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일묵스님_윤회와죽음

8. 일묵스님_윤회와 행복한 죽음//3월 16일 방송 - 결과를 생산하는 장소에 따른 업의 분류 (15:36)

Buddhastudy 2012. 6. 3. 18:42

  출처: 유나방송

 

안녕하세요.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지난 시간에 업중에서 어떤 업이 결과를 먼저 생산하느냐? 그러니까 결과를 생산하는 순서에 따라서 무거운 업, 그리고 임종 가까이 지은업, 습관적인업, 이미 지은업, 이렇게 네 가지로 나누었는데, 그중에서 무거운 업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나머지 임종 가까이 지은업과 습관적인업, 이미 지은업. 이 세 가지에 대해서 좀 부연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지은업 중에서 먼저 작용을 하는 것은 무거운업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약에 이런 무거운 업이 없다면 그러면 어떤 업이 작용을 하느냐? 그다음으로 먼저 작용을 하는 업은 바로 죽음 가까이 가서 지은 업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임종 가까이 가서 지은 업보다 습관적으로 지은 업이 업의 강도라든가, 업의 세기가 좀 더 강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비유를 들어보면 약간 이해가 쉬울 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어떤 소들을 가두어 놓은 우리에다가 한쪽 문을 열어놓고 그 문을 열어준다면 그중에서 제일 먼저 나가는 소는 가장 힘세고 가장 강한 그것이 먼저 나갈 테고, 그다음에 나가는 것은 아마도 그 문에 가까이 있는 소가 가장 먼저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거운 업이 작용하고 나서 그다음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죽음 가까이서 짓는 업이라고 하는 것은 다음 생에 태어날 때 그 죽음에 일종의 다음 생으로 가는 관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어요. 죽음 직전이라는 것은.

 

실제로 우리가 다음에 제가 자세히 설명 드리겠지만, 우리가 다음 생으로 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음 직전에 일어나는 그 마음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래서 죽음 가까이 가서 지은 업이 죽음 직전에 나타날 가능성이 조금 더 높다는 거죠. 그래서 두 번째로 다음 생을 생산할 생산업이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은 임종 가까이 가서 지은 업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법구경에 보면 좋은 예가 나옵니다. 마타쿤달리라고 하는 어린아이가 있었는데요. 이 아이는 자기 아버지가 너무나 지독한 구두쇠였습니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대게 부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가 황달에 걸렸었는데 이 아버지가 치료비가 아까워서 자기가 의사한테 가서 배워서 치료를 해 주겠다고 하고 의사를 찾아다니다가 병이 더 심해져서 결국은 죽을 수밖에 없는 병이 심각해져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까지 가버린 거에요. 그런데도 이 아버지는 거기서 자기가 아들이 자기 집안에서 죽으면 문상객들이 찾아와서 자기 집안에 있는 음식을 축낼까 두려워서 집 밖에 있는 정각에다가 자기 아들을 내놓고 거기서 죽어가게 합니다. 정말 요즘에도 이런 사람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그렇게 해서 이 아이가 쓸쓸하게 죽어가고 있었는데.

 

그때 당시에 부처님께서 공양시간이 되셔서 탁발을 하러 나오시게 됩니다. 그래서 탁발하는 모습을 보고 이 죽어가는 어린아이가 너무나 그 부처님의 거룩한 모습, 탁발하는 모습 이런 걸 보고서 너무나 신심이 났습니다. 그래서 죽어가면서 청정한 신심을 내게 되었고, 그때 부처님께서 그 아이의 상태를 아시고 가까이 가서 이야기를 합니다. 이때 아이가 저는 손끝 하나도 움직일 수도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네가 할 일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라고 이야기를 하고 그렇게 해서 이 아이는 편안한 마음으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죽음에 다다르기 직전에 부처님께 아주 청정한 신심을 내는 그런 선업을 지은 거죠. 그런데 이 사람은 아버지가 그렇게 구두쇠였기 때문에 죽기 전에 그렇게 큰 선업을 지은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죽음 직전에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께 청정한 신심을 낸 그 공덕만으로 천상세계에 태어났다는 거죠.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 만큼 죽음 직전에 일으키는 짓는 업. 죽음 임종에 거의 가까이 가서 짓는 업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반대로 또 하나의 예가 있습니다. 그 부처님 당시에 띳사장노라는 장노가 있었습니다. 이 분은 스님으로서 아주 열심히 삶을 살았고 또 선업도 굉장히 많이 지은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죽음 직전에 어떤 신도가 보시한 어떤 가사가 있었습니다. 이 가사가 너무나 질이 좋고 마음에 들었던 모양입니다. 일시적으로 탐욕이 일어나서 이 가사를 내일 내가 지어서 가사를 해 옷감을. 처음에는 가사를 준 게 아니라 옷감을 줬겠죠. 그래서 이 옷감으로써 가사를 만들어서 내일 입어야지 하고 그런 마음으로 있었는데. 그날 먹은 음식이 뭔가 잘못 되가지고 그날 갑자기 복통을 일으켜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노는 그동안 선업을 많이 지었지만 죽기 전에 갑자기 그 가사에 대한 탐욕이 강하게 일어나서 죽을 때, 이 가사에 대한 탐욕의 마음을 가지고 죽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죽음 직전에 이 가사에 대한 탐욕이라는 불선업을 짓게 된 거죠. 그래서 이 띳사장노는 다음 생에 뭐로 태어났냐하면 그 가사에 붙은 이로 태어났습니다. 그 옷감에 붙은 이로. 그래서 일반적으로는 스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그 스님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 특별히 누구에게 소속된 게 아니면 다른 스님들이 나눠 가지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천이통, 그러니까 천이통이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이 가진 신통인데 당신이 듣고 싶은 소리를 다 들을 수 있는 그런 능력입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들어보니까 띳사장노가 죽어서 옷감의 이로 태어났고, 이로 태어나서 그 스님들이 옷감을 나눠 가지려 하니까 저놈들이 내 옷감을 가져간다. 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 거에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그 비구들에게 가서 이 나누는 것을 며칠만 미루어라. 며칠 있다가 나누어라. 그렇게 말씀을 합니다. 그러니까 이 이는 옷감에 붙어살면서 자기 수명을 다하게 되고 그 마음에 대한 애착이 떨어졌기 때문에 그 이전에 지었던 선업이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띳사장노는 다시 천상세계에 태어나게 되는 그런 일화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이 띳사장노는 일생 동안 선업, 거의 선업을 많이 지었고 선업이 주된 업이었습니다. 습관적으로 지은 업이 어떻게 보면 선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기 직전에 강하게 지었던 업이 바로 가사를 만들 옷감에 대한 애착이었습니다. 탐욕. 그래서 그 불선업 때문에 다음 생에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이로 태어났습니다.

 

만약에 그때 부처님께서 말리지 않았다면 이 이가 자기 옷감을 가져가는 게 또 화를 내서 더 악처에 태어나고 이렇게 될 수도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물론 부처님의 도움으로 다음 생에 천상세계에 태어나긴 했지만. 그만큼 습관적으로 지은 업보다는 어떻게 보면 죽음 직전에 지었던 업이 좀 더 앞선다는 이야기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띳사장노같은 경우는 그 생에 선업을 많이 지었지만 죽음 직전에 마음을 잘못 일으킨 그 과보로 이로 태어났고, 부처님의 도움 때문에 그 업이 다하니까 전생에 또 지었던 스님으로서 지었던 선업이 작용해서 천상계에 태어났다는 이런 일화가 법구경에 보면 나옵니다.

 

그래서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죽음 직전에 가지는 마음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우리가 행복한 죽음을 맞이해야 된다고 하는 것도 죽음이 가까이 갔을 때 우리가 이생을 마감할 때 어떤 마음으로 마감하느냐가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그런 것도 있습니다. 우리가 일생 동안 잘 살다가도 죽음 가까이 가서 너무 마음이 흐트러지고 또 죽음 가까이 가서 그렇게 마무리를 잘 못한다면 잘못하면은 일생 동안 선업을 지었다가도 악처에 떨어질 수 있는 그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 직전에 지은업이 매우 중요하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는 거죠.

 

또 이거는 역으로 이야기를 하면은 이렇게도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 직전에 정신을 바짝 차리면 우리가 악처에 떨어질 그런 상황임에도 선처로 바꿀 수 있는 그런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좋은 일화가 하나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쏘나존자라고 하는 아주 위대한 아라한이 한 분 계셨습니다. 이 분은 수행을 열심히 해서 아라한이 되셨는데 이 분의 아버지가 원래 사냥꾼이었습니다. 사냥꾼으로 사시다가 나이가 들어서 더 이상 사냥을 할 수 없게 되니까. 아들한테 와서 출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출가를 해서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병이 들어서 드러눕게 되고 죽을 상황이 다다르게 되었는데, 그때 이 아버지가 쏘나존자에게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아 아들아. 저기 검은 개가 자꾸 나를 쫓아온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검은 개가 쫓아온다는 것은 일종의 지옥의 표상입니다. 그래서 쏘나존자도 아라한이셨는데 이런 걸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쏘나존자가 아버지가 지금 지옥에 갈 그런 상황이구나 하는 것을 아시고 내가 아라한인 아들이 있는데 어떻게 아버지를 지옥으로 보낼 것인가? 이렇게 생각을 하고 아버지를 위해서 죽음 직전에 선업을 짓게 하기 위해서 아버지를 위해 사미를 시켜서 꽃을 가져오게 하고 부처님 전에 꽃 공양을 올리고 제가 이것을 아버지를 위해서 이렇게 공양을 했습니다. 이렇게 아버지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아버지를 탑 전에 모셔놓고 그렇게 말씀을 드린 거죠. 그러니까 이 아버님이 그런 훌륭한 스님이 자길 위해서 그렇게 해주고 또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렸다는 것에 대해서 큰 기쁨이 일어나서 마지막에 아주 큰 부처님에 대한 신심과 기쁜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결국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임종에 가까이 가서 그동안은 어떻게 보면 그런 지옥의 표상이 나타난 것이 이 분이 사냥꾼으로 살았기 때문에 일생 동안 살생을 많이 저질렀겠지요. 그래서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그런 불선업이 있었는데, 죽음 직전에 아라한인 아들이 아버지에게 도움을 줌으로써 그렇게 큰 선업을 마음속에 아주 기쁜 신심을 가지고 죽을 수 있도록 해준 거죠.

 

그래서 임종에 가까이 가서 그런 선업을 지었고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니까 마지막에 이 쏘나존자의 아버지가 쏘나존자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들아 아들아 저기 너의 새어머니가 온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새어머니라고 한 것은 일종의 천상의 천녀가 눈에 보인 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쏘나존자의 아버지는 원래 표상대로 했으면 지옥에 떨어질 상황이었는데, 쏘나존자라고 하는 아라한인 아들의 도움으로써 표상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죽음 직전에 임종 가까이 가서 이런 큰 선업을 지었기 때문에 태어날 곳이 바뀌어서 죽음 직전에 임종 가까이 가서 지은 업 때문에 천상계에 태어나는 그런 과보를 받게 된 일화가 있습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알 수 있듯이 죽음 직전에 우리가 죽음에 가까이 가서 짓는 업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알 수 있고요. 죽음 직전에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비록 악처에 태어날 그런 가능성이 있다 하더라고 죽음 직전에 만약에 죽음에 임박해서 정신을 놓지 않고 정신을 차린다면 그 선처로 바꿀 수 있는 그런 가능성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시고 특히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나 주위에 부모님이나 친척들이 연세가 많아서 돌아가실 때가 가까이 되신 분들은 그런 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이런 선업을, 좋은 선업을 지을 수 있도록 옆에서 도와주신다면 그분들에게 그것이 가장 큰 효도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다음으로 임종 가까이 지은 업 다음으로 결과를 생산하는 것은 습관적인 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일생동안 습관적으로 우리가 보시를 행하거나 남에게 자원봉사를 하거나 이런 분들은 이런 임종 가까이 가서 그렇게 문제가 되지, 임종 가까이 지은 업이나 무거운 업이 특별히 없는 경우는 습관적으로 지은 업이 주로 작용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보통 보면 살면서 일생동안 그냥 선행을 많이 하고 사는 사람은 거의 선처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나쁜 짓만 일삼은 사람들은 악처에 태어나는 것이 기본적인 순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