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공부 2

[명상의 모든 것] 마음공부가 다 되었다고 믿으면 위험한 이유

Buddhastudy 2022. 4. 28. 19:04

 

 

 

가장 많은 오류가

사실 의식과 마음을 구분하지 않는 데서 옵니다.

의식과 마음은 다른 것입니다.

 

연결되어 있기는 하지만 차이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

그런 오류를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순수의식, 참나가 의식일 뿐이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실은 원래 의식 자체가 순수의식이지만

그것이 평상시에는 짜장처럼 면과 소스가 뒤범벅되어서

그것을 알 수 없는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인식을 못 하는 것일 뿐이고

사실 밀가루라는 형태, 본질인 순수의식은 항상 존재하고 있다,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같은 비유이기는 한데

이번에는 단팥빵에 비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자꾸 먹는 거로 비유를 하느냐이러실 수가 있는데

이래야 촬영 끝나고 나서도 먹을 것이 남기 때문에

먹는 게 남는 거죠.

 

아무튼 이렇게 단팥빵에도 비유를 할 수가 있습니다.

단팥빵이, 우리가 단팥빵을 먹을 때

평상시에 빵 맛을 그냥 느끼지는 않습니다.

단팥 맛을 느끼면서 먹죠.

 

맹빵

맹빵이라고 하죠 (ex. 맹물)

맹빵의 맛을 느끼지는 못합니다.

그렇지만 단팥빵을 먹을 때에도 분명히 이렇게 빵 부분은 존재하고 있는 거죠.

만약에 우리가 식빵을 먹는다고 하면 확실히 빵 맛을 알겠죠.

빵만 있으니까.

그런데 단팥빵이나 크림빵을 먹을 때에는

단팥 맛이나 크림 맛에 가려서 빵 맛을 온전히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평상시 의식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식 자체가, 빵에 비유를 하면

그 의식이 항상 무엇인가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함께 어우러져서 단팥맛, 크림 맛처럼 그 빵 맛 자체를 느끼지 못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그러다가 프로그램을 통해서 느껴보시면

단팥으로부터 분리가 돼서

아 이렇게 의식이라는 것이 별도로 존재할 수 있구나

그렇기 때문에 순수의식이라고 할 수 있구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빵이, 단팥빵이 전부인 줄만 알고 있다가

요렇게 빵 맛을 보면

아 이렇게 맹빵이라고 하는구나라고 하는 거랑 같죠.

 

의식도 마찬가지인데

의식을 '맹의식'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순수의식이라고 표현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 참나, 순수의식이

의식일 뿐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

 

이 의식의 속성을 알고 공부에 제대로 활용하면

많은 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반면에 이것의 한계도 알고 적절히 활용할 수 있어야 하겠는데요

(유의해야할) 첫 번째로는 지나치게 신비주의로 가는 것입니다.

 

보통 이것을 지나치게 신비하게 과장해서

참나, 순수의식이 굉장히 대단한 것인 것처럼 하면서

이것이면 다 될 것처럼 하다 보면

자칫 사람을 현혹하고 종교적 분위기로도 갈 수도 있고

오류를 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실 체험하지 못한 입장에서는

굉장히 대단하게 생각될 수가 있죠, 참나나 순수의식이라는 것이.

 

그렇지만 앞에서 해 보신 것처럼

방법만 제대로 만나면

1시간 정도만 해도 충분히 체험하실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신비한 것으로 포장해서

필요 이상의 것을 요구하기도 하고, 자칫 현혹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가장 많은 오류가

사실 의식과 마음을 구분하지 않는 데서 옵니다.

 

제가 마무리할 때

의식이 순수해지면 마음공부가 쉬워집니다.”라고

의식과 마음을 구분해서 말씀드리고 있죠.

이 부분은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리도록 하겠는데요

 

사실 의식과 마음은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순수의식, 참나를 느껴보시면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도 분리되어있고

생각으로부터도 분리되어있고

이 자리에는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은 것 같고

이렇게 느끼다 보니까

이것이 공부가 다 된 것처럼 자칫 착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다 됐다, 나는 공부를 마쳤다.

이렇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아니고 이제 시작이죠.

 

이 의식을 통해서 마음을 계속 탐구하고 바꿔 가는 과정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항상,

내가 다 알았다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자세, 갈고 닦는 자세로 임할 수가 있게 되겠죠

 

내가 알았다라고 생각하면 더 배우려고 안 하게 되죠.

지구에 산다는 것이 항상 배움의 연속인데 그렇게 되면 정체가 오게 됩니다.

그리고 또 많이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 순수의식, 참나 체험을 한번 해 보시면

그 순간에는 굉장히 많은 변화를 겪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의식적으로 그렇죠.

텅 빈 자리를 경험하기도 하고 그랬으니까.

 

그런데 이 경험이 오래 안 갑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생활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런 것들이 다 잊어버려지고

원래 상태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의식으로만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크게 오래 가지를 못합니다.

마음이 바뀌어야 그것이 근본이라고 하는데요

그것은 행실로 나타나죠.

 

아무리 참나, 순수의식을 경험했다고 해도

행실이 그렇게 모범적이지 못하면 공부가 많이 됐다고 할 수 없겠습니다.

항상 얼마나 비워졌는가?

얼마나 겸손한가가?

마음의 공부된 척도라고 하죠.

 

비유를 하자면

마음이 바다, 대양과 같은 것이라고 하면

의식은 파도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부분도 (나중에) 자세히 말씀드리겠는데요.

 

그렇기 때문에 의식을 경험해서 그 맛을 봤다고 해도

바다(마음)하고 맛이 같을 수가 있습니다.

, 내가 파도 맛을 봤더니 짜기도 하고, 파도 색깔은 파래요

이런 식으로 얘기할 수가 있어서

마치 내가 바다(파도)를 아는 것과

기존의 바다에 대한 표현과 동일하기 때문에

바다를 아는 것과 같다라고 착각을 할 수가 있는데

 

의식과 마음이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차이가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

그런 오류를 줄여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의식으로 하는 방법이나 수행 방법들이 수많은 방법이 있죠.

그 하나하나의 방법들이 각각의 길이라고 본다면

사실은 그 길이 갈 수 있는 한계가 각각 다릅니다.

 

어떤 길은 동네 뒷동산으로 나 있는 길이 있고

어떤 길은 에베레스트산처럼 높은 산으로 가는 길이 있을 수가 있죠.

물론 동네 뒷산으로 가는 길도 오르는 길은 길이기 때문에

오르면서 주변의 환경에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하기 때문에

변화가 있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한계가, 기껏 정상에 올라가도 동네를 구경할 수 있는 정도밖에 시야가 열리지 않는 거지요.

이 산이 아닌게벼~” 하면 또 다른 산을 올라야 되는 경우도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왕에 수행한다고 하면

우주를 내려다 볼 수 있을 정도의 높이를 가진 산에 오를 수 있어야 하겠는데

그 정도 산에 올라가려면 굉장히 준비를 많이 해야겠죠.

 

우리가 에베레스트산에 오르려면

산소 호흡기, 캠프 등 여러 가지를 준비해야 하는 것처럼

우주를 조망할 수 있는 그런 길로 오르려면

호흡을 비롯한 마음공부, 그리고 몸의 건강

기타 여러 가지 것들을 갖추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준비과정에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든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것이 가장 높이 갈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보통 힘들고 오래 걸리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것이 가장 반듯하게

그리고 멀리 갈 수 있는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식이 순수해지면 마음공부가 쉬워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