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 역사/최인호TV 227

카타르 월드컵 건설 과정, 노동자 6,500명의 사망

“월드컵이 피로 물들었다” 영국 데일리 메일은 앞으로 약 10개월 밖에 남지 않은 카타르 월드컵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려 사망자만 6500명 이상이라는 현재 상황, 무슨 일일까요? 역대 최초로 11월에 열리는 대회 카타르 월드컵이 막바지 준비에 한창입니다. 온도가 높은 중동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월드컵이기 때문에 섭씨 40도가 넘어가는 여름은 피하겠다는 계획이죠. 그런데 월드컵 준비 과정에서 잊혀진 내용이 있습니다. 10년 전 월드컵 유치권을 획득한 뒤 카타르는 인도, 파키스탄, 네팔, 방글라데시 등에서 노동자를 고용해 경기장, 공항, 도로 등을 건설했는데 이 과정에서 밝혀지지 않은 이유로 발생한 사망자만 6500명이 넘었다는 주장이 제기됐어요. 2010년부터 10년간 매주 평균 12명이 사..

[특집] 외환위기 오나 안 오나? ... 외환위기란 무엇인가? 환율이란 무엇인가? 환투기세력이란 무엇인가? NDF란 무엇인가?

환율이란 뭡니까? 정의를 내려보도록 하여라. 환율. 환율은 왜 올라갑니까, 도대체? 국내 거주 외환, 이게 중요합니다. 나라 안과 밖이라는 개념이 중요합니다. 달러가 가 있는, 달러가 가 있는 나라가 있는 거예요. 국내거주 외환의 양이 있고 그 국내거주 외환의 공급이 있고 국내거주 외환에 대한 수요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상품의 수요 공급 이론과 똑같아요. 외환 수요가 외환 공급보다 높으면 환율이 올라갑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일반적인 상품의, 가격의 등락과 똑같은 메카니즘이죠. 곧바로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겠습니다. 외국 투기 자본이 국내 거주자라는 겁니다. 외환시장 자유화라는 것은 그러니까 IMF가 왜 왔냐?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자본시장 자유화, 세계화 때문에 국내에 들어와 있는 외국 자본 가지들(프..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23)잠실수중보 물고기길

한강 물고기들의 자유로운 통행을 허하라 1985년 말, 잠실대교 밑에 잠실 수중보가 건설됐다. 너비 10m 길이 920m의 수중보는 한강 물길을 막아 수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역할을 한다. 잠실에서 김포에 이르는 38km 한강의 수위를 평균 2.5m로 유지시켜 한강유람선이 다닐 수 있는 수위를 보장해준다. 그런데 잠실수중보 때문에 한강의 물고기 세상에서 큰 난리가 났음을 그 당시의 인간들은 전혀 몰랐다. 수중보를 만들 때 일부 구간을 상하류 물고기들의 통행을 위한 ‘물고기길(어도)’로 나름 조성했는데 한강에 서식하는 수백 종의 물고기 가운데 대부분이 물고기길을 거슬러 가지 못하는 것이 2000년대 이후 어느 민간단체의 조사로 밝혀져 충격을 안겨줬다. 물고기길의 경사가 급한데다 물살이 워낙 강했기에 도약력..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22)용산백사장의 파괴 ...

세계 최대 강수욕장인 용산백사장은 사라지고 노들섬만 덩그러니... 한강 남북을 잇는 최초의 다리는 1900년 완공된 한강철교다. 그 위로 경인선 철로가 깔렸다. 두 번째 한강다리이자 최초의 인도교는 1917년 완공된 한강대교다. 노량진과 용산백사장을 이었다. 한강의 남북을 잇는 최초의 근대적 다리들은 모두 일본이 만들었다. 518년 조선 왕국의 무능함이란… 한강대교는 두 개의 다리로 건설됐다. 현재도 그렇다. 노량진부터 용산백사장의 남단까지 440m 한강대교와 용산백사장 남단부터 용산백사장 북단까지의 188m의 한강소교였다. 현재 노들섬으로 불리는 곳이 1917년 당시에는 용산백사장 남단의 야트막한 둔덕이었고 당시엔 신초리(新草里) 하동(下洞)마을로 불리고 있었다. 신초리 하동이 용산백사장 남단이었고 드..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21)녹봉창고 광흥창 ...

조선의 관리들이 한 달에 한 번 서강西江 주막에 갔다는데... 한양에서 일하던 조선의 관리들은 조선 초에는 1년에 네 번 1701년부터는 한 달에 한 번씩 한강 서강西江에 갔다. 열심히 일하던 관리들, 풍경 좋은 서강에 땡땡이치러 갔을까? 서강西江은 서호西湖로도 불렸는데 한강의 서쪽 봉원천(창천)과 한강이 합류하는 지역을 말한다. 동호東湖는 중랑천과 한강의 합류 지점을 말한다. 호수처럼 드넓은 동호와 서호는 한강의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왜 한양의 관리들은 서강에 정기적으로 갔을까? 놀러간 게 아니라 녹봉(급여)을 받으러 갔다. 서강에는 호남·충청·황해·평안도로부터 바닷길을 통해 운송된 세곡稅穀을 보관하는 나라의 창고가 있었다. 광흥창廣興倉과 풍저창豊儲倉이다. 여기에 보관된 세곡들은 관리들의 녹봉으로 주로..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20)충청수사 정걸 장군 ...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이 용산창의 왜군 사령부를 포격하다

임진왜란 중 조선 수군이 용산창의 왜군 사령부를 포격하다 1592. 4. 13(이하 음력) 왜군이 조선을 침략했다. 4. 14. 오전 왜군은 부산진 함락을 시작으로 파죽지세로 북상, 선조가 도망친 한양을 개전 20일 만인 5.3. 점령했다. 왜군은 용산을 조선 침략전쟁의 사령부로 삼았다. 용산에는 조선왕조의 경제적 토대인 세곡을 전국에서 거둬들인 용산창이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수군과 의병들의 분전, 명군의 참전 등으로 평양성까지 북진했던 왜군이 쫓겨 1593년 초 한양으로 주력군이 밀려 내려왔다. 1593년 2월 용산창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은 2만 명이 넘었다. 1593년 초 조선군은 한양수복 작전을 개시했다. 한양성 주변 10여 곳에 전국에서 모인 조선군들이 모였다.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19)한강변 독서당 ... 동호독서당에서 풍광 즐기며 사가독서한 사대부들, 조선의 동량이 되다

동호독서당에서 풍광 즐기며 사가독서한 사대부들, 조선의 동량이 되다 성리학군주 청년임금 세종의 뜻은 자못 원대했다. 천년왕국의 근본은 인재, 성리학 사대부들의 학문연구를 장려했다. 세종 8년(1426) 집현전 학사 몇몇을 불러 독서휴가를 명했다. “집현전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독서를 하며 학문에 정진하라” 사가독서賜暇讀書제의 시작이다. 그러나 사가私家는 시끄러운 법 사가독서를 명 받은 성삼문 신숙주가 조용한 절에서 책을 읽는게 좋겠다고 세종에게 건의한다. 세종은 1442년 북한산 남쪽 기슭의 진관사(현재 은평구 진관사)의 건물 중 일부를 ‘독서당’으로 내어준다. 산사에서 학문에만 정진하니 젊은 사대부들의 실력이 늘어날밖에. 계유정난으로 왕위를 찬탈한 세조는 사육신의 산실 집현전을 폐쇄하며 사가독서제까지..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18)희우정 망원정 ... 흥선대원군이 개망신당한 조선시대 한강변 첫 정자

1866년 흥선대원군은 천주교 금압령禁壓令을 발포 국내에서 비밀리에 선교하던 프랑스인 신부 12명 가운데 9명을 처형하고 가톨릭 신자 수천 명을 처형했다. 병인박해다. 살아남은 프랑스인 신부 가운데 리델 선교사가 중국으로 탈출해 중국에 주둔 중인 프랑스 함대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로즈 사령관이 지휘하는 프랑스함대가 조선을 침공했다. 로즈 제독의 프랑스 군함 3척이 9.18~10.1. 한강하류 양화진(현재 양화대교 인근)까지 올라와 정찰 활동을 벌인 후 한강 하구를 봉쇄한 채 10월16일 강화도를 공격해 점령했다. 프랑스함대는 11월10일 철군할 때까지 쇄국정책을 펴는 흥선대원군과 조선의 양반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병인양요 종료 후 조선은 가톨릭신자들을 매국노들로 규정하고 양화진 잠두봉에서 1만..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17)한명회 압구정... 요즘의 압구정 강남부자들은 한명회의 노욕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요즘의 압구정 강남부자들은 한명회의 노욕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수양대군을 세조로 등극시킨 1등 공신인 한명회(1415~1487)의 권세는 하늘을 찔렀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과 성종에게 두 딸을 시집보내 두 왕의 장인이라는 조선왕조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인물이다. 그러나 딸들의 운명은 순탄치 못했다. 큰딸은 예종의 세자빈으로서 인성대군을 낳은 직후인 16세에 요절했다(예종 즉위 후 장순왕후로 추존). 막내딸은 잘산대군에 시집갔다가 예종이 1년 만에 승하하자 예종의 사촌동생인 잘산대군이 성종으로 즉위하는 바람에 왕후가 되는 행운을 누렸으나 자식을 낳지 못한 채 17세로 요절했다. 공혜왕후 시호를 받았다. 잘산대군 성종이 친형인 월산대군과 사촌동생 제안대군을 제치고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은 최..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16)광나루 광진 이야기... 조선 권문세가들의 별장들이 빼곡했던 아차산 아래 광나루

조선 권문세가들의 별장들이 빼곡했던 아차산 아래 광나루 한강이 우리 역사의 핵심 무대로 등장하게 된 계기는 백제의 건국이다. 백제는 현재의 풍납토성 유적 일대를 도읍으로 삼아 건국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풍납토성 일대가 백제의 도읍이었다면 풍납토성의 강 건너 광나루는 삼국시대 초기 고대부터 한강의 가장 중요한 나루터였음이 입증된다. 광나루 뒤편은 아차산이 병풍처럼 둘렀고 고구려와 백제에게 아차산은 한반도의 패권을 유지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중시됐다. 고대부터 중시된 한강 나루인 광나루는 한양에 도읍한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중요성이 한층 더 각광받는 교통의 요지가 됐다. 광나루는 노량나루와 함께 태종 시대부터 도승[渡丞. 한강변에 설치한 한성과 지방을 연결하는 진(津)·도(渡)의 관리책임자]이 가장 먼저 ..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15)노들나루 노량진 ... 폭군 연산, 노들나루만 빼고 한강 나루 모두를 폐쇄하다

폭군 연산, 노들나루만 빼고 한강 나루 모두를 폐쇄하다 조선의 10대 왕인 연산군(즉위 1494 ~ 1506 폐위)은 역대급 폭군이다. 연산군 10년(1504), 한양성 사방 100리에 금표(禁標)를 세워 그 안의 주현(州縣)과 군읍(郡邑)을 폐지하고 백성을 내쫓은 후 사냥터로 삼았다. 논밭을 풀밭으로 만들어 짐승들이 뛰놀게 한 후 사냥으로 세월을 보냈다. 경연을 폐지하고, 신문고도 폐지했다. 민심이 극도로 흉흉해졌다. 민심의 흉흉함을 직감한 연산군은 귀양 간 사대부들이 역모를 일으킬 것을 염려하며 주요 귀양자들을 먼 섬으로 위리안치시켰다. 이런 조치에도 안심이 되지 않자 놀라운 조치를 추가로 발표했다. 노들나루(노량진) 하나만 빼고 도성 인근 한강나루를 모두 폐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만에 하나 발생할..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14)치욕의 삼전나루 ... 삼밭三田나루, 임금이 아홉 번 머리를 찧은 치욕의 나루터

치욕의 삼전나루 삼밭三田나루, 임금이 아홉 번 머리를 찧은 치욕의 나루터 조선 경제의 대동맥이던 한강 그 중심인 한강나루 가운데 가장 빨리 개설된 나루들은 노들 나루(노량진), 한강 나루(한남대교 북단), 삼전 나루(삼밭나루), 광나루였다. 삼전 나루는 세종 21년(1439)에 처음 열렸다. 흥인지문(동대문)을 나와 왕십리를 거쳐 중랑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의 두모포에서 배를 타고 건너면 잠실도 뒤편의 삼전 나루에 도달한다. 도성 중심지로부터 약 30리 지점이다. 삼전 나루에서 송파를 지나면 남한산성까지 이르게 된다. 한강을 건너 경기도 광주와 여주 방면으로 나가거나 충청도와 경상도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이었다. 병자호란을 맞은 ‘못난 임금’ 인조는 강화도 길이 청나라 선봉대에 의해 막히자 도성을 빠..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13)광진교 현대사 ... 광진교, 대교로 불리지 않는 유일한 한강 다리

2022년 현재 한강의 다리는 모두 31개다. 다리 이름은 철교 아니면 대교다. 그런데 잠수교와 광진교만 ‘교’라는 다소 초라한 이름이 붙어있다. 잠수교는 반포대교의 부속 다리로 취급되니 그럴 수 있지만 제3한강교인 한남대교(919m)보다 긴 다리인 광진교(1056m)가 광진대교란 이름을 얻지 못한 것에는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1936년 개통된 광진교는 한강철교(1900년), 한강대교(1917년)에 이어 세 번째로 역사가 오래된 한강 다리 아닌가. 현재의 광진교는 성수대교 붕괴 후 안전에 문제가 있어 1994년 철거됐다가 2003년 새로 개통된 다리다. 6.25전쟁 초 한강철교, 한강인도교, 광진교 등 당시 존재하던 세 개의 한강교는 인민군의 남진을 늦추기 위해 끊기는 비운을 맛봤다. 왜..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12)살곶이 다리... 세종 착공, 성종 완공,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지으려 파괴한 돌다리

살곶이 다리... 세종 착공 성종 완공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지으려 파괴한 돌다리 조선이 놓은 가장 긴 돌다리는 중랑천 한강 합수부 살곶이다리다. 길이 78m(258척) 너비 6m(20척) 높이 1.2m인 돌기둥을 네 줄로 세운 위에 받침돌을 올리고 대청마루를 깔 듯 세 줄의 판석을 빈틈없이 깔았다. 가운데 두 줄의 교각을 낮게 하여 다리의 중량을 안으로 모았다. 돌기둥에 무수한 흠집을 새겨 물살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하였다. 세종 3년 1420년 착공했으나 기술력 부족으로 교각일부만 세우고 중단했다. 성종14년(1483)에 이르러 서야 완공됐다. 중랑천과 청계천이 만나 하나의 물줄기를 이룬 후 한강 본류를 앞둔 곳에 놓여졌다. 현재 위치로는 한양대 공대 앞이다. 살곶이란 이름의 유래는 이렇다. 태조 이성계..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11)저자도 현대사... 인간이 파괴했으나 스스로 복원 중인 한강섬, 저자도

1966년 서울 지도의 저자도의 모습입니다. 한강과 중란천이 만나는 곳에 이렇게 큰 저자도가 있었습니다. 한강개발 과정에서 사라진 한강섬들이 여럿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강인문지리지 5편에서 말씀드린 잠실도다. 잠실도는 이제 잠실벌이 되었고 섬으로 복원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파괴에도 불구하고 자연 스스로 복원하는 섬들이 있다. 6편에서 소개한 여의도 밤섬과 함께 동호대교 옆 저자도가 있다.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곳의 옛이름은 두뭇개다. 두 물이 합쳐지는 곳이라는 뜻이다. 두뭇개는 한양 도성 인근의 한강 중에서 가장 넓은 강폭을 자랑해 호수란 뜻의 동호로 불렸다. 사시사철 물결이 푸르고 잔잔했다. 동호에 한강상류와 중랑천에서 흘러내려오는 모래들이 쌓여 모래섬을 이뤘는데 한지 원료인 닥나무가 많아 저..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10)난지도 현대사... 전두환 경찰, 민가협 부모님 들을 연행해 난지도 쓰레기장에 내팽겨치다

상암 월드컵 경기장과 기교해보면 난지도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한강의 섬(학술적으로는 범람원)이었던 난지도 대동여지도 중, 한양 인근의 지도인 경조오부도에는 꽃이 피어있는 섬이라는 뜻의 중초도로 표기되어 있다. 난지도는 비가 많이 오면 섬이 되고 가물면 강북과 일체가 되었다. 난지도에선 땅콩이 많이 재배됐다. 대동여지도 중 경조오부도에 표기된 난지도, 중초도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던 난지도의 운명이 바뀐 것은 1977년이다. 박정희 정부는 농원을 조성한다고 공고한 후 1월~ 7월 난지도 전체를 둘러싸는 4km의 제방을 쌓았다. 난지도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모두 강제 퇴거했다. 박정희 정권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산업화 도시화 열풍 속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던 서울시 쓰레기를 치우는 하치장으로 난지도를 ..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9) 절두산 순교성지... 아름다운 잠두봉이 비극의 절두산으로

한강 둔치에서 바라본 절두산, 잠두봉의 풍경입니다. 현재 연세대의 뒷산인 안산(무악산 295m)은 남쪽으로는 와우산(102m)을 거쳐 한강으로 이어진다. 안산에서 와우산으로 이어진 산자락은 한강변에서 둥근 모양의 봉우리로 솟은 후 한강으로 이어진다. 30m 높이의 둥근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 하여 잠두봉으로 불렸다. 잠두봉이 위치한 한강변은 양화진이다. 양화나루터는 삼남지방의 곡식과 산물이 집결되는 한강의 중요 나루터 가운데 하나였으며 조선 중기 이후에는 한양성의 방어를 위해 군사가 주둔하는 양화진이 설치됐다. 서해로부터 한강에 집입하는 적들을 방어하는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잠두봉 일대는 조선시대 사형장의 한 곳이었다. 태종16(1416) “예조에서 아뢰기를 동대문 밖에서 사형하는 것..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8)선유도 현대사 ... 한강변 선유봉이 한강섬 선유도로

양화대교 아래에 군함처럼 생긴 섬이 있다. 선유도다. 신선들이 노니는 섬이란 뜻이다. 북으로는 삼각산(북한산) 동으로는 여의도가 아름답게 펼져친다. 섬 전체를 시민공원으로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놔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선유도 또한 서래섬처럼 1970년대 이후 새로 생긴 한강의 섬이다. --선유도에는 어떤 역사가 있을까? 겸재 정선의 이란 진경산수화에서 보듯 양화진 건너 남쪽 한강변에 40m 아름다운 봉우리, 선유봉이 솟아 있었다. 신선들이 노니는 곳이란 이름처럼 아름다운 봉우리였다. 선유봉은 조선의 사대부들이 찾아와 음풍농월하는 곳이었다. 이름만 한량인 양녕대군이 이곳에 정자를 짓고 놀면서 왕이 되지 않은 설움을 달랬다 한다. 견재 정선은 이곳을 관할하는 양천현의 현감으로 근무할 때 선유봉의 아름다운..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7)인공섬 서래섬... 서래섬, 한강개발 과정에서 탄생한 강남서초의 인공섬

서래섬은 1981년 조성되었습니다. 서초동의 옛 이름은 '서리풀' 이었다. 물이 서리어 흐르는 벌판이란 뜻으로 '서릿벌’로도 불렸다. 현재의 강남성모병원부터 동작역까지 이르는 '반포천'이 서리풀을 가로질렀다. 서리풀은 이름 그대로 조선시대까지 상습 침수지역이었다. 반포천이 한강과 만나는 동작나루 앞에 기도(基島)라는 섬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바둑돌을 채취 하던 곳이라고 한다. 현재 동호대교 옆 동호 두뭇개의 모래섬 ‘저자도 처럼 '기도'도 1970년대초 시작된 강남 택지개발에 필요한 모래와 석재를 공급하느라 인간의 손에 의해 사라졌다. 1981년 서울올림픽 유치 결정 후 제2차 한강종합개발이 시작된다. 현재의 '콘크리트 둔치 한강'을 낳은 전두환식의 환경파괴 개발이었다. 올림픽 대로를 건설하는 것을 중심..

박해철 A.K.A. MC수석 - '겁나지가 않어’

야! 너네 탄압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난 괜찮아. 왜냐면 나는 겁나지가 않아. 한 개도 겁나지가 않아. 너네 민영화하고 싶은 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왜냐면 난 겁나지가 않아. 전혀 겁나지가 않아. 너네 편이 많겠니? 우리 편이 많겠니? 난 잘 모르겠지만 우리가 이렇게 한번 만나서 교섭을 해보자고. 너한텐 자본이 있고 또 공권력이 있어. 그러면 쫌 짜증 나겠지. 근데 입장을 한번 바꿔서 우리가 생각을 해보자고. 우리가 과연 너한테 겁이 날까? 우리가 공공성 노동권을 포기할까? 아니지. 세상에는 우리랑 연대하는 노동자 엄청 많거든. 같이 용산 쳐들어 가는거야? 누가 더 겁이 날까? 널까? 우릴까? 몰라 나는. 근데 세상에는 말이야 겁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거든요. 그게 누구냐면 바로 우리야.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6) 여의도 밤섬의 현대사... 밤섬, 폭파돼 사라졌다 스스로 부활한 서울 유일의 람사르 습지

밤섬 폭파돼 사라졌다 스스로 부활한 서울 유일의 람사르 습지 1945년 해방 직후 미군이 항공 촬영한 여의도 일대 한강사진이다. 일본이 만든 여의도비행장 활주로가 x로 뻗어있다. 여의도 옆 작은 섬이 밤섬이고 그 위가 선유도다. 밤섬은 고려시대에는 죄인을 가두던 곳이었다. 섬을 감옥으로 활용한 것이다. 조선 건국 이후 밤섬에는 양인들이 거주했다. 주로 고기잡이를 했고, 염소 방목 땅콩 재비 등을 생업으로 삼았다. 가뭄으로 한강물이 줄어들면 사람들은 밤섬과 여의도 사이를 걸어다녔다고 한다. 유인도의 마지막 해인 1967년의 조사를 보면 78세대 443명의 사람들이 살았다. 1968년 밤섬은 무인도가 됐다. 산업화와 한강 개발 때문이었다. 박정희 정권은 여의도를 개발하기 위해 여의도 주변을 제방(윤중제)으로..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5) 잠실의 현대사 잠실은 1971년까지 한강의 섬, 잠실섬이었다

2007년 한강- 탄천 합수부 옆 삼성동으로 이사한 후 첫 한강걷기가 합수부로부터 잠실철교까지 (3.5km)였다. 90년대 초반 잠실주공아파트 후배 집에 잠시 살았던 기억을 제외하면 잠실은 낯선 곳이었다. 조선시대 왕족과 사대부들의 의복재료인 비단 (일반 백성들은 목화에서 뽑은 실로 만든 무명옷을 주로 입었다)을 생산하는 양잠업에 필수인 뽕나무밭이 국가의 관리 하에 한양성 인근에 가장 넓게 분포하던 곳이라하여 잠실이라고 명명됐다. 1970년대부터 잠실은 올림픽경기장과 아파트단지, 택지로 대규모 개발이 이뤄졌는데 대규모 개발 직전에 큰 변화가 있었다. 1970년까지 한강의 섬이었던 잠실섬이 1971년 공유수면 매립사업의 결과 더 이상 섬이 아니라 육지의 일부가 되어 강남지역에 편입된 것이다. 잠실이 섬이었..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4) 행주산성과 방화대교 ... 행주산과 닮은꼴의 방화대교 아치트러스

... 방화대교는 인천공항으로 직통하는 한강다리다. 1999년 민자사업으로 준공되었고 통행료를 내야 건널 수 있는 유일한 한강다리다. 총연장 2559m, 왕복 4차선의 자동차 전용 교량이다. 방화대교 디자인엔 중앙부 아치트러스가 돋보인다. 서울 서쪽의 방화대교와 동쪽의 구리암사대교의 아치트러스는 쌍둥이처럼 닮았다. 건설사 측은 방화대교의 아치트러스를 “비행기 이 착륙을 형상화한 디자인”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아무리 살펴봐도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나는 방화대교의 아치트러스가 다리 북단의 행주산(덕양산)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첫 느낌을 아직도 갖고 있다. 나는 건설사의 디자인 설명에 설득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방화대교의 디자인을 행주대첩으로 유명한 행주산의 모습을 구현한 디자인이라고만 받아..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3) 오두산 통일전망대 ... 광개토태왕, 수군 상륙작전으로 백제 영토 한강 하구 오두산성 점령하다

광개토태왕 수군 상륙작전으로 백제 영토 한강 하구 오두산성 점령하다. 고국양왕의 뒤를 이어 371년 즉위한 청년 황제 광개토왕은 즉위 다음 해인 392년 백제를 공격해 황대호 강화섬을 점령한다. 할아버지 고국원왕이 백제 근초고왕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후 백제의 영토가 되었던 황해도와 예성강 일대의 실지를 회복하며 창끝을 백제로 겨눴다. 백제 16대 진사왕과 벌인 392년 첫 전쟁에서 예성강과 강화섬을 장악한 광개토태왕은 대담한 전략으로 396년 제2차 백제 정벌에 나선다. 광개토태왕이 빼든 전략은 수군을 활용한 상륙작전이었다. 고구려 수군은 황해도에서 출발 강화섬을 거쳐 오두산성(또는 관미성이란 학설도 있다)에 기습상륙했다. 수군 전력을 충분히 준비하지 않았다면 강화섬을 미리 점령해놓지 않았다면 시도하기 ..

스물다섯스물하나 엄마는 사이다

학생들 상습적으로 폭행하는 학교가 여기죠? 어? 저기 있네. 폭력 교사! 정작 사과할 사람은 뻔뻔하게 자기 자리 지키고 앉아있으면서 우리 딸한텐 사과하라고 그랬다면서요. 그러고도 당신이 선생이야? .. 진정이 되겠어요, 지금? 당신도 이런 선생 감싸고 도는 거 보면 한통속이잖아. 우리 승환이야, 이 딴 학교 자퇴한다고 뭐 인생에 흠집이 나겠어? 자퇴 서류 갖고 와요, 당장 싸인하게. 그리고 당신! 지웅한테 사과해. 갠 내 아들 같은 애야. 사과 안 하면, 당신이 지웅이를 어떻게 팼는지 학부모회의에 정식으로 고발할 겁니다. 이런 망할 놈의 학교에 내 딸을 맡겼다니. 내 평생 이런 수치가 없네. 자퇴 서류 안 갖고 와요? (우와, 나 엄마 닮았네!)

백상예술대상 조현철 TV부문 조연상 수상소감

군대 내 폭력과 부조리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D.P.’에서 조석봉 역을 연기한 배우 조현철이 백상예술대상 수상소감 -- 지금 저희 아버지가 투병 중이세요. 아마 진통제를 맞고 시상식을 보고 계실지는 모르겠는데 이런 자리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좀 지루할 수도 있겠지만 죽음을 앞둔 아버지에게 조금 용기를 드리고자 잠시 시간을 할애하겠습니다. 아빠가 눈을 조금만 돌리면 마당 창밖으로 빨간꽃이 보이잖아. 그거 할머니야. 할머니가 거기 있으니까 아빠가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죽음이라는 게 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냥 단순히 존재 양식의 변화인 거잖아. 작년 한 해 동안 내 장편 영화 를 찍으면서 나는 분명히 세월호 아이들이 여기에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어. 그리고 그 영화를 준비..

[최인호TV] 아기가 지옥행 고지받은, 그런 사건이 뭘까요?

연상호의 에서 반드시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려고 덮어버리려고 증거 인멸하려고 하는 사건이 아기가 지옥행 고지받은 거잖아요. 그런 사건이 뭘까요? --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이라고 공인한 것! 추미애 장관을 자른 것! 추미애 장관의 징계가 성공하기 일보 직전에 있을 때 절차적 정의를 내세워서 브레이크 건 것! 재난지원금에 대해서 내각의 판단을 신뢰한다면서 재난지원금 지급을 거부한 것! 특수부를 대검 핵심에 모두 중용해놓고서 검찰개혁을 얘기한 것! 전시재정을 말해놓고 국채를 상환한 것! 등등은 아기가 지옥행 고지받는 것처럼 반드시 덮어야 하는 절대로 언급하면 안 되는 사건이죠.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지 (2) 한강 노량진 배다리

한강 인문지리지 제2편... 1790년 정조의 배다리, 1900년 한강철교 1917년 한강대교로... 1776년 25살의 청년임금 정조는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일성을 내뿜으며 왕위에 올랐다. 사도세자를 죽인 할아버지 영조의 유언인 “사도세자를 추승하지 말라”에 대한 도전이었다. 신하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강한 왕권을 세우겠다는 포부가 담겨 있었다. 정도 13년(1789년),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서울시립대의 뒷산인 배봉산에서 수원으로 옮겼다. 무덤의 이름도 왕릉의 의미를 담은 ‘융릉’으로 고쳤다. 융릉의 조성은 1794년부터 시작된 수원 화성 축성의 밑그림을 놓은 것이었다. 정약용의 책임 아래 융릉이 조성되자 1790년부터 정조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기일마다 한강을 건너..

[전상훈TV] 한강 인문지리 (1) 동호 두뭇개

세종 1년, 한강 동호 두뭇개에서 대마도 정벌군 출정하다. -- 세종1년(1419) 5월 18일 세종과 상왕 태종이 도성 밖 동남쪽 5리 거리에 있는 동호 두뭇개에서 이종무 장군을 사령관(삼군도체찰사)으로 임명하고 대마도 정벌군의 여덟 장수와 병사들을 전송했다. 당시 군권을 쥐고 있던 태종이 장수와 군관들에게 활과 화살을 내리고, 환관에 명하여 술을 치게 했다. 현재 옥수역 인근이 두뭇개이다. 두뭇개는 두 물이 만나는 곳이란 뜻의 우리말이다. 1389년(고려 창왕 1년) 1월 박위 장군의 1차 대마도 정벌, 1396년(태조5년) 12월 김시형 장군의 2차 대마도 정벌에 이은 제3차 대마도 정벌이다. 태종과 세종의 명을 받든 이종무 장군을 전함을 타고 서해를 거쳐 거제도 남쪽 주원방포에 도착한 후 대기 중..

[전상훈TV] 전쟁의 판도를 바꾼 작은 전투 (2) 곽주성 탈환 전투(1010년)

곽주성 탈환 전투 제2차 고려 – 거란전쟁(1010년)의 판도를 바꾸다. # 고려 – 거란 1차 전쟁 요약 993년 소손녕이 지휘하는 자칭 80만, 실제 10만의 거란군이 침공했다. 발해 유민 출신 중랑장 대도수가 지휘하는 고려군이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했다. 안융진 전투에서 패배란 거란군의 예기가 크게 꺾였다. 서희가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협정을 체결했다. 고려는 압록강 이남에서 청천강 이북 지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강동 6주 29성을 설치해 거란의 재침에 대비했다. 고려의 영토가 청천강 이북부터 압록강 이남 지역까지 확장됐다. # 곽주성 탈환 전투 (제2차 고려 – 거란 전쟁, 1010년) 1010년 거란의 성종이 40만 대군을 직접 지휘하여 고려를 침공했다. 강조의 정변(1009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