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0)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제 1654회] 상대의 이야기에 위안 삼는 게 위험한 일인가요?

Buddhastudy 2020. 11. 19. 19:09

 

 

제가 예전에 상담을 공부하던 시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상대의 이야기를 듣고 위안을 삼는 것은 상대와 본인 모두에게

위험한 방법이라고 하시면서 저에게 실망을 하시는 듯한 반응을 보이셨습니다

수행자로서 상대적으로 다행이라고 위안 삼는 게 위험한 일인지 궁금합니다//

 

 

일시적으로 도움이 돼요.

일시적으로.

 

그러니까 스님이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이고, 오늘도 살았네이렇게 출발해라.

 

이게 이 세상에서 절대적 비교에요. 생존의 비교.

좀 남보다 못하다 낫다가 아니라

살았다는 것만 해도 나는 만족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세상에 고민할 게 하나도 없어져요.

 

욕을 얻어먹어도 살았으니까 얻어먹는 거고

한 대 맞아도 살았으니까 맞는 거고

병이 걸려도 살았으니까 병이 드는 거 아니오.

죽었으면 병들 일도 없고, 욕 얻을 일도 없고, 굶을 일도 없어요.

 

이렇게 딱 관점을 잡아버리면 고뇌가 사라져 버린다.

이런 얘기에요.

 

그런데 제가 얘기하잖아요.

우리들의 이 즐겁고 괴로운 거는 상대적이다.

 

예를 들어서 버스를 타고가다가 버스가 넘어졌다.

그런데 내 팔이 부러졌어.

그래서 아하고 팔을 쥐고 주위를 싹 둘러보니 다 죽었어.

나만 살았어.

그러면 어떻게 해요?

아이고 부처님 가피력이다. 다행이다.”이렇게 생각을 한단 말이오.

 

그런데 버스가 넘어졌는데, 내 팔이 버러졌어.

주위를 돌아보니 아무도 안 다치고 내 팔만 부러졌어.

그러면 뭐라고 그런다?

재수없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들의 재수좋고, 재수 없는 거는

그게 객관적인 게 아니라는 거에요.

주변하고 비교해서 일어나는 거다.

 

그러니 재수좋고 재수없는 거는 믿을만한 게 못되는 거다.

그러니까 뭐와 비교하느냐에 따라 팔부러진 건 똑같은데

이걸 가지고 어떤 경우에는 다행이다, 부처님의 가피다 그러고

어떤 경우에는 재수없다, 나만 벌받았다, 이렇게 생각한다는 거요.

팔하나 부러진 것 밖에 아닌데.

 

그러니까 이게 중생이라는 거요.

이게 중생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교수님은 아마 이런식으로 위안을 받는 거는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지 않겠느냐해서 문제제기를 한 것 같은데

그러면 뭐 그 교수님은 다른 특별한 방법이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런 이치를 알아서

어떤 상황일 벌어졌으면 그냥 상황이 벌어진 것 뿐이지

그걸 갖고 재수 있느니 없느니 하지 마라.

좋다 나빧, 옳다 그르다 하지 마라. 이렇게 가르치는 거요.

 

팔이 부러졌으면 부처님의 가피다도 하지말고

팔이 부러졌으면 부처님 안 믿어서 벌받았다. 이런 생각은 하지 마라.

이건 생각일 뿐이라는 거요.

상대적ㅇ로 낸 생각일 뿐이다.

팔이 부러졌으면 어떻게 해라?

그냥 팔을 고치러 가야 된다. 병원으로.

 

마음이 여여하다.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다.

넘어졌으면 그냥 넘어진 거고 그럼 일어나면 되고

팔이 부러졌으면 부러진 거고, 그럼 병원에 가서 치료받으면 된다.

이거를 재수가 좋으니, 재수가 나쁘니 하지 마라.

 

그래서 마음이 이런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마음이 좋으니 싫으니 해서 진폭, 널뛰기 하지 말고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해라,

이렇게 가르치는 거요.

 

그럼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못할 상황이면

두 번째, 차선책은 뭐냐?

재수없다고 하는 것보다는 뭐가 더 낫다?

재수 있다고 말하는 게 더 낫다.

 

어차피 마음을 일으킬 바에야,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제일이고 이게 최선이고

마음을 일으킬 바에야 재수 있다고 가피를 입었다고 마음을 내는 게 낫다.

, 대웅전에 3배하고 계단을 내려가다가 다리를 다쳤다.

 

그랬을 때 다친 다리를 잡고

부처님께 기도해도 소용이 없네이러면

자기에게 재앙이 생긴 거고 부처님도 원망하는 게 된다, 이거야.

 

그럴 때, 이왕지 마음을.

그러니까 그건 부처님에게 절하는 거 하고 계단 내려오는 거 하고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냥 다쳤으면 다친 거로 가서 치료하면 되는데

마음을 일으키려면 어떻게 일으켜야 하느냐?

안 부러진 다리를 잡고

아이고 기도라도 했더니 한 다리만 부러지고 한 다리는 안 부러졌네, 다행이다

이렇게 일으키는 게 낫다는 거요.

일으키려면.

 

그러니까 이렇게 일으키는 걸 긍정적이라고 그래.

재수없다. 이렇게 일으키는 거는 부정적이다.

그래서 이 긍정적으로 일으키는 건 나쁜 거 아니예요.

 

상담심리사가 어떤 이유로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진리의 길은 아니다.

진리의 길은 이것을 좋고 나쁘게 보지 않는 것이 진리의 길이고

그다음에 중생의 길 중에

어차피 한 생각을 일으켰으면 긍정적으로 일으켜라.

그것이 본인에게 유리하다.

이왕지 일으키려고 한다면.

 

그런 관점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목표는 이런 것에 마음의 평정심을 잃지 않는

평정심을 유지하는 게 수행의 목표이고

그런데 평정심을 잃었었다면 재빨리

긍정정적으로 돌리는 게 낫다.

 

그런데 우리 대부분은 마음이 80 90%가 부정적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어요.

우리 이 까르마가.

사화문화가 부정적으로 돌아가도록 되어 있어.

왜냐하면 우리가 부모세대가 사회전체가 어떤 일이생기면

늘 부정적으로 보는 쪽으로 어릴때부터 보고듣고 훈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거를 긍정적으로 돌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그러니까 꿈은 안 꾸는 게 제일 좋아.

그런데 이왕지 꿀바에야 악몽꾸는 거 보다는 뭐가 낫다?

좋은 꿈 꾸는 게 낫다.

 

그러나 이 수행적 관점에서는 그것이 설령 좋은 꿈이라 하더라도 안 꾸는 것보다는 못하다.

이렇게 보는 거요.

설령 그게 좋은일이라 하더라도.

 

그래서 세상에는 천당과 지옥, 천상과 지옥이 있다면

부처님은 천상과 지옥을 벗어난 해탈의 길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거요.

 

이 세상은 천상과 지옥을 돌고 도는 윤회의 세계이고

우리가 추구하는 수행의 그거는 지옥 안가고 천상갔다고 좋아할 게 아니라

그것도 불안정한 세계다.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

이런 관점이예요.

 

이해가 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