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467

[Danye Sophia] 불교, '괴로움을 없애려는 수행'의 비참한 결과!

불교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한마디로 말하면 괴로움을 없애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불교 수행은 괴로움을 인식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혹시 삶에 만족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시야를 시간과 공간으로 확장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 생로병사가 심중에 부각하면서 괴로움이 스멀스멀 올라오게 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들어 죽고 그 시신은 불태워지거나 땅속에 묻혀 썩게 된다는 허망함에 고뇌하게 되겠지요. 구태여 생로병사가 아니어도 다른 무언가라도 떠올려 괴로움을 인식하고 그 수위를 최고로 높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의 괴로움은 현실을 직시함으로써 생겨난 합리적인 심리 상태입니다. 생로병사를 잊거나, 혹은 종교적 신앙으로 의식을 마취시키면 괴로움은 잦아들지만 오히려 현실과는 동떨어지게 됩니다. 아무튼 적당히 괴롭거..

[Danye Sophia] 죽음 이후, 당신도 저급한 귀신(鬼神)이 될 수 있다!

불교에서는 윤회를 굳게 믿고 있습니다. 윤회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후에도 神으로 존재해야겠지요. 그래서 이번 영상에서는 사후에 神이 있다는 전제에서 ‘귀신(鬼神)’을 논해 보고자 합니다. 귀신은 어떤 神이며, 어느 누가 귀신이 되는 걸까요? 인간과 神의 차이는 간략히 말해 精에 있습니다. 神이 인간의 몸속에 내재하면 精神이라 부르고 그 정신이 몸에서 이탈하면 神이 됩니다. 즉 精이 있으면 인간이고 없으면 神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精이 무엇이기에 인간과 神을 구별하는 잣대가 되는 걸까요? 우리 선조들은 精과 氣와 神이라는 세 가지 동력으로 우주를 바라봐 왔습니다. 精은 뭉치려는 힘으로 입자성을 氣는 퍼지려는 힘으로 파동성을 神은 방향을 설정하는 힘으로 창조성을 각각 의미합니다. 精의 입자성과 氣의 파동성,..

[현덕마음공부] 슬퍼하는 당신에게

슬픔은 상실감이다. 박탈당한 억울한 느낌이다. 마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데 현실에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슬픔은 아련한 슬픔에서 아픈 슬픔, 그리고 비통함까지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다. 슬픔의 마지막에는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인식, 죽음이 있다. 이별은 인간의 필멸성에 대한 예고다. 던져진 존재로서 또 세상에서 지워질 존재임을 자각하는 순간 더 깊은 슬픔을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슬픔은 우리에게 주는 것이 있다. 카타르시스다. 슬픔은 우리를 정화한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순수해지고 삶의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이것을 위해 우리는 슬픔에 대해서 지혜로운 대처를 할 수 있다. -하나는 슬픔을 인정하고, 수용하고 지나가도록 시간을 허용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적절히 표현함으로써..

[현덕마음공부] 우리는 왜 어리석음에 빠지는가?

인간은 어리석음에 빠지기 쉽다. 어리석음은 사실을 간과하게 하고 시기를 놓치게 하고 잘못된 대응을 하게하여 마침내 실패와 후회로 이끌어 우리를 괴로움에 빠뜨린다. 어리석음의 이유는 인지적이고 심리적이다. 뇌는 에너지 절약 시스템으로서 결과에 이르는 세부 조건들을 웬만하면 검토하지 않으려는 속성이 있다. 심리적으로 보면 인간은 기대(욕망)의 좌절로 분노(흥분)하게 되면 변연계 중심의 대응 상태가 되는데 이때는 냉철한 계산을 할 수 없어서 어리석은 결정과 행동을 하게 된다. 어리석음의 두 가지 경로 모두 우리를 실패와 괴로움으로 이끈다. 어리석음을 벗어나는 길은 검토 즉 성찰에 있다. not demand but characteristics가 그것이다. 보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즉,..

[Danye Sophia] 선지식의 오도송, 왜 잠꼬대만 해대는가! 이것이 진짜.. 깨달음의 반야바라밀!

불교란 깨달음을 위한 종교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깨달음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여기에 대해 반야심경에서는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반야(般若)란 분별을 끊은 최상의 지혜를 바라밀(波羅蜜)은 고차원으로의 이동을 각각 뜻합니다. 정리하면, ‘분별을 넘어선 지혜를 통해 고차원의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거듭남’과 비슷한 맥락인 것이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 분별을 초월한 지혜를 습득할 수 있을까요? 그러려면 우선 분별에 휘말리지 않아야 합니다. 분별이란 외계에서 들어오는 정보에 着이 되어 일어나는 상념을 일컫습니다. 마치 바늘과 실처럼 생각이 일어나면 분별은 무조건 따라붙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생각을 끊어야 분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렇게 ‘생각타..

[Danye Sophia] '마음 비우는 수행'으로 아상(我相)에 갇혀 괴물이 된 수행자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예외 없이 ‘나’를 잘되게 하려고 합니다. 어떻게 해야 ‘나’가 잘 될까요? 동물들이 적자생존하는 것처럼 사람들도 경쟁사회에서 우위를 차지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먼저 경쟁에 필요한 정보부터 습득해야겠지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학교에 들어가 학습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심지어 취업한 이후에도 학습은 지속되고 어떤 직업을 막론하고 무한경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그 결과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면 흔히 ‘잘됐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잘된 것의 기준이 무엇일까요? 잘되었다고 말하려면 재물과 명예,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따져봐야 합니다. 이것들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면 잘된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런 결론은 사회의 객관적 통념에 따른 것이고 주관의 세계로 옮겨오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

[현덕마음공부] 화나는 당신에게

분노는 격차에서 온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과 실제 사이의 격차가 클수록 분노는 커진다. 우리는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지만 상황에 부딪히면 누구나 자기만의 당위(must) 목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분노는 에너지다. 현대 사회에서는 분노를 생기는 대로 표출하고 살 수는 없다. 참으면 병이 되고 터뜨리면 문제가 되는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나의 당위 목록은 나의 경향성과 편향, 스타일, 정체성 같은 것들이다. 우선 이것들이 나의 부속물이지 나는 아니라는 거리 두기가 필요하다. 심리적 안전지대를 이루는 이런 나만의 편향과 거리 두기가 성공하면 화를 부르는 나의 안전지대가 유연하고, 커지고 그 경계선이 희미해지고 마침내는 사라질 수 있다. 나의 분노는 다른 생산적 ..

[현덕마음공부] 불교간략사- 개념,형이상학과의 전쟁

불교는 이고득락의 가르침이다. 삶이 괴롭다고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는 의미없는 교리이다. 불교는 무상하다는 가르침과 같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화를 겪어왔다. 그것은 심화나 풍성함으로 볼 수도 있고 변질로도 볼 수 있다. 불교는 근본불교, 아비담마불교, 대승불교, 선불교 등을 거치며 변화해 왔다. 그 변화에서 핵심 주제는 학문주의 (언어, 문자, 개념, 논리, 철학)였다. 그리고 나아가 그것이 절대화, 초월화, 실재화 되는 것을 경계하는 긴장의 연속이었다고 하겠다. 우리는 불교사를 통해서 부처님이 원래 무슨 의도로 설법하셨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부처님은 이고득락의 심리학을 설법했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현대에 특히 유용하다.//

[Danye Sophia] 반야심경 '색즉시공, 일체개공', 공(空)으로 공갈치는 수행자들!

대승불교의 핵심 경전으로 반야부의 반야심경과 금강경이 있습니다. 특히 한국불교에선 이 두 경전에 대한 애착이 매우 큽니다. 반야심경과 금강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 한 글자로 되어 있는 空을 알아야 합니다. 반야심경은 空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금강경은 空을 언급하지는 않지만 空에 모든 포커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空이란 무엇일까요? 반야심경에서는 一切皆空이라고 합니다. 삼라만상 모든 것이 空이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을 좀 더 풀면 色卽是空, 空卽是色이 됩니다.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空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空은 도대체 있다(有)는 건가요, 아니면 없다(無)는 건가요? 연필을 하나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이건 불교 용어를 빌리면 色입니다. 色을 쉽게 말하면 ‘有’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Danye Sophia] 한국불교 조계종 선불교, 이단인가? 정통인가?

성리학에 보면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과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이 나옵니다. 이것은 만물의 설계도인 ‘理’와 그 질료인 ‘氣’와의 관계를 설정한 이론입니다. ‘理’와 ‘氣’의 주종 관계에 따라 철학은 물론이고 정치와 사회의 전반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정답일까요? 理에서 氣가 파생된 것일까요? 아니면 理라는 것 자체가 氣인 것일까요? 우리가 사는 물질세계에서는 설계도와 재료가 뚜렷이 구분됩니다. 하지만 형이상(形而上)의 세계로 옮겨가면 理와 氣의 구분은 모호해집니다. 그래서 이기이원론과 이기일원론의 결론을 내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불교의 시각에서 보면 어떨까요? 불교는 태동부터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관점을 지니고 있습니다. 브라만교에서 此岸과 彼..

[현덕마음공부] 욕망하는 당신에게

욕망은 살아 있다는 생명체의 표시이기도 하다. 욕망은 잘 경영해야 할 대상이다. 가진 것/ 욕망(원하는 것)이 행복의 함수다. 우리는 가진 것을 늘리거나 원하는 것을 줄임으로써 행복에 다가갈 수 있다. 욕망의 합리적 포기, 재구성, 최적화가 그 방법이다. 그러나 결국 나의 욕망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 욕망을 통한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할 수 있다.// 욕망을 정확하게 이해하면 목표가 단순해지고 단순한 목표에 몰입할 수 있고 그러면 성취, 성공, 행복은 쉽게 따라오는 구조로 되어 있다. 오늘 욕망하는 그대에게 당신의 욕망에 대해서 한번 잘 살펴보라 하는 얘기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현덕마음공부] 괴로운 당신에게 ㅡ 마음에 닻을 내리지 마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회적 개인적 불행과 고통에 부딪힌다. 그러나 또한 내적인 성격에서 기인한 괴로움도 있다. 어쩌면 그것이 좀 더 근본적인 것인지 모른다. 우리는 경험이 쌓여 어떤 내적 정보처리체계를 가지게 되는데 그것을 성격이라고 한다. 자극에 대해서 해석하고, 판단 기준을 세우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방식까지 우리는 상당히 구분할 수 있는 일관성 있는 반응 경향이 있다. 다르게 말하면 이것은 일종의 왜곡이다. 내가 세상을 보는 안경의 굴절률 같은 것이다. 그것이 나의 견해이다. 괴로움이란 이 나의 견해로 말미암아 변화를 거부하고, 집착하고, 나를 바꾸는 것을 거부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심리적으로는 굴절률을 해결해야 한다. 그것은 머물지 않고, 바라지 않고, 어떤 이미지..

[Danye Sophia] 붓다의 꿈! 불교의 깨달음은 '입자(ego)와 파동(전체의식)'을 알면 끝난다!

현재까지 과학에서 밝혀낸 물질의 실체는 입자와 파동입니다. 입자와 파동이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사실 그것들의 영역이 고정된 것이 아니어서 입자성과 파동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 사실 입자라는 것이 아직까지 과학으로 증명된 적이 없고 실험실에서 관측 가능한 것은 뭔가 덩어리를 이루려는 입자의 성질뿐이니까요. 파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파동이란 입자성을 지닌 것들이 단절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입자성과 파동성이란 ‘덩어리를 이루면서도 동시에 연결되어 있는 성질’을 가리킵니다. 쉽게 말하면 만물이 ‘하나이면서도 둘인 것’ 같은 무언가를 보여주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이지요. 이것이 현재까지 과학에서 밝혀낸 물질의 실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정신과 몸은 어떨까요? 이것 역시 입..

[Danye Sophia] 중생들이 해탈 못하는 진짜 이유가 따로 있다!

수행자들이 추구하는 목적지가 어디일까요? 그건 바로 열반입니다. 열반이란 번뇌망상이 소멸되어 지극히 청정한 의식의 경지를 말합니다. 이런 열반에 이르려면 무조건 통과해야 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해탈입니다. 해탈이 되지 않고 열반에 이르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럼 해탈이란 도대체 어떤 상태를 말할까요? 해탈이란 쉽게 말해 '대상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대상이란 외계로부터 들어오는 정보에 이 된 상태를 말합니다. 따라서 착을 끊어 대상으로부터 자유로우면 그것이 해탈입니다. 아비담마에서는 해탈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14가지의 예를 들어 알려주고 있습니다.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자유 비양심에서 벗어난 자유 몰수치심에서 벗어난 자유 흥분에서 벗어난 자유 탐욕에서 벗어난 자유 사견에서 벗어난 자유 자..

[현덕마음공부] 낙이 없는 그대에게, 만족의 간격(interval)을 관리하라

반복은 신선함을 떨어뜨린다. 중독은 인생을 무너뜨린다. 삶에서 즐거움을 찾아서 누리려면 신선함을 관리해야 한다. 좋은 경험을 잦은 반복으로 소모하지 말고 부정적 중독에서 벗어나 긍정적 중독 (자기가 선택한 분야에서 정진)을 통해 뇌가 쾌락을 누리게 하는 것이 낙있게 사는 방법이다.// 만족도는 체감한다. 1) 강렬한 경험 2) 다시 경험-> 기대한 것과 다르다 3) 반복-> 재미 없음, 매너리즘, 타성(몸에 습관이 붙는 건 정말 무서운 것!) -> 무의미, 살아있다는 느낌X 4) 더 강한 자극(역치)-> 중독 만족도가 떨어질 때, 즉각적으로 이 부분을 개선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신선한 것이 즐거움이다. 반복적 욕구 충족 행위의 한계 1) 경험과의 거리 두기 (경험은 잊어버리기..

[현덕마음공부] 부처는 누구인가?

부처는 2500년 전의 역사적 인물이다. 아쇼카왕의 석주에 있는 기록으로 그 문제는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그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의 문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변천을 겪었다. 방향은 인간 존재에서 스승으로 아버지로 그리고 신으로 가는 것이었다. 철학적으로도 법신의 개념이 도입되어 고타마 싯다르타를 넘어선 추상화 절대화가 진행되었다. 이 모든 것은 한 편으로는 종교적 발전과 심화일 수도 있고, 재가 신도들의 종교적 수요에 대처한 방법일 수도 있다. 공의 개념과 부처의 위상의 변화는 우리에게 더 심원한 불법에 대한 이해와 접근 방법을 제시해주고 있다.// 사람은 무아를 싫어하고 유아를 좋아한다(붓다가 극복하려던 것) *무아-> 공, 절대화, 실체화(배후, 근원에 있는 본질) *부처: 깨달은 인간에서 -절대화, ..

[Danye Sophia] ‘無我’와 ‘참나’가 같다고 주장하는 깨달은 척 하는 수행자들!

불교 철학에 보면 ‘안이비설신의’ 육근과 ‘색성향미촉법’ 육경이 나옵니다. 전자는 정보를 받아들이는 내적 창구이고 후자는 외계에서 들어오는 정보의 여섯 갈래를 각각 가리킵니다. 그런데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이 열 두 장소에 마음이 머물러야 합니다. 다시 말해 ‘나’라는 인식이 자리해야 그것들이 제 기능을 발휘하게 됩니다. ‘나’라는 것이 정보의 기준이 되고, ‘나’라는 것이 정보를 분류하고, ‘나’라는 것이 정보를 취사해서 활용하게 되니까요. 이것은 적자생존의 생태계에 꼭 필요하지만 반면에 ‘나’라는 관념을 고착시켜 생로병사와 번뇌망상의 괴로움을 유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 수행은 예외 없이 12처에 ‘나’가 머무르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것에 성공하면 ‘나’가..

[Danye Sophia] '감성적 깨달음'인 열반, 해탈, 불성, 본성 등의 환상에서 벗어나라!

마음을 닦아야 깨달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수행자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마음을 닦아야 할까요? 마음이 움직이는 현상을 심리학적으로 접근하면 어떤 공통점이 보입니다. 그건 知情意라는 세 갈래의 큰 흐름을 이룬다는 사실입니다. 知는 정보를 취합해 판단을 내리고 情은 정보에 대한 공명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意는 知와 情의 반응에 따라 필요한 동력을 제공합니다. 마음이 오만가지로 갈라지더라도 크게 보면 知情意 세 방향으로 흘러가게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음 수행을 거론하려면 먼저 知情意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知情意에서 의는 知와 情에 수반되는 동력이기에, 크게 보면 知와 情의 양 갈래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을 '지성적인 인간과 '감성적인 인간'으로 구분하는 것도 같..

[현덕마음공부] 무아와 공, 비슷하지만 다른

불교의 가장 대표적 이념은 무아사상이다. 이것은 아트만 사상에 반대하여 나온 것이다. 그 비슷한 것으로 空이라는 말이 있다. 동북아 불교에서는 이 말이 더 많이 쓰이는 것 같다. 둘 다 실체 없음의 의미로 쓰이는 비슷한 말이지만 그 단어가 다른 만큼 시대적 맥락도 다르다. 무아가 아(atman)에 반대하여 나온 개념이라면 空은 아공법유에 반대하여 나온 말이다. 부처님의 범을 너무 중시한 나머지 법에 집착하고 법을 실체시한 것에 대하여 그렇지 않다고 반대한 것이다. 이후 공사상은 삼라만상에 대하여 일반화되고 이후에는 진공묘유 등으로 절대화, 실체화되어가기 시작한다. 모든 단어는 시대의 소산이다.// 무아냐? 공이냐? -비슷하지만 다른 새로운 단어가 그 시대에 나올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무아 아(아트만..

[현덕마음공부] 무상, 동전의 양면

무상은 허무나 의미 없음 등 부정적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만물은 늘 변화 중에 있으며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석하면 현대의 과학적, 경영적 사고에 부합한다. 즉, 뒤집어서 말하면 변화와 혁신으로 번역될 수 있다. 당시 붓다는 영원한 자아라는 아트만 사상을 극복하기 위해 연기업에서 무상을 무상에서 무아(anatman)를 추론했다. 붓다는 형이상학을 극복하고 경험과 추론이라는 인간의 지성으로 삶의 문제에 접근하고자 했다. 무상이라는 개념 때문에 불교는 그 어느 종교보다도 자기반성적이고 허용적이다. 무 집착으로 이끄는 무상의 개념은 마음 치유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

[Danye Sophia] '이 뭐꼬?' 화두 하나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불교 수행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할까요?” 이렇게 질문한다면 스님들은 이구동성으로 마음을 비울 것을 권합니다. 마음을 어떻게 비우냐고 물으면 으레 그렇듯 탐진치를 꺼내 듭니다. 탐진치가 마음을 오염시키니 이것들부터 처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탐진치를 없앨 수 있는지 되물으면 그때 매우 중요한 불교 수행법을 하나 꺼내 듭니다. 그것이 바로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성제 (四聖諦)입니다. 사성제는 간략히 말해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黃)을 끊어 열반에 이르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이 바로 '착(着)'입니다. 이란 외계에서 들어오는 정보에 마음이 움직여 그것에 철썩 달라붙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탐스런 사과가 눈에 들어오면 그것을 먹고 싶은 마음이 동하면서 그 정보에 붙게 됩..

[Danye Sophia] 불법에는 붓다의 깨달음이 없다!

佛法을 공부하려면 꽤 오랜 세월을 쏟아 부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양이 매우 방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왜 佛法이 팔만대장경처럼 부풀어 난 것일까요? 우리는 주변에서 거짓말하는 사례를 종종 목격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참말과 거짓말의 차이를 경험으로 알게 됩니다. 참말은 단답형으로 간결하게 나오지만 거짓말은 대체로 설명이 길어진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거짓말은 그것을 감추거나 변명하기 위해 이런저런 설명이 수반되는 것이지요. 결국 어떤 사안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면 말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 진리가 뭐냐고 물으면 사실상 간단하게 끝납니다. 그건 ‘제1원인(實存)’ 한마디면 되니까요. 그러면 진리인 ‘제1원인’을 어떻게 깨닫느냐고 물으면 0과 1을 통찰하면 됩니다..

[현덕마음공부] 뇌 파페츠 회로와 12연기, 오온. 연기는 인지과정이다.

불교는 지혜의 종교다. 그래서 감정보다는 그것이 일어나는 인지과정에 주목한다. 12년기 중에서 접촉, 느낌, 호오반응, 마음에 붙잡음, 결과로 생겨남이라는 촉,수,애,취,유의 과정도 인지 과정론을 닮았다. 그리고 인간을 의미하는 오온도 인지과정론으로 보면 색이 느낌을 낳고, 상상하고, 의지를 가지고 결정하고 그것을 일반화하고 기억하는 등 의식의 차원으로 생성하는 색,수,상,행,식 또한 그대로 인지 과정이다. 불교를 오래된 교설로 보면 현실감이 떨어진다. 현대의 뇌과학과 심리학은 비교를 통한 더 깊고 현실감 있는 불교의 이해에 매우 유용하다.// 뇌 파페츠 회로, 오온, 십이연기는 인지과정이다. 외부와 접촉- 수(느낌)- 애(좋다, 싫다= 심리적인 부분)- 취(좋은 것은 취하고 싫은 것은 밀어낸다, 감정의..

[현덕마음공부] 불교를 설명하는 세 마디

불교는 팔만 사천의 법문이 있다고 하지만 계정혜로 요약된다. 그리고 계는 행위, 정은 감정, 혜는 생각과 관련이 있다. 행위에 있어서 음, 살, 도는 과보를 받는 죄가 된다. 이 본능적 행동은 탐, 진, 치라는 감정의 동요에 의해서 촉발되거나 증폭된다. 그리고 이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는 이유에 대한 고찰이 불교의 특징이다. 그것은 무상, 고, 무아를 깨닫지 못하는 생각의 오류에서 기인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교가 죄와 벌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것의 근본 원인을 잘못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인식에서 찾는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불교가 지혜의 가르침인 것이다. 생각하는 기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전환하여 올바른 시각을 가짐으로써 지혜로 전환시키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이고득락은 이때에 이루어진다..

[Danye Sophia] '0과1'을 풀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다!

3차원은 無와 有 쉽게 말해 0과 1로 이루어진 세계입니다. 그래서 인류가 이룩해 온 모든 학문은 0과 1의 대들보 위에 놓여 있습니다. 원래 학문은 철학 딱 하나였습니다. 철학은 0에서 1이 어떻게 나왔는지를 밝히는 학문입니다. 이것이 풀어지면 존재에 관한 모든 비밀이 풀릴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궁구해도 여기에 대한 납득할 만한 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0을 부정하고 1의 자존(自存)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는데 여기서 종교가 태동하게 됩니다. 종교가 번성해도 철학자들은 1의 自存을 거부했고 어떻게든 0에서 실마리를 찾으려 했습니다. 이때 그 해법을 이성보다는 직관과 심리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니 바로 수행자들입니다. 그리고 1을 밝혀 0으로의 연결을 시도하는 사람들도 뒤를 잇게 ..

[Danye Sophia] 불교의 깨달음은 점(點)으로 끝난다!

어느 무엇에 의해 생겨나지 않고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가리켜 실존(實存)이라 합니다. 여기에 대한 명칭은 수도 없이 많은데 대승불교에서 쓰는 ‘空’이라는 철학적 표현이 단연 돋보입니다. 空이란 “有도 無도 아닌 제3의 존재 형태”라 할 수 있는데, 이것 역시 수행자들이 이해하기에는 꽤 난해합니다. 그래서 수학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생깁니다. 空을 수학적으로 기술하면 재밌게도 점(點)이 됩니다. 자, 點을 한번 찍어 봅시다. 좀 크게 찍긴 했지만 아무튼 點은 點입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어떤 공간을 조금이라도 차지하면 이건 사실 點이 아니라 면적입니다. 點이란 위치는 있지만 면적이 없는 것 다시 말해 ‘면적이 없는 위치’를 말합니다. 있긴 있는데 면적이 없어 그 실체가 없다는 얘기이지요. 참으로 아리송한 말..

[현덕마음공부] 팔정도, 모든 것에서 無常, 苦, 無我를 보라!

팔정도는 4성제의 고의 멸에 이르는 길에 대한 얘기다. 정견에서 시작하여 정정으로 끝나지만, 여덟개이면서 실제로는 하나인 바퀴살과 같다고 얘기된다. 팔정도의 핵심은 정견에 있다. 정견이란 불교적 관점을 수용하는 것을 말한다. 사성제와 팔정도, 12연기와 무상, 고, 무아의 관점을 수용하고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8가지의 길은 계정혜의 3가지로 분류할 수도 있다. 8정도의 핵심은 삶의 모든 국면에서 무상, 고, 무아를 보는 것이다.// 8정도 1) 정견(正見- 똑바로 봐라) 2) 정사유(正思惟- 생각을 똑바로 해라) 3) 정어(正語- 말을 똑바로 해라) 4) 정업(正業- 행동을 똑바로 해라) 5) 정명(正命- 생계 유지를 똑바로 해라, 올바른 생계를 유지해라) 6) 정정진(正精進- 부지런하고 게으..

[현덕마음공부] 고집멸도, 집착이 아니고 모여서 쌓임이다

사성제는 부처님 설법의 압축판이다. 고집멸도는 불교를 한마디로 정의하고 있다. 의학적 진단의 형태를 가지면서, 병(괴로움)과 병의 원인(집), 병의 치유 가능성(멸), 치유방법(도)을 얘기하고 있다. 그중에서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집을 우리는 흔히 갈애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갈애의 형태로 발현되는 근본적인 문제는 의식의 경향성(무명,행,식으로 이어지는)이다. 이것은 반복적인 정신활동이 모여서 쌓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구조화되어 있다. 그래서 경향성을 띤 의식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접촉과 느낌에 이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의 기준으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괴로움의 종식을 위해서는 개별적인 집착이 아니라 이런 의식의 경향성을 극복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한 번에 ..

[Danye Sophia] 불교의 해탈 수행은 왜 점점 '바보'가 되게 하는가?

수행자들이 추구하는 목적지가 어디일까요? 그건 바로 해탈입니다. 해탈이란 중생을 옥죄는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무한히 자유롭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 일체의 번뇌망상이 사라져 열반에 휩싸이게 되는 건 필연입니다. 그러면 아무런 걸림이 없는 사사무애(事事無碍)한 의식만 갖추면 될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환각성분을 복용하거나 뇌에 전기적 자극을 가해 생겨나는 초월의식은 해탈로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불교의 해탈은 어떤 조건들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과因果에 의한 조건적 생성을 有爲法이라 하는데 불교의 해탈은 이런 것에 반해 無爲法이라는 단서가 붙습니다. 어떤 조건도 없이 저절로 그러해야 한다는 것으로 道家에서 말하는 무위자연無爲自然과 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그럼 도대체 불교의 해..

[Danye Sophia] 당신은 여태껏 견성성불에 속고 있었다

본성이란 사람들마다 본래 가지고 있는 순진무구한 성품으로 이것을 힌두교에서는 참나(아트만)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참나(아트만)를 보면 절대적 존재인 브라만이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얼핏 보면 참으로 그럴듯한 이론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론을 과감히 부수고 등장한 것이 불교입니다. 그래서 불교에는 구조적으로 ‘참나’, ‘본성’, ‘불성’, ‘순수의식’, ‘바탕의식’, ‘전체의식’, ‘우주의식’, ‘알아차림’ … 같은 용어들이 등장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불교를 세운 세존께서 이런 것들을 죄다 부정하면서 ‘無我’를 기치로 세우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대승불교가 출범하면서 은근슬쩍 佛性이 끼어들게 됩니다. 그리고는 달마가 그 佛性을 가지고 중국에 건너와서 더 넓게 펼쳐 놓습니다. 달마는 ‘본성을 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