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MBC1919-2019 기억-록

[기억록] 권해효, 김남주를 기억하여 기록하다

Buddhastudy 2019. 11. 7. 21:28


나이 마흔 네 살에 아들을 하나 얻었습니다.

그 아이의 이름을 토일(土日)이라고 지었습니다.

김토일(金土日).

 

나는 내 아이가

, , , 목 열심히 일하고

, , 일은 쉴 수 있는

그런 좋은 세상에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꿈꿨던 사람.

 

--

펜도 종이도 허락되지 않았던 감옥

펜 대신 끝을 간 칫솔로 쓰여진 시

 

시인에게 이것은 얼마나 가혹한 형벌이었을까요.

 

, 다산이여

다산이여.

어느 세월 밝은 세상 있어

그대 전론을 펴고

주린 백성 토지 위에

살찌게 하리요.

- 김남주 다산이여, 다산이여

 

우유값, 화장지, 심지어는 낙엽까지

감옥 안에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시인 김남주에게는 종이가 되었습니다.

이 어두운 불의의 시대가

그에게 뜨거운 시를 토해내게 했던 것이죠.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오월은 바람처럼 그렇게

서정적으로 오지는 않았다.

- 김남주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

 

대학교, 경찰의 상주 그리고 감시

국회 해산

비상계엄 선포

 

뜨거웠던 청년 김남주는

그 시대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유신을 반대하는 지하신문을 만들었고

1973년 김남주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면서기가 되어

집안에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다.

황금을 갈퀴질 한다는

금판사가 되어

문중의 자랑도 되어주지 못했다.

나는 항상 이런 곳에 있고자 했다.

인간적인 의무가 있는 곳에.

용기가 있는 사람이 필요한 곳

착취와 억압이 있는 곳

바로 그 곳에

- 김남주 그리고 나는

 

1979년 남민전 사건에 연류, 구속

1988 석방

 

무려 93개월의 수감생활

시인 김남주가 남긴 510편의 시 중에서

360편의 시는 옥중에서 쓰여진 것이었습니다.

 

착취와 억압이 있는 곳에 시는

항시 있어야 하고, 저 또한 있을 생각입니다.”

-김남주 1988년 석방당시

 

피와 땀과 눈물의 양분 없이

자유의 나무는 자라지 않는다 했으니

이 나무를 이만큼이라도 키워낸 것은

가신 임들이 흘리고 간 피가 아니었던가.

자기 시대와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자기 시대와 격정적으로 싸우고

자기 시대와 더불어 사라지는데

기꺼이 동의했던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아니었던가

- 김남주 전사2’

 

김남주

(1946.10.16~1994.2.12)

 

권해효

김남주를 기억하여 기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