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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상스님의 목탁소리] 신심명 강의 25강(진여법계 무타무자) - 하나님, 한마음, 일불승, 하나의 진실 뿐!

Buddhastudy 2020. 12. 14. 19:40

 

 

 

다음 게송을 보면

참되고 여여한 진여법계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다.

진여법계 무타무자

 

참되고 여여한 진여법계라는 표현을 썼네요.

자성 불성 본래면목 열반 해탈 뭐라고 써도 상관없습니다.

참되고 여여한 진여법계라고 해도 상관없고요

 

진여법계 무타무자라고해서

진여법계에는 남도 없고 나도 없다.

 

아까 제가 꿈의 비유를 들었죠.

꿈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남들이 있었잖아요.

꿈속에는 너도 있고 나도 있고 수많은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그 등장인물들이 남입니까?

의식 속에서 일어나는 환상이잖아요.

 

내 의식 속에서

내 하나의 의식이 꿈이라는 것을 만들어내서

꿈속에 너도 만들고 나도 만들고 둘을 만든 거잖아요.

둘로 쪼개서 만들어낸 것 뿐입니다.

 

꿈을 깨고 나면

, 둘이 아니었구나.”

적도 나였고, 아군도 나였고, 너도 나였고, 나도 나였고

자타가 불이하잖아요. 자타불이.

너와 내가 둘이 아니었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이죠.

이 중생의 세계라는 이 꿈을 깨기 시작하면

둘로 쪼개진다라는 너가 있고 내가 있다라는 이 어리석은 망상심

이것이 깨어나기 시작하면

중생의 무명이라는 꿈에서 깨어나게 되면 자타가 둘이 아니다.

남도 없고 나도 없다.

타도 없고 자도 없다.

타인도 없고 자기도 없다.

 

이 삼라만상, 이 우주에는 모든 존재가 전부다 내가 꾸는 하나의 꿈이었구나.

저 사람이 꾸는 하나의 꿈이든 내가 꾸는 하나의 꿈이든

부처가 꾸는 하나의 꿈이든

그게 다 둘이 아니니까 다 하나의 꿈일 뿐이란 말이죠.

하나의 꿈. 하나의 부처. 일불승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의 부처 따로 있고, 저의 부처가 따로 있고,

미국 사람의 부처가 따로 있고, 강아지 고양이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이 우주에는 하나의 부처밖에 없다는 것이죠.

하나의 부처밖에 없다.

 

하나의 부처가

우리 각자의 연기를 하면서

각자인 것 같은 이런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일 뿐이지.

 

이 소리가 내 귀에서 들린다라고 느끼지만

이것이 지금 여러분 귀에서 듣고 있다고 느끼잖아요.

이 소리가 여러분 개별적으로 각자 귀가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귀가 있지만 이걸 못 들을 수도 있거든요.

내가 딴생각 하느라고 막~~ 집중하고 있을 때 이름을 불러도 못 들어요.

귀가 있는데도 못 들어요.

귀가 듣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깊은 잠에 빠지고 있을 때는 나를 불러도 못 듣습니다.

귀가 듣는 거면 잠에 빠졌을 때도 들어야죠.

눈이 보는 거면 다 볼 수 있어야 하는데

내가 관심있는 것만 보입니다.

관심 없는 건 1년을 그 길을 갔다왔다 해도 안 보여요.

 

내 의식이 집중하는 것만 봅니다.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내 관심사만 취사 간택해서 보기 때문에 그래요.

 

수많은 사람이 있지만 그 사람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나 내 가족이나

이런 몇 사람만 두드러지게 드러나서 보이는 것이지

세상 모두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죠.

 

눈이 있어서 보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내 눈이 보는 거지, 내 눈이 있으니까 보는 거지라고 생각하고

내 귀가 있으니까 내가 듣는 거지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여러분 눈이 보거나 여러분 귀가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부처가 보고 있는 겁니다.

 

허공성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해요.

하나의 부처를, 일불승을.

허공과도 같은.

 

이 허공은 내허공 네 허공이 따로 없잖아요.

하나의 허공이잖아요.

하나의 허공이 배경이 되어서 그 위에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거잖아요.

 

그것처럼 하나의 부처가 지금 이 소리를 듣고 있는 거죠.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가 듣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의 부처가 이 소리를 듣게 한단 말이죠.

 

그런데 이 소리를 하나의 부처가 듣자마자

여러분은 듣자마자 해석해서 내 소리로 바꿔버립니다.

내 생각으로 바꿔버려요.

 

그래서 내 생각으로 이걸 해석해 버립니다.

, 죽비소리야.”

, 목탁소리야.”

, 이건 영희소리이고, 이건 남편소리가 이런 식으로

내가 곧장 듣자마자 해석을 해버려서

곧장 첫 번째 자리에서 곧장 듣는, 그 부처를 확인하지 못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두 번째 화살만 맞는 사람이다. 이런 표현을 써요.

두 번째 자리에 떨어진 사람이다 이런 표현도 쓰고요.

 

제일의제를 깨닫지 못하고 세속제만 이해한다.

세속제가 뭐냐하면 말, 개념, 언어로 된 모든 것을 세속제라고 그래요.

언어나 개념으로 곧장 그 소리를 해석한단 말이죠.

 

야 인마라는 소리나 사랑해 라는 소리나 너 싫어라는 소리나

소리의 파장으론 똑같은 소리예요.

이걸 소리 그 자체로만 받아들이면 이거는 분별할 게 없는 그냥 하나의 소리입니다.

 

싫어하는 소리나, 좋아하는 소리가 그냥 동일한 소리예요.

그냥 소리 파장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어릴 때부터 배워 익힌 습관이 있기 때문에

싫어라는 소리는 인상 찡그리도록 해석하는 걸 자동으로 배워왔고

좋아하는 소리는 기분 좋은 말로서 자동으로 해석하는 게 자동으로 습관적으로 머릿속에 그냥 딱 되어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좋아하는 말과 싫어하는 말을 좋거나 싫은 것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거죠.

그런데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 처음 첫 글자 ㅈ, ㅅ이라는 첫 글자가 나오자마자

그걸 이해하기 전에 이미 알아듣는 놈이 있단 말이죠.

좋다 싫다 해석하기 이전에.

 

그러니까 우리의 오랜 그 습관, 중생의 습관, 해석하는 습관, 그것만 내려놓으면

사실은 본성의 자리에서 있으면

내가 부처가 되면 분별하지 않고 괴로움이 없다라고 하잖아요.

부처님은 괴로움이 없잖아요.

 

남들이 욕을 해도 부처님은 괴로움이 없는 게 왜 괴로움이 없다고 그러겠어요?

우리는 욕을 하면 그 욕 따라가서

저놈이 나쁜 놈이고 저 놈이 나를 욕했고막 해석해서

저놈을 죽일놈이라고 생각하는데

부처님은 그냥 그 하나의 소리파동이라고 이해하는 거죠.

 

물론 좋다 나쁘다라는 개념을 이해는 다 하는데

그래서 거기에 따라서 해석하고 헤아리고 응해주는 건 다 하는데

있으면서 없는 거죠.

 

응무소주 이생기심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겁니다.

집착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겁니다.

 

짜장 먹을래? 짬뽕 먹을래 하면

짜장 아니면 짬뽕 이렇게 얘기는 하지만

짜장을 먹어도 큰 상관없고 짬뽕을 먹어도 큰 상관 없고

안 먹어도 상관없고

크게 분별은 안 하지만, 그러나 분별할 땐 분별을 다 한다.

분별하면서 분별하지 않는다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