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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나방송] 고요한소리_6장 의식단계의 마음과 무의식단계의 마음 (우리는 어떤 과정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가6)

Buddhastudy 2020. 12. 23.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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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단계의 마음과 무의식단계의 마음

지난 장에서 마음은 변화하는 과정임이 앞에서 이미 밝혀졌다.

이 과정은 위티 찟따, 즉 의식단계의 마음과 바왕가 찟따 즉, 무의식 및 잠재의식단계의 마음라는 두 가지의 단계 혹은 흐름으로 나타난다.

 

서구 심리학자들의 가설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은 의식, 잠재의식, 무의식이라는 세 개의 층 혹은 흐름으로 되어 있다.

 

의식의 수준에는 자기가 무엇을 행하고 말하는지 아는 자각이 존재한다.

그보다 깊은 잠재의식 수준에는 의식적 마음을 지나쳐간 생각들이 남긴 모든 인상과 기억들이 감추어져 있다.

이들 인상들 중 상당 부분은 마음대로 되불러낼 수 있다.

또 그들 중 일부는 저절로 의식 속에 다시 떠오르기도 한다.

가장 깊은 수준은 무의식인데 거기에도 의식 수준의 마음을 지나쳐간 생각들의 인상과 생각의 기억들이 감추어져 있으나 결코 원하는 대로 되불러낼 수는 없다.

때때로 그런 인상이나 기억들이 저절로 의식 표면에 다시 나타나는 수가 있고

또 최면술 같은 특별한 방법에 의해 끄집어낼 수는 있다.

 

불교 심리학에서 이들 세 가지 층을 위티 찟따바왕가 찟따의 두 항목으로 나눈다.

의식의 단계는 위티 찟따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나머지 잠재의식과 무의식을 합해서 바왕가 찟따라는 한 이름으로 다루고 있다.

 

잠재의식과 무의식은 별개의 분리된 칸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서구 심리학자들도 잠재의식적 마음과 무의식적 마음은 서로 합쳐지므로 뚜렷한 경계가 없음을 시인한다.

바왕가 찟따위티 찟따즉 의식단계의 마음을 통과한 모든 생각들의 인상과 기억들이 들어있는 숨겨진 저장고이다.

모든 경험과 경향은 그 곳에 저장돼 있으면서 거기로부터 때때로 의식단계의 마음에 영향을 끼치지만 표면의식은 그 영향의 근원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불교의 바왕가 찟따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서구 심리학의 무의식과 유사하나 똑같은 것은 아니다.

바왕가 찟따는 서구식 무의식보다 더 범위가 넓으며, 불교 심리학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은 서로 조건 짓는 관계에 있기 때문에 엄밀히는 동시에 같이 작용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깨어있는 낮 동안 활발한 의식활동과 사물을 알아차리는 상태에 있다. 그 상태에서 우리의 의식은 다섯 감각을 통해 밖으로부터 쉴 새 없이 받아들이는 모든 충격이나 인상을 인식하고

또 한편 관념이나 사고 또는 지나간 생각의 회고를 통해 내면으로부터 받게 되는 인상들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깨어있는 동안의 의식단계의 마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다.

의식이 있다는 것은 바깥에 있는 것이든 안에 있는 것이든 무언가를 의식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안으로부터나 바깥으로부터 항상 인상을 받아들이는 의식단계의 마음이, 예를 들어 잠든 동안과 같이 비활동적인 상태로 침잠하면 다른 종류의 흐름, 즉 수동적인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 과정이 나타난다.

이 무의식단계의 마음을, 모든 의식단계의 생각-과정으로부터 풀려났거나 자유로워졌다는 의미에서 위티뭇따 찟따라고도 부른다.

이 수동적 과정은 의식단계의 마음이 일어나 교란하지 않는 한 잔잔한 개울물처럼 계속 흐르기 시작한다.

흐름에 대한 교란은 다섯 감각 통로 중의 어떤 것을 통하여 수면상태가 방해를 받게 될 때 일어난다.

 

무의식단계의 마음이 나타나는 것은 수면 동안만이 아니다.

사람이 깨어있는 동안도 의식단계의 마음이라는 한 생각이 가라앉고 다음 생각이 일어나기까지의 지극히 짧은 시간 사이에 무의식단계의 마음이 반드시 끼어든다.

그러다가 의식단계의 다음 생각이 떠오르면 무의식단계의 마음은 비활동상태로 침잠한다. 낮 동안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사라지는 만큼

무의식단계의 마음의 흐름이 순간적으로 중단되는 일이 그만큼 수없이 많이 일어나는 셈이다.

 

무의식단계의 마음의 중요성 - 그 기본적 위치

어떤 의미에서는 수동적인 무의식단계의 마음이 의식단계의 마음보다 더 중요하다.

무의식단계의 마음 즉, 바왕가 찟따는 의식의 측면에서 봐서 활동적이지 않을 뿐 잠재의식적으로는 활동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의식에 떠오르지 않는 상태의 활동, 다시 말해 의식의 문턱 바로 밑에서 벌어지는 활동

따라서 의식단계의 마음에는 알려질 수 없는 활동이라 간주된다.

 

의식단계의 마음은 한 찰나에 오직 하나의 생각이나 관념을 수용할 뿐이다.

잠재의식 내지 무의식단계의 마음은 의식단계의 마음을 드나드는 모든 생각, 관념, 경험들의 인상을 수용한다.

그러므로 무의식단계의 마음은 귀중한 정신적 창고로 혹은 인상의 저장소로 기능한다.

 

윌리엄 제임스 교수는 종교경험의 다양성에서 바왕가 찟따의 한 측면에 해당되는 잠재의식단계의 마음에 대해

그것은 분명히 우리 존재의 더 큰 부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잠복하고 있는 모든 것의 거처이며, 기록이 되었거나 주목받지 못한 채이거나 간에 지나쳐가는 모든 것들의 축적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무의식단계의 마음의 또 다른 특징은

때때로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생각, 관념, 인상들 중 일부가

의식단계의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들은 최면을 통해 일깨워져 의식 표면으로 끄집어내질 수 있는데 그에 관해서는 뒤에 다루게 될 것이다.

 

무의식단계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은

기억과 같은 정신현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이들 정신현상들은 설명되기 어렵고 완전히 불가사의로 남게 된다.

 

이에 관하여 냐나띨로까 스님이 업과 환생에서 한 말을 상기해보면 도움이 될 듯하다.

잠재의식상태의 생명의 흐름인 바왕가소따의 존재는 우리의 사고를 설명해주는 데 필수적인 가정이다.

무엇이든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지각하고 생각하고, 내면으로든 바깥으로든, 경험하고 행한 것들이

극도로 복잡한 신경계통에든 아니면 잠재의식 내지 무의식 안에든 어떤 방식으로 어디엔가 빠짐없이 등재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로 전에 무엇을 생각했는지도 기억할 수 없을뿐더러

다른 사람이나 사물의 존재에 대해 아무것도 알아볼 수 없을 것이고

우리의 부모, 선생, 친구, 기타 누구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도대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니

생각은 앞서 한 경험들의 기억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막 태어난 갓난아이의 마음, 아니 어머니 자궁 속에 있는 태아의 마음보다도 더 아무것도 없는 완전 백지 상태일 것이다.”

 

무의식단계의 마음은 인상들이 저장된 정신적 창고로서의 기능 외에도

그 어원이 시사해주듯 매우 중요한 기능을 수행한다.

바와, 존재와 앙가’, 즉 요소라는 말로 구성된 바왕가라는 단어는

바왕가 찟따, 무의식단계의 마음이 존재의 요소 혹은 존재에 없어서는 안될 기초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주석서 위바위니띠까에 그로 말미암아 존재나 개체의 흐름이 멈춤없이 유지되는 생명의 요소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것이 바왕가 찟따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그것은 존재에게 필수적이고 지속적인 기초가 되거나 그 밑흐름으로 작용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바왕가소따, 즉 무의식의 흐름이라고 불린다.

그것은 또 존재의 기능이라고도 불려왔으며, 그 이름값대로 삶을 지속시키는 구실을 한다.

서구의 저술가들은 이 뜻을 잘 살리기 위해 생명-연속체라는 용어를 썼다.

 

냐나띨로까 스님은 불교사전에서

일부 현대 심리학자들이 무의식 또는 영혼이라고 부르는 잠재의식적 생명흐름, 또는 생명의 밑흐름은 바로 그것이 있음으로써 기억의 능력, 염동현상의 문제, 정신 육체적 성장, 업 그리고 재생 현상 등이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쉐 잔 아웅이 철학개요 서문에서 전개한

바왕가 찟따 혹은 존재의 흐름의 한층 고차원적 기능에 관한 고찰은 매우 유익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렇다면 존재의 흐름은 현재 의식을 가진 존재의 필수 조건이자 필수 요소, 즉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개개 생명의 존재이유이다.

그것은 생명-연속체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생각이라는 그림이 그려지는 바탕과 같다.

비유컨대 그것은 어떤 장애도 받지 않고, 어떤 바람 때문에 주름 잡히지도 않고, 어떤 파도 때문에 파문을 일으키지도 않고, 어떤 지류의 물도 받아들이지 않고 또 그 내용물을 세상에 내보내지도 않은 채로 조용히 흐르고 있을 때의 강물의 흐름과 같다.

 

그 흐름이 내부세계로부터 오는 장애가 되는 어떤 생각에 부딪히거나

바깥 세계로부터 오는 감각이라는 지류의 유입에 의해 동요되면

의식단계의 마음인 생각이 일어난다.

 

그러나 존재의 흐름을, 생각이 그 속으로부터 떠오르는 바닥면이라고 가정해서는 안다.

일생 동안 혹은 세세생생 동안 식역 하의 찰나찰나적 의식작용과

식역 상의 찰나찰나적 의식작용은 내내 병렬관계를 이룬다.

하지만 그런 작용들이 아래위로 중첩되는 일은 결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