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법륜스님의 하루

[법륜스님의 하루] 부처님의 성도, 경전은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요? (2025.05.27.)

Buddhastudy 2025. 6. 2. 19:57

 

부처님의 깨달음 (성도) [01:57]:

  •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6년간의 고행 끝에 중도를 발견하고 편안한 상태로 깨달음을 얻기까지의 과정이 설명되었습니다.
  • 이 과정에서 마왕의 세 가지 유혹을 물리치는 이야기가 경전 기록을 바탕으로 상세하게 묘사되었습니다.
    • 첫 번째 유혹은 마왕의 세 딸을 통한 욕망에 대한 유혹으로, 부처님은 이를 꿰뚫어 보고 물리쳤습니다 [04:50].
    • 두 번째 유혹은 마왕의 천 명 아들을 통한 **성냄(협박)**에 대한 유혹으로, 부처님의 자비심으로 화살이 연꽃으로 변하며 물리쳐졌습니다 [07:23].
    • 세 번째 유혹은 자재천왕이 직접 나타나 전륜성왕이나 자재천왕의 자리를 제안하는 **어리석음(궁극적인 자리)**에 대한 유혹으로, 부처님은 "바라는 것이 없다"고 답하며 이를 물리쳤습니다 [08:29].
  • 이 세 가지 유혹을 물리친 것은 결국 탐진치 삼독(번뇌의 세 가지 근원)의 뿌리가 뽑히는 과정을 상징한다고 설명되었습니다 [10:50].
  • 새벽 먼동이 트고 샛별이 빛나는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고 경전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11:18].

 

부처님은 보리수나무 아래에 길상초(吉祥草)를 깔고 편안히 앉았습니다.

지난 6년 동안 고행을 할 때는

나는 마왕의 유혹에 결코 항복하지 않겠다.’ 하고 이를 악물고 결심했지만

이제는 중도를 발견했기 때문에 수행의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부처님은 더 이상 애써 저항할 필요가 없는 편안한 상태로 정진에 임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 하는 마음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각오와 결심이라기보다

다만 그런 관점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성도, 경전은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요?

 

옆에서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7주의 시간이 흘러갔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지극히 편안한 상태

즉 누워 있는 것보다도 더한 편안함 속에 있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하루가 지나든 한 달이 지나든 상관이 없었던 거예요.

결과적으로는 49, 즉 칠칠일(七七日)의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가운데 부처님의 알아차림은 더욱 깊어지고 분명해졌습니다.

과거에 살아온 삶이 환히 다 보였습니다.

마치 영화 필름처럼 과거가 지나가고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도 다 보였습니다.

몸의 감각, 느낌, 그때 일어나는 마음 작용인 감정들이

모두 또렷하게 알아차려졌습니다.

그것은 마치 불투명한 벽이 투명해져서

모든 것이 환하게 드러나 보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이런 상태에 이르자

내면 밑바닥에 아직 남아 있던

욕망의 잔영, 성냄의 잔영, 어리석음의 잔영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또렷이 지켜보는 가운데

욕망의 잔영이 사라지고, 성냄의 잔영도 사라지고,

어리석음의 잔영도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렇게 모든 의심과 괴로움이 소멸되었습니다.

마침내 열반을 증득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일생을 기록한 경전의 작가는

이 장면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부처님은 깊은 선정에 들어

모든 욕망으로부터 벗어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때 하늘나라에서는 자재천(自在天)의 궁전이

마치 지진이 일어나듯 흔들렸다.’

 

욕계(欲界)에 속한 중생 가운데

한 사람이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경지에 이르자

자재천의 궁전이 무너지려고 했다는 겁니다.

그것은 욕계의 질서가 완전히 붕괴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자재천의 궁전이 지진이 나듯 흔들렸다고 묘사한 것입니다.

 

 

--즐거움도 결국 괴로움이다, 욕망의 뿌리가 뽑히는 순간

 

자재천왕은 이게 무슨 일인가?’

하며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살펴보니

저 아래 인간 세상에서 아주 티끌만 한 존재인 한 수행자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경지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욕계의 질서가 붕괴되는 큰일이 일어나고 있었던 거예요.

 

자재천왕은 아름다운 세 딸을 불러서

너희들은 가서 저 수행자를 유혹하여라.

그가 욕망을 따르게 해서 다시 이 욕계의 질서를 유지해야겠다.’라고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당근과 채찍 중에 당근 정책을 쓴 거예요.

자재천왕의 세 딸은 아름다운 몸을 드러낸 채

고타마의 주위를 돌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그를 유혹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봄날,

꽃 피고 새 우는 이 좋은 계절에

수행만 하다가 죽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수행자여, 우리의 아름다운 몸을 보소서.

우리 함께 욕락(欲樂)을 누려 봅시다.

당신이 추구하는 깨달음이란 불확실한 것입니다.

설령 깨달음을 얻는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젊은 날에는 우리와 실컷 욕락을 누리고

수행은 늙어서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수행은 그만두고 일어나세요.’

 

이것이 마왕의 유혹입니다.

그런데 마왕이 유혹하는 말들이 다 옳은 말 같죠.

여러분이 스님한테 질문하는 말과도 비슷합니다.

스님, 아내와 자식을 두고 출가하는 게 맞습니까?’

이런 말들이

결국 마왕이 유혹할 때 쓰는 언어거든요.

그래서 여러분은 다 자재천왕의 제자, 마왕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미 알아차림을 통해

()’()’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윤회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괴로움만 괴로움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즐거움도 괴로움임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이것을 고성제(苦聖諦)’라고 합니다.

 

마왕의 딸들이 아무리 유혹해도

부처님은 이미 의 본질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경전에는 부처님이 마왕의 아름다운 세 딸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나옵니다.

 

잘 채색된 항아리에 똥만 가득 들어 있는 것들아.’

 

여기서 채색된 항아리는 을 상징하고,

항아리 안에 든 똥은 를 상징합니다.

부처님은 락의 본질이 고임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에

채색된 항아리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이 조용히 마왕의 세 딸을 가리키며 직지(直指)하자,

그 여인들은 모두 노파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부끄러워하며 사라졌습니다.

부처님은 젊은 여인의 본질이

이빨 빠지고 머리도 하얀 노인의 모습임을 꿰뚫어 본 것입니다.

여기서도 젊은 여인은 을 상징하고

노파는 를 상징합니다.

경전에서는 부처님이 락이 곧 고임을 꿰뚫어 본 것을

이렇게 상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첫 번째 유혹이 실패하자

곧이어 마왕은 두 번째 전략을 펼칩니다.

당근 정책이 안 통하면 그다음에는 채찍을 쓰잖아요.

마왕의 두 번째 방법은 협박이었습니다.

 

마왕에게는 천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에게 수행자를 공격하여 무너뜨려라.’ 하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마왕의 아들들이 창을 던지고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부처님을 공격해 왔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럴 때 두려움과 분노가 일어나겠죠.

그러나 부처님은 이미 그런 것들로부터 벗어나 있었습니다.

고요함과 평정심을 유지하며 그들의 행위를 지켜보았습니다.

마왕의 아들이 쏜 화살은

부처님의 몸에 이르자 모두 연꽃으로 변해 떨어졌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위협해도

부처님은 성내지 않고 자비심으로 그들을 대했습니다.

그러자 마왕의 아들 천 명 중에 절반인 오백 명이 부처님께 항복하였습니다.

마왕은 이것도 안 통하는구나.’ 하고 아들들을 불러들였습니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어리석음의 뿌리가 뽑히는 순간

 

세 번째로는 드디어 자재천왕이 직접 모습을 드러냅니다.

사실 자재천왕은 기독교의 사탄처럼 악한 존재는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가 모두 원하는 최고의 신이에요.

그런데 수행적 관점에서는 최고의 방해꾼이 됩니다.

수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마왕(魔王)’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입니다.

마왕이 부처님에게 말합니다.

 

고타마시여, 그대가 추구하는 열반이란 없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얻을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하다가 죽어 버리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수행을 포기하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이 되게 해 주겠다.

전륜성왕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겠다면

나와 함께 하늘나라 자재천궁으로 가자.

내가 그대에게 자재천왕의 자리를 내주겠다.’

 

자재천왕은 자신이 그 자리를 갖는 것보다도

욕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욕계의 질서만 지킬 수만 있다면

자재천왕의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도 괜찮다는 거예요.

원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자리를 당신에게 줄 테니

이 질서만큼은 허물지 말라는 제안을 한 겁니다.

 

저라면 이 세 가지 유혹을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행동했을까 생각해 봤습니다.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아름다운 여인의 유혹이나 협박, 공갈 정도는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세 번째 유혹,

즉 내가 원하는 건 다 이루어진다는 자리를 준다고 하면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북한 주민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고 가자 지구에서 무참히 학살되는 사람들을 살려내기 위해서

그 힘을 쓰고자 할 것 같기 때문입니다.

 

해탈은 다음 생에 하고, 이번 생에서는 그들부터 우선 살리자.’

이런 생각이 들 소지가 다분합니다.

그 정도로 저는 아직 수행이 부족하다는 뜻이겠지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지만 부처님은 단호히 대답했습니다.

 

마왕이여, 나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다.’

 

이것은 반야심경에 나오는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와 같은 말입니다.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위대한 능력이나 궁극의 자리를 제시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부처님은 존재의 본질을 꿰뚫어 보았기 때문에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그 어떤 것에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이 이야기들을 해석해 보면,

첫 번째 이야기는 욕망의 뿌리가 뽑혔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성냄의 뿌리가 뽑혔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세 번째 이야기는 어리석음의 뿌리가 뽑혔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결국,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마왕이 던진 세 가지 유혹은

탐진치 삼독(三毒)의 뿌리가 뽑히는 과정을 묘사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일생을 기록한 경전의 작가는

성도(成道)의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새벽녘, 먼동이 트고 동쪽 하늘에 샛별이 빛나는 것을 보는 순간,

깨달음을 얻었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는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