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정목스님_유나방송

[유나방송] 고요한소리_ 3장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가3)

Buddhastudy 2020. 12. 8. 19:56

 

 

 

고요한 소리

이 시간에는 고요한 소리에서 펴는 법륜시리즈 13번째 책인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가>

 

재생에 대한 아비담마적 해석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책을 읽어드리겠습니다.

 

--

3장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윤회생사를 잘 이해하기 위해 검토되어야 할 또 하나의 기본 법칙 혹은 원칙은

작용과 반작용, 또는 행위와 반응의 법칙이다.

 

이 법칙의 기본 가설은

모든 작용에는 어떤 결과나 반작용이 따라오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행위로부터 결과가 나온다는 이 원칙은

그것이 자연에 의한 작용이든 사람이 행한 행위든 모든 영역에 다 적용된다.

이는 보편적 법칙이므로 물리세계와 정신세계에 똑같이 적용된다.

 

이 법칙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

즉 인과의 법칙이라 한다.

 

이 법칙이 인간의 행위와 관련될 때는 업의 법칙으로 불리면

여기에서 우리가 고찰하는 것도 그런 의미에서이다.

 

업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행위를 뜻한다.

그러나 통상적으로는 행위의 결과를 가리킬 때 사용하기도 하는데

행위의 결과를 가리키는 경우 좀 더 정확한 표현은 업이숙, 업의 과 혹은 업보이다.

 

사람이 행한 행위의 결과를 지배하는 것이 업의 법칙이다.

즉 어떤 행위와 그 결과 간에 작용하는 원칙은 다음과 같은 말로 표현된다.

씨 뿌린 대로 열매를 거둔다.”

 

업의 법칙에 따라

좋은 행위는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고

나쁜 행위는 반드시 나쁜 결과를 낳게 되어 있다.

 

그 작용 원리는 완벽한 정의라 하겠으니

업이란 그야말로 엄격한 회계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자기의 행위에 대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응분의 대가를 받는다.

 

만약 업이 그렇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작용한다면

왜 착한 행위를 한 어떤 사람은 마땅히 거둬야 할 좋은 결과를 거두지 못하고 죽고

나쁜 행위를 한 어떤 사람은 그 악행에 대한 응분의 고통을 받지 않고 잘 살다 가는가

하는 질문이 당연히 나옴 직하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업의 법칙의 타당성을 믿으려 들지 않을 것이다.

인생살이 속에는 이와 유사한, 설명을 필요로 하는 변칙 상황들이 많다.

 

이 세상 사람들 사이에 기쁨이나 슬픔, 부나 가난, 건강이나 질병 따위가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도 그 일부이다.

이러한 상황들이 변칙으로 보이는 것은

그 법칙적용의 시간대가 이번 한 생()이라는 좁은 범위에 제한돼 있다고 생각했을 때뿐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전생과 내생을 가정한다면

이런 모든 상황은 완벽하게 설명이 된다.

 

전생의 행위는 금생에 결과를 낳고

마찬가지로 금생의 행위는 내생에서 결과를 낳을 수 있으니까.

이로써 금생에 사람들이 겪는 모든 불평등이 설명된다.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행위는 바로 그 자신의 것이다.

행위는 즉 업은 자신의 상속물이다.

행위는 자신의 근원이다.

행위는 자신의 일가요 친척이다.

행위는 자신의 버팀목이다.

행위는 존재를 나눈다.

비천한 존재와 우월한 존재로 나눈다.

 

행위의 결과가 현실화되는 시기에 대해서는

모든 영역의 행위 전반에 걸쳐

어떤 결과는 즉각적으로

어떤 결과는 지연되어 나타난다는 것이 일반론이다.

 

결과가 항상 그 원인 작용이 일어났던 순서대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외적 요인들이 생겨나 그 순서를 교란시킨다.

 

인간 행위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업의 과가 현실화함에 있어

먼저 온 손님부터 먼저 대접한다는 원칙이 반드시 지켜지지 않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업의 법칙은 참으로 여러 방면으로 작용하고 또 업의 다양성도 너무나 큰 만큼

업의 전개과정 역시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을 다 설명할 길은 없으므로 여기서는 요점만 간추려보기로 한다.

 

업의 법칙에 의해 하나의 행위 뒤에는 그 과보가 따라온다고 일반적으로 생각하지만

다른 원인적 요소들도 끼어들 수 있으므로

이들이 뒤섞여 결과를 빚어내는 경우가 많다.

 

하나의 원인이 오로지 하나의 결과를 낳을 수는 없고

더욱이 하나의 원인이 다수의 결과를 낳을 수도 없으며

다수의 원인이 단지 하나의 결과만을 산출할 수도 없다.

 

복합적 원인들과 복합적 결과들에 관한 이 이론에 대해서 청정도론 17장에 이렇게 언급되어 있다.

하나의 결과든 혹은 여러 결과든 오직 하나의 원인으로부터 나올 수는 없고

여러 원인에서 오직 하나의 결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결과를 낳기까지는 여러 원인이 결합해야 한다.

이렇게 결합된 원인들의 일부는 그 결과를 강화 촉진시킬 수도 있고

일부는 그 결과를 방해하고 늦출 수도 있으며

다른 일부는 결과를 완전히 무효로 만들 수도 있다.

 

대립하는 업들이 상호작용할 때

때로는 업 간의 상쇄한 나머지에 따라서 업의 성격이 결정될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우세한 업이 전면에 드러날 수도 있다.

업의 우세한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가루까 깜마(Garuka-kamma: 무거운 업)

2. 아싼나 깜마(Āsanna-kamma: 죽음직전에 짓는 업, 마지막 업)

3. 아찐나 깜마(Āciṇṇa-kamma: 습관적인 업)

4. 까땃따 깜마(Kaṭattā-kamma: 유보된 잡다한 업)

여기서 마지막 것은 그 앞의 어떤 분류에도 속하지 않는 업을 말한다.

 

사람이 다시 태어난다는 가정이 성립할 때만

비로소, 인생의 모든 변칙적 상황이나 불공평이 설명될 수 있다.

 

재생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들 비정상적 사태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려 해왔다.

 

그런 시도들은 논리적으로 분석해 볼 때

말이 되지 않거나 아니면 재생 이론보다 훨씬 더 받아들이기 어려운 가정에 기초를 두고 있다.

 

재생 이론은

유한한 인간의 마음이

삶에서 겪는 갖가지 불공평과 변칙 상황으로 비치는 문제들을 설명하기 위해 찾아낸

가장 합리적이고 정당한 가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