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일묵스님_윤회와죽음

16. 일묵스님_윤회와 행복한 죽음//5월 18일 방송

Buddhastudy 2012. 7. 29. 20:21

  출처: 유나방송

 

안녕하세요. ~ 지난 시간에는 팔정도 중에 두 번째 두 가지인 정견과 정사유에 대해서 말씀드렸는데요. 이번 시간에는 나머지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팔정도의 세 번째는 정어, 네 번째는 정업, 그리고 다섯 번째는 정명이라고 합니다. 번역을 하면은 바른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이렇게 말할 수 있는데요. 이 세 가지를 우리가 계율수행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세 가지는 수행자가 수행 중에 반드시 지켜야 될 규범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계율 닦는 수행이다.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 첫 번째인 정어는 거짓말, 그리고 거친 말, 그리고 쓸데없는 말, 그리고 서로 이간질시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을 바른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바른 행위는 살생_ 그러니까 살아있는 생명체를 죽이거나 도둑질_ 남의 주지 않는 것을 가져가거나, 사음_ 부도덕한 성행위를 하거나 이런 것들을 하지 않는 것을 바른 행위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바른 생계는 쉽게 말해서 생계_ 먹고 사는 걸 이야기하죠. 직업이나 먹고 살기 위해서 어떤 직업을 가지더라도, 그것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직업은 가지지 마라. 남을 도탄에 빠지고, 남을 고통스럽게 하면서, 자기만 행복하고자 하는 그런 방법으로 삶을 유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예를 들면 무기를 판다거나, 또는 인신매매를 한다거나, 또는 도살업, 그리고 독약, 뭐 등등의 마약, 이런 것들을 팔아서 자기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을 피폐하게 하고 망치게 하면서 자기만 잘 먹고 잘살겠다는 이런 행위이기 때문에. 이런 것은 삿된 생계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삿된 생계를 하지 않는 것을 바른 생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바른말, 바른 행위, 그리고 바른 생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수행을 하기 위해서 기본 바탕이 되는, 마치 건물을 지을 때 토대와 같은, 그런 것을 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건물을 지을 때도 토대가 튼튼하지 않으면 건물을 높이 지을 수도 없고, 건물이 금방 무너지듯이 이 수행을 하는데 있어서도 이런 세 가지 계율이 엄격하지 않고 철저하지 않으면 수행을 할 때 항상 문제가 생기고, 수행이 깊어지기가 힘들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계율 수행은 모든 수행의 기본이다. 베이스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여기서 팔정도에서 직접적으로 언급돼 있지 않지만, 계율에 대해서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을 드린다면은요, 이 계율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선업이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가 마음을 잘 가다듬고, 잘 단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계율 이런 항목을 이야기하기 전에 계율의 좀 더 근원적인 의미는 감각기관의 단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눈을 보고 귀로 듣는 이런 감각기관들을 너무 함부로 열어놓게 되면 온갖 형태의 번뇌가 일어나기 쉽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을 잘 단속해서 불선업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어떤 의미에선 계율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치 문단속을 잘하는 것에 비유를 할 수 있는데요. 우리가 문단속을 잘못하게 되면 도둑이 들어와서 집안에 있는 물건을 다 훔쳐가게 될 겁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마음의 문을 잘 단속하지 못한다면, 온갖 형태의 번뇌가 들어와서 우리 마음을 휘젓고 다니게 될 겁니다. 그래서 이 알아차림. 또는 마음 챙김. 삿띠를 잘 높여서 항상 깨어있는 정신으로 우리 마음의 번뇌가 들어오지 않도록 잘 단속하는 것이 계율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좀 더 정확한 의미의 계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계율을 잘 지킴으로서 우리에게 오는 이익은 뭐냐? 이런 계율을 잘 지킴으로서 첫 번째 오는 이익은 후회가 없어지는 겁니다. 우리가 삶을 살면서 항상 뭔가 해야 될 일을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될 일을 했을 경우에, 항상 후회가 뒤따릅니다. 그렇지만 계율을 잘 지킴으로써 후회 없이 삶을 살 수 있는 그런 이익이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또 계율을 잘 지키게 되면 재물이 모입니다. 보통 재물을 지키지 못하는 경우는 바르지 못한 행위, 술을 마신다거나, 삿된 음행을 한다거나, 이런 도둑질을 한다거나, 이런 등등의 일로 인해서 재물을 잃게 되는데.

 

술을 마시지 않고 바른 생활을 함으로써 재물이 모이게 되고, 또 그로 인해서 훌륭한 명성을 얻게 됩니다. 계율 중에 한가지인 거짓말만 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에게 진정한 신뢰를 얻게 되고, 이로 인해서 아주 큰 명성을 얻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어는 좌중에 가더라도 어떤 사람이 모임에 가더라도 두려움이나 창피함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당당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살아온 삶이 당당하기 때문에 어디 가도 두렵거나 창피하거나 부끄럽지 않은 그런 삶을 살 수가 있고요. 또 죽어서는 선처에 태어나는 과보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행복한 죽음을 맞이할 수가 있겠죠. 선처에 태어나는 그런 과보가 있고요.

 

또 죽을 때 **진다. 다시 말하면 정신없이 죽지 않고, 정신을 바짝 차려진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해서 다음 생에 선처에 태어나게 되는 그런 훌륭한 과보가 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바로 계율을 지키는 큰 이익이고요. 더 중요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계율을 잘 지킴으로서 우리 마음을 잘 단속해서 우리마음에서 불선업이 일어나지 않도록 도와주는 그 역할이 가장 중요한 역할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 팔정도에서는 보시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팔정도는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수행이기 때문에 보시라고 하는 것이 직접적으로 깨달음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언급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이 보시라고 하는 것이 불교수행에 있어서 아주 좋은 토대를 이루기 때문에, 기초수행으로써 직접적인 수행은 아니지만, 기초로서 계율을 언급할 때 항상 보시와 계율. 이 두 가지를 항상 함께 언급합니다. 실제로 부처님께서는 처음 재가자를 위해서 법문을 하실 때는 보통 바로 사성제나 이런 팔정도 법문을 하신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보시, 또 계율 지키는 것.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주로 법문을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보시를 잘 행하면 복을 받게 되고, 또 계율을 잘 지키면 복을 받아서 다음 생에 선처에 태어난다. 다시 말하면 인간계나 천상계에 태어나서 많은 복락을 누리게 된다.

 

이렇게 설법을 하심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현실에서 자기 욕심을 적게 하고 성냄을 적게 해서, 선업을 많이 짓도록 하는 그런 방편으로 보시와 계율 수행을 많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지혜가 성숙하게 되면 그때 다시 사마타위파사나, 다시 말하면 수행이라고 하는 것을 지도하셔서 결국에는 깨달음을 얻게 하는 그런 방편. 그래서 이런 것을 次第說法차제설법이라고 하는데요. 그래서 팔정도에는 계율만이 언급돼 있지만, 실제로는 보시행에 대한 중요성도 부처님께서 많이 강조를 하셨기 때문에, 여기서 계율을 설명 드리면서 덧붙여서 보시에 대해서 조금 더 부연설명을 드릴까 합니다.

     

보시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정당하게 얻은 물건이나 기타 등등의 것을 남에게 아낌없이 주는 것을 보시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이런 보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일단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그 세 가지 조건이 뭐냐 하며는 일단 보시자가 보시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어야 됩니다. 보시할 의도가 없는 것은 보시가 이루어질 수가 없겠죠. 두 번째는 보시 받을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대상이 있어야 된다는 거죠. 그리고 내가 보시를 할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보시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첫 번째 보시자의 의도가 있어야 되고, 두 번째 보시 받을 존재가 있어야 되고. 세 번째는 보시할 물건이나 그 무엇인가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 가지 조건이 구비가 되면 보시행위가 이루어지는데, 이 보시는 여러 가지 종류의 보시가 가능합니다. 첫 번째 자신의 재물을 보시하는 재물보시가 있고요. 두 번째, 자신의 노력을 보시는 노력보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세 번째는 내가 얻은 것을 회향하는, 예를 들자면 앞에서 제가 설명을 드렸듯이, 부처님과 승단의 보시를 한 다음에 오늘 내가 얻은 이 공덕이 나의 먼 친척이었던 아귀중생에게 회향 되기를.’ 이렇게 회향을 해주는 보시도 있습니다. 회향을 해줌으로써 그 아귀가 그 공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회향해주는 보시도 하나의 보시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남이 뭔가 일이 잘됐을 때, 남의 성공을 함께 기뻐해 주는 것도 역시 좋은 보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는 보면 사촌이 논 사면 배가 아프다.’ 이런 속담이 있는데요, 그 실제로 우리가 불자들은 남이 잘되는 것을 질투하지 말고, 항상 남이 잘될 때 함께 기뻐해 주는 그런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미얀마에서는 남들이 잘 됐을 때 항상 사~. ~. ~.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 ~. ~. 라는 말은 사두라는 말은 좋다. 영어로 말하면 굿. 베리 굿. 이런 뜻입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걸 선제. 좋다. 아주 훌륭하다.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선한 행위를 한 것을 보고 아~ 정말 훌륭하다. 잘했다. 훌륭합니다. 이런 등등의 표현을 하는 것이 바로 사두~ 사두~ 사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남이 뭔가 잘한 것을 보고 좋은 일을 행했을 때는 함께 항상 사~. ~. ~. 이렇게 해주는 것이 이 자체가 남에게도 좋지만 자기 자신에게도 보시를 행하는 그런 공덕이 된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에 자기 몸을 보시하는 게 있습니다. 이것은 몸의 일부를 보시하는 경우가 있고, 두 번째는 자기 생명을 보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요즘 자기 부모님을 위해서 자기의 심장을 하나 떼 주는 그런 자식의 이야기도 간혹 있습니다. 그런 것이 일종의 자기 몸의 일부를 보시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오래전에 일본에서 어떤 우리 한국유학생이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린 그런 예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타인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보시하는 경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보시의 아주 대표적인 형태. 종류들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시라는 것이 단순히 재물만 가지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요. 이런 다양한 자기 몸의 노력봉사. 쉽게 말하면 자원봉사죠. 이런 봉사를 통해서도 이루어질 수도 있고, 다양하게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보시 중에서 가장 수승하다고 하는 보시가 바로 법 보시입니다. 여러분들이 진리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진리를 꿰뚫어 알아서 그것을 타인에게 전해주는 다른 사람에게 법을 전해주는 공덕은 다른 어떤 보시보다 수승하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저희같이 출가한 스님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열심히 수행해서 그 수행을 통해서 얻어진 많은 것들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는 공유하는 그것이 바로 법보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출가자들은 해야 될 의무 중의 하나가 우리가 수행한 것을 시주자들에게 내가 수행한 것만큼 법을 전해줘야 될 그런 의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수다원이 된다면 다른 사람들이 수다원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것이 하나의 의무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만약에 아라한이 된다면 다른 존재들도 아라한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 이것도 수행자의 큰 의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것이 가장 의미 있는 법보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보시의 종류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알아봤는데요. 그러면 어떻게 보시를 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여기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보시를 하는 사람은 보시를 할 때 일단 자기 마음이 청정하고 순수한 것이 좋습니다. 내 마음이 때가 묻어진 상태로 보시를 하는 것은 보시 공덕이 그만큼 감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시자는 일단, 계를 잘 지키고, 마음을 청정히 해서 공양물은 정당하게 얻은 것이어야 합니다. 남에게 훔친 물건을 보시한다거나 이런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노력에 의해서 정당하게 얻은 것을 보시하는 것이 좋고요.

 

또 보시자는 인과를 믿는 것이 좋습니다. 이거는 인과를 믿고 보시를 하는 것이 보시 공덕을 더 크게 할 수 있습니다. 인과를 믿지 않는다는 것은 지혜 없이 보시를 하는 것이 되어서요. 이런 것은 보시하는 것에 비해서 큰 과보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시하는 자의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해야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많이 이야기하는 무주상보시. 이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내가 이 보시를 통해서 내가 이만큼 보시를 했으니까 나한테 이만한 복이 돌아와야 된다. 이렇게 집착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요, 그것은 여러분들이 집착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지은 공덕은 반드시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항상 보시를 할 때는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보시를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보시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한 거고요. 그러면 보시 받는 사람에 따라서 또 보시 종류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크게 나누면 개인에게 하는 보시. 그리고 상가에 하는 보시. 이렇게 두 가지 형태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마찌마 니까야라는 경전에 보면 개인에게 하는 보시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요. 그중에서 예를 들어서 지나가는 개. 그러니까 일반적인 축생이나 개에게 보시를 하는 것도 우리가 밥 한 그릇을 보시를 한다면 백배의 과보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반인들에게 보시를 하는 공덕은 천 배의 과보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선정에 든 사람, 삼매를 얻은 사람에게 보시를 하는 공덕은 천억 배에 가까운 보시를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탐___를 일부 소멸한 존재. 다시 말하면 성자, 수다원이나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에게 보시를 하는 공덕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무량한, 셀 수 없는 공덕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반인들에게 범부에게 보시를 하는 공덕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성자에게 보시하는 공덕은 셀 수 없는 공덕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성자 중에서도 가장 큰 복을 얻을 수 있는 분이 바로 부처님이겠죠.

 

부처님 다음으로 수승한 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상수제자. 그다음은 대제자. 그리고 아라한, 그다음에 아나함, 사다함, 수다원. 이런 순서에 의해서 성자들에게 보시하는 공덕에 차이가 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개인에게 하는, 비록 성자에게 하는 공덕이라 할지라도 이런 개인에게 하는 모든 공덕을 뛰어넘는 것이 바로 상가에 하는 보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상가라고 하는 것은 상가에 포함된, 부처님이 계시는 상가에 만약에 보시를 한다고 한다면 부처님께도 보시를 하는 것도 되고, 또 부처님을 포함해서 모든 스님들에게 보시를 하는 것이기 되기 때문에, 이런 보시공덕이 개인에게 하는 어떤 보시보다 더 크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후대에 계를 잘 안 지키고, 좀 계율이 약간 흐트러진 그런 시대라 할지라도, 상가 전체에 보시하는 공덕은 개인에게 하는, 부처님께 보시하는 공덕보다도 더 수승하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거는 승가가 있음으로써 이 불법이 유지가 되고, 또 그 불법이 오래갈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개인에게 하는 어떤 보시보다 상가에 하는 보시가 더 수승하다.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상을 좀 종합을 해보면, 이 보시를 할 때 가장 무량한, 그러니까 복이 무량하게 받을 수 있는 그런 보시는 어떤 보시를 행해야 그런 보시가 가능한가? 여기에 대해서 설명을 드려본다면, 가장 좋은 보시는 앞에서 제가 설명을 드렸듯이 보시하는 자의 마음은 일단 순수하고 깨끗한 것이 좋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시를 하기 전이나, 보시를 하는 중이나, 보시를 하고 난 후나, 언제나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보시를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보시를 하기 전에 인색한 마음을 내거나, 보시를 하고 나서 인색한 마음을 내거나, 보시를 하는 중에 아깝다는 마음을 낸다면, 우리가 보시를 하는 행위는 선한 행위입니다. 그렇지만 보시를 하는 앞뒤로 불선한 마음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가 보시를 하는 공덕이 훨씬 적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보시를 하는 동안에나, 보시를 하고 난 전후나, 언제나 항상 기쁜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보시를 행해야 이 업들이 보시를 하는 행위의 선업을 주위를 둘러싼 업이 같이 선업이 되어서, 보시를 하는 행위의 선업을 보시를 둘러싸고 있는 전후의 선업이 도와주기 때문에 이 선업이 더욱 증푹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시를 하는 사람은 보시를 하기 전이나, 보시를 하는 중이나, 보시를 하고 난 후나, 항상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보시를 하는 것이 중요하고요. 보시를 받는 사람은 첫째 탐욕을 없앴거나, 없애는 중인 사람이면 가장 좋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성냄을 없앴거나 성냄을 없애는 중인 사람, 세 번째 어리석음을 없앴거나 어리석음을 없애는 중인 사람이 보시를 받는 사람으로서는 가장 좋은 대상입니다. 그래서 보시를 하는 사람은 보시하기 전이나 보시하는 중이나 보시한 후나 기쁜 마음으로 보시를 하는 것이 좋고요. 보시를 받는 대상은 탐욕을 없앴거나 없애는 중이거나. 성냄을 없앴거나 없애는 중이거나, 어리석음을 없앴거나 없애는 중이거나. 이 여섯 가지 조건이 모두 갖추어진다면 이런 보시는 무량한 공덕이 있는 보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이런 보시를 만약에 여러분들이 행한다면은 세세생생 큰 복락을 큰 공덕을 짓게 되는 거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면 이런 보시를 행함으로써 얻어지는 이익은 뭔가? 이런 보시를 많이 행함으로써 우리는 복덕이 생긴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전생에 우리가 지은 복, 또는 이생에 지은 복, 선업에 의해서 다음 생에 부잣집에 태어난다거나 선처에 태어나서 아주 큰 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 이런 것이 보시의 공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보시행을 많이 하지 않은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항상 찢어지게 가난하게 태어난다거나, 못생긴 얼굴로 태어난다거나, 여러 가지 괴로움을 유발하는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나게 될 것이고요.

 

일단 복을 많이 지은 사람은 첫째 태어날 때 선처에 태어납니다. 선처에 태어나서도 좋은 부모님을 만난다거나, 큰 부잣집에 태어난다거나, 또는 머리가 좋게 태어난다거나. 이런 등등의 큰 복을 누리게 되는 거겠죠.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덕이 생긴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본인이 많이 보시를 하는 경우는 복이 생긴다고 이야기를 하고요. 타인에게 보시를 많이 권선을 한 사람, 보시하기를 권유한 사람에게는 덕이 많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래서 주위에 따르는 사람이 많고, 좋은 인연들이 많이 생기다고 이야기를 하죠. 그래서 보시를 많이 한 사람에게는 첫째 복과 덕이 생긴다. 이것이 가장 큰 이익이고요.

 

또 보시라는 것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탐욕과 성냄을 버린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정당하게 얻은 물건을 남에게 줌으로써 내가 가진 탐욕을 적게 하고, 또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베풂으로써 성냄도 적게 하는, 이런 것이 어떻게 보면 보시의 가장 큰 공덕이 아닌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보시라는 것은 계율 수행과 더불어서 진정한 수행, 다시 말하면 사마타 위파사나, 선정과 지혜수행을 하는 데 있어서 베이스가 되는, 아주 밑바탕에 있는 그런 수행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제가 말씀드렸듯이 이런 보시나 계율 수행을 함에 있어서도 항상 지혜롭게 해야 됩니다.

 

바른 지혜와 바른 사유.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를 통해서 보시행을 하고 계율을 잘 지켰을 때 그것이 진정으로 큰 이익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혜롭지 못하게 또는 어리석게 이런 보시행이나 지혜를 닦는다면 아까 말씀드렸듯이 똑같은 보시행을 하고서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보시를 하면서도 아까워하고, 보시하는 중에서도 아까워하고, 보시하고 나서 괜히 했다고 투덜거리고. 이렇게 하면 자기가 보시했던 그 공덕을 다 까먹게 됩니다. 이런 걸 열등한 보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지혜롭게 보시행을 한다면 보시하기 전이나 후나 또 보시하고 나서도 기쁜 마음으로 하게 되고 보시하는 대상을 어떤 대상이 하는 것이 더 큰 복이 있다는 것을 지혜롭게 알 수 있게 되겠죠.

 

그래서 어떤 수행을 하든 간에 지혜롭게 수행을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보시를 행하거나 계율을 지킬 때도 지혜롭게 수행을 해야 된다. 이런 보시와 지계를 닦아야 된다. 이런 것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선정과 지혜수행이다. 어떻게 보면 불교에서 보시와 지계는 보시와 계율을 닦는 것은 어떤 베이스, 다시 말하면 기본 수행, 토대수행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직접적인 수행. 그러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선정과 지혜수행을 바로 수행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사마타, 사마타는 선정수행을 이야기를 하고요. 위파사나는 지혜수행을 이야기를 합니다. 그래서 사마타와 위파사나가 직접적으로 깨달음이 일어나게 하는데,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그런 수행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수행에서는 사마타와 위파사나가 간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수행이다. 이 두 가지 수행을 통하지 않고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선정수행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