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람을 대할 때 예의를 갖춰서 매너 있게 대하려고 하는데
요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똑같이 행동해서
내가 느낀 불쾌감을 되갚아 주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이런 제가 바보 같다는 걸 알지만
이 생각이 멈춰지지 않아서 고민입니다.//
그런데 왜 스스로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
다른 사람이 질문자에게 바보라고 말을 해도
내가 왜 바보냐고 따져야지
아무도 질문자를 바보라고 하지 않는데
왜 스스로 바보라고 해요?
...
저는 무시하라고 한 적이 없어요.
...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하세요.
그럼요.
제가 참으라는 말을 했습니까?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가서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잘못을 지적하고 싶으면 지적해도 됩니다.
(그러면 가서 싸운 후에 주위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물으면
법륜스님이 이렇게 하라고 했다고 말해도 되나요?)
본인이 가서 싸울 생각이 전혀 없는데
제가 가서 싸우라고 했다면 그 말도 맞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 본인이 지금 따지고 싶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제가 따지고 싶으면 따지라고 말해준 겁니다.
그런데 왜 법륜스님이 시켜서 한 것처럼 말해요?
예를 들어
‘이거 먹어도 되나요?’ 라고 물어서 제가
‘그러세요’ 하고 대답하고,
‘이거 안 먹어도 되나요?’ 라고 물어서 또 제가
‘그러세요’ 하고 대답하는 것은
결국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뜻이에요.
(저는 제가 화가 많은 게 문제라고 생각했는데요.
화가 나면 상대방에게
내가 화가 난 이유를 알려주어도 되나요?)
그럼요. 그렇게 해도 아무 문제가 없어요.
관계를 안 풀려면 그렇게 해도 됩니다.
따지고 싶으면 따지세요.
언성이 높아지면 어떻고, 머리채를 잡으면 어때요?
그렇게 한 후에 폭행죄로 감옥에 가면 되죠.
이걸 ‘과보’라고 해요.
자기가 한 행동에 대한 과보를 받아들이면 됩니다.
대신에 내가 착해서
싸우지 않은 것처럼 말하지 마세요.
사실은 나도 싸우고 싶지만
그렇게 한 다음에 벌어질 일들을 책임지지 못할 것 같아서
안 하는 겁니다.
그러니 한번 성질대로 해보라는 거예요.
성질대로 해보고 난 다음에
다시 평가를 해보는 겁니다.
상대방이 마음에 안 들어도 참는 게 나한테 좋은지
아니면 윤리와 도덕을 떠나서 성질대로 하는 게 좋은지
둘 중에 어느 게 좋은지
한번 비교해 보는 거예요.
가끔은 성질대로 해보는 게 좋을 때도 있어요.
손해가 나도 자기 성질대로 하고 나면
속이 시원할 수가 있거든요.
그런데 성질대로 하니까 후회가 된다면
다음부터는 성질대로 안 해야 되는 겁니다.
누가 하라고 하거나, 하지 말라고 해서 멈추는 게 아닙니다.
윤리와 도덕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안 하는 것도 아니고요.
그렇게 하니 손해가 나서 안 하는 것일 뿐입니다.
윤리와 도덕이라는 게 본래부터 없었어요.
오랫동안 여러 사람이 경험을 해보니까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게 더 손해라는 걸 알고 나서
윤리와 도덕이 생겨난 겁니다.
예를 들어서
10명이 한 방에서 사는 공동체에서
누가 자꾸 물건을 훔친다고 합시다.
나만 훔칠 수 있고, 다른 사람은 훔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면
나한테 이득이에요.
그런데 열린 공동체 안에서는
내가 훔치면 다른 사람도 훔치게 됩니다.
이렇게 공동체 안에서 서로 훔치면 혼란이 발생하니까
남의 물건을 훔치지 말라는 윤리가 생긴 거예요.
남을 때리지 말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화가 나서 상대방을 때리면
당장은 속이 시원하지만
상대방도 나를 때리기 때문에 싸움이 됩니다.
복수를 할 때는 한 대 맞고 두 대 때려야 분이 풀리잖아요.
그러면 상대방도 복수심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남을 때리지 말라는 윤리가 생긴 거예요.
이렇게 윤리와 도덕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 생긴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생긴 것이 아니에요.
만약 질문자가
‘어떤 여성을 안고 싶은데 안아도 됩니까?’ 하고 물으면
저는 ‘안고 싶으면 안으세요.
대신에 성추행범으로 잡혀가서 1년 간 감옥에서 사세요’ 하고 대답합니다.
1년간 감옥살이하면서
‘그래도 안고 싶은 사람을 한 번 안아봤으니 감옥살이할 만하다’
이렇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괜찮아요.
그런데 감옥살이하면서
‘그때 잠깐 참을 걸’ 하는 후회가 된다면
안고 싶다고 해서 안으면 안 돼요.
왜냐하면 나한테 손해니까요.
마찬가지로 ‘화를 내고 싶은데 왜 참아야 됩니까?’ 하고 물으면
저는 화를 내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그 결과를 비교해 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도 손해이고, 저것도 손해지만
저것이 더 손해인 걸 경험하게 되면
최악을 피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한번 해보라는 거예요.
‘법륜스님이 하라고 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내가 한 행동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합니다.
상대방의 행동이 불쾌하다고 해서 화를 내거나 따지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볼 때
그 사람이 잘못했다는 것과
그 사람이 볼 때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볼 때는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사람이 볼 때는
자기가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내가 화를 내면 상대방이 오히려 더 크게 화를 낼 수 있습니다.
‘이게 미쳤나’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 나는
‘본인이 잘못을 해놓고 잘못한 줄도 모르네’ 하는 생각이 들어서
화가 더 납니다.
지금 국민들이 화가 더 난 이유가 뭡니까?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해서 잠도 못 자게 해놓고
뻔뻔하게 나오니까 화가 더 나는 겁니다.
잘못했다고 고개라도 숙였으면 좀 진정됐을 텐데
‘내가 뭘 잘못했냐’ 하는 식으로 나오니까
국민들이 열받아서 지금 거리로 뛰쳐나오는 거잖아요.
이렇게 갈등이 심할 때는
서로 관점이 다른 겁니다.
갈등을 제일 쉽게 푸는 방법은
‘그 사람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다’ 하고 이해하는 겁니다.
그 사람은 윤리와 도덕을 잘 모르거나
윤리와 도덕을 알더라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럴 수도 있다고 받아들이면
내 마음이 편안해져요.
그런데 ‘이건 좀 따져봐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면
따져도 된다는 겁니다.
차를 운전해 보면
차선을 변경할 일이 생기잖아요.
가끔 골목에 불법주차를 해야 할 일도 생깁니다.
정말 급한 상황일 때는
고속도로에서 갓길로 달리고 싶을 때도 있잖아요.
그런데 남이 그러면 엄청나게 화를 냅니다.
‘왜 차선을 변경하느냐,
‘여기에 주차를 하면 어떻게 하느냐’
‘갓길로 가면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화를 냅니다. 내가 할 때는
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고,
남이 할 때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불법주차를 해서 딱지를 붙이면
‘저 앞에 있는 차는 왜 안 붙이고 내 차만 붙이냐’ 하고 따집니다.
내가 법을 어긴 것에 대해서만 처벌을 받으면 되는데
남을 먼저 탓합니다.
이런 생각이 바로 어린아이와 같은 생각이에요.
어린아이들은 잘못에 대해 지적을 하면 꼭 변명을 합니다.
왜 늦게 들어왔느냐고 하면
‘아빠는 왜 늦었어요?’ 하고 말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는 법이 없고 반드시 변명을 합니다.
TV 보지 말라고 하면
‘엄마는 왜 TV를 봐요?’ 하고 따지는 게 바로 어린아이들입니다.
진리란 특별한 게 아니에요.
나에게 견주어 상대를 이해하고,
상대에게 견주어 나를 이해하는 것이 진리입니다.
가능하면 내 감정에 치우쳐서 사로잡히지 않아야 합니다.
사로잡힌 상태에서는
눈으로 봐도 보는 게 아니고,
귀로 들어도 들은 게 아니에요.
이것을 앎이 없는 상태라고 해서
‘무지’라고 표현합니다.
이 무지로 인해서 괴로움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화가 나고 슬픔이 생기고 온갖 괴로움이 생길 때
나에게 견주어 상대를 이해하고,
상대에게 견주어 나를 보면
사로잡힘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나에게만 집중되어 있던 상태에서 벗어나면
눈이 보이고
귀가 들려서 바른
앎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지혜’라고 합니다.
지혜가 생겨나면
괴로울 일이 없어져 버립니다. 이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에요.
일상속에서
어리석음과 지혜로움이 찰나마다 일어납니다.
금방 지혜로워서 밝아졌다가
곧바로 어리석어져서 화를 냈다가
이렇게 반복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항상 깨어있으라’ 하고 말하는 겁니다.
상대가 틀렸다는 생각이 강할 때
사로잡힘이 심해집니다.
상대를 이해하면 사로잡힘이 사라집니다.
사로잡힘이 강할 때는
옆에서 아무리 말해도 안 들리고
아무리 봐도 눈에 안 들어와요.
여러분들이 가장 성질이 많이 났을 때
‘내가 사로잡혔구나’ 하고 알아차릴 수 있으면
깨달음의 길이 열립니다.
그런데 성질이 났을 때는
대부분 그렇게 안 됩니다.
평상시에는 스님이 이렇게 이야기하면
다들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누가 옆에서 쿡 찔렀을 때는
확 사로잡혀 버리기 때문에 안 돼요.
그래서 옛말에 옆에서 화를 돋워 주는 사람이 있으면
수행이 잘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옆에서 성질이 나도록 자꾸 건드려 주면
자주 사로잡히게 되고
그 속에서 알아차리는 연습을 자꾸 하다 보면
점점 자유로워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처한 환경이 나쁠수록
관점만 잘 잡으면
수행이 더 깊어집니다.
왜냐하면 연습할 기회가 많이 생기기 때문이에요.
옆에서 잘해주면 사로잡힐 일이 별로 없습니다.
내가 잘 알아차려서 화가 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좋아서 화가 나지 않는 겁니다.
수행은 상황이 나쁜 가운데에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자기 힘을 키우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러니 확 사로잡히거나 벌컥 화가 날 때
내 생각을 내려놓는 연습을 자꾸 하면
훨씬 빠르게 수행의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말이 쉽지 잘 안 됩니다.
깨달음을 얻기 직전일수록 더 어리석어집니다.
새벽이 가까워질수록 더 어둡고
해뜨기 직전이 가장 춥듯이
깨닫기 직전에 가장 어리석을 수가 있어요.
그래서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라고 하는 겁니다.
가장 어두울 때 한 발자국만 더 나가면
밝은 세계를 볼 수 있는데
우리는 늘 막다른 골목에서 괴로워하다가
똑같은 일을 수천수만 번 반복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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