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으로의 수출 규제를 강화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본격적으로 보복에 나선 것으로 풀이됩니다./
국가와 국가 간의 약속인 것입니다.
이 약속을 어긴다면 어떻게 되는가.
-아베 신조
‘이것으로 한·일간 청구원에 관한 문제는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
-1965, 한일청구권 협정 中
굴욕적 한일협정을 지켜보던
서른 일곱
금기된 연구를 시작한다.
퇴각하던 일본군 병사가 내게 물었다.
“우리는 졌다. 넌 어떻게 생각하나?”
“예, 조선이 독립하게 돼서 기쁩니다.”
퇴각하는 일본군이 남긴 한마디
“20년 후에 만나자”
-임종국, <실론친일파> 中
일본 정부가 한국에 건넨
피해 배상금 ‘5억 달러’
독립 축하금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더니
정말 20년 만에 놈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는구나.
저들은 일개 병사조차도
20년 후에 다시 만나자는 신념을 갖고 있었는데
우리는 장관이란 사람이
‘제 2의 이완용이가 될 지언정’
회담을 타결하겠다면
그건 대체 어느 나라를 위한
한일회담이란 말인가?
단숨에 써내려간 원고 2000매
그야말로 세상에 없던 책
<감자> 김동인
“일본인과 조선인은 합체된 단일민족이다.”
-‘감격과 긴장’ 매일신보, 1942.1.23.
<탁류> 채만식
“나도 오늘부터는 황국신민으로 할 노릇을 다 하는 백성이다.”
-‘홍대하옵신 성은’ 매일 신보, 1943.8.3.
<무정> 이광수
신의 나라, 천황의 나라, 미와 사랑의 나라
이토지, 이 백성으로써 만드리라.
새로운 세계- 황도의 대동아
-‘전망’ 녹기, 1943년 1월호
당시 금기에 가까웠던 친일연구를
그것도 당대 문학의 참 선구자들이라고 칭송받던 선배들을 향해서
아주 정면으로 날린 역사의 공소장이었죠.
부친 임문호, 스승 유진오의
친일행적까지 기술한
<친일문학론>
그러나 철저히 외면당한
<친일문학론>
“어느 순간에 한번 실수라면 실수라고나 할까
그걸 가지고 70년 동안의 선생님 업적을 다 매도하는 건...”
“우리 아버지가 친일파라 할지라도
자식이 됐으면 아니라고 하는 쪽으로 연구를 해서 내놔야지...”
친일한 일제하의 행위가 문제가 아니라
참회와 반성이 없었다는
해방 후의 현실이 문제였다.
이 문제에 대한 발본색원의 과정이 없는 한
민족사회의 기강은 헛말이다.
-임종국 유고글 中
<총독부 관보> ‘35년분’ 2만 매 이상 복사
복사가 어려운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0년 분’
일일이 ‘필사’
생계가 어려운 와중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친일 연구’
그가 남긴
친일인명카드 1만2천여 장의 결실
친일인명사전
배반의 역사에 맞서 싸웠던
친일문제연구가
중뿔난 짓이었어도 누군가 했어야 할 일이었다면
내 산자리가 허망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임종국
(1929.10.26~1989.11.12)
김영옥
임종국을 기억하여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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