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좀 주시오.”
“고향에 좀 보내주시오.”
일제시대, 일본과 만주 등
토목공사나 탄광에서 혹사당한 조선인들
1939년에서 1945년 사이에만
약 15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매일 합숙소에서 작업장까지 끌려 다녔다.
병으로 일할 수 없는 자는 학살되었다.
때론 숨이 아직 남아 있는데도
생매장을 당했다.
참혹한 조선인 강제연행의 진상을
최초로 고발한 한 권의 책
이 책을 쓴 박경식 선생님은
조선인 강제징용문제를 조사하기 위해서
일본 전역을 다니셨다는데요
공사 현장이나 탄광을 일일이 찾아다니시고
생존자들을 만나고 치열하고 철저하게 증거들을 모았다고 합니다.
일본의 여러 광산이나 토목공사 현장 등에
동포의 유골이 수 없이 묻혀진 채로 있다고 생각하면
나는 이런 잔학한 일을 망설임 없이 자행하고
어떤 반성의 빛도 없는 사람들에 대해
정의와 인도의 이름으로 고발하고 싶다.
-박경식
유리바 탄광
1945년에 동포수가 약 1만 명을 돌파했다.
1일 2교대로 12시간 노동했으며
갱도 곳곳에는 감시가 세워져 있었다.
갱내에서는 자주 연장이나 채찍으로 때리는 소리와
용서해달라는 비통한 부르짖음이 메아리쳐
마치 생지옥 같았다고 한다.
일본 나가노현
조선인 6천여 명 강제연행
공습에 대비
일황 등을 대피시키기 위해 만든 거대한 지하 동굴
강제동원 된 조선인이 동굴 벽에 남긴 흔적
이곳에 진상을 최초로 고발한 이도
박경식이었습니다.
여기에 강제 연행된 동포 수천 명이 군의 감시 아래 노동을 했다.
이들 중 기밀 장소를 판 수백 명은
공사가 거의 끝날 무렵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이는 당시 군부의 지배층이 기밀을 은폐하기 위해
우리 동포를 학살했다고 전해진다.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조선인 강제연행을 고발하는 강연을
쉴 새 없이 이어간
박경식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지만
일흔이 넘어서도 벼룩시장을 누비며
단 한 장의 자료라도 더 찾기 위해 노력했던
박경식
2018.10.30 대한민국 대법원 확정판결
“일본기업은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각 1억 원 씩 배상하라”
다른 민족을 압박하는 민족은
자유로울 수 없다.
박경식
(1922.12.7~1998.2.12)
이소연
박경식을 기억하여 기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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