싯다르타는 어떻게 해야 수행자들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의 자리에서 그냥 깨닫게 할 수 있는지 알아냈다.
그 길은 쉬우면 쉽고 어려우면 어려운 길이다.
가장 쉬우면서도 가장 어려운 수행
그것이 바로 불법인 것이다.
이제 싯다르타는 엄지손가락에 해당하는 가르침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너무 적거나 부실하면 엄지손가락은 올라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나치게 방대하고 현란하면 손가락 전체가 펴지게 되어
다시 주먹을 쥐기 어렵게 된다.
그래서 그는 깨달음에 꼭 칠요한 정수만을 모아 가르침의 체계를 세웠다.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苦이다.
苦는 자신을 괴롭혔던 생로병사일 수 있고
또는 차원의 한계에서 오는 무지에 대한 갈증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었이든 간에 삶과 존재에 대한 고를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그래야 깨달음에 대한 진정한 발원을 할 수 있다.
목숨을 다해 깨닫고자 하는 굳은 신념
이것이 바로 금강발원이다.
두 번째는 집이다.
왜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필요하다.
그건 바로 의식이 무언가에 붙게 됨으로써 실상을 왜곡시켜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 원인이 무지와 아집이다.
이것을 하나로 줄이면 무명이다.
무명이 명이 되면 착이 걷히면서 그 자체로 깨달음이다.
그래서 착에 벗어난다는 의미에서 무소주와 무소유, 일체무애한 해탈을 운운한다.
다만 그런 것들에도 착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그래야 싯다르타 자신이 이룬 것처럼 제자리로 돌아와 그냥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세 번째는 멸이다.
착의 힘을 빼다가 결국엔 그것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구체적인 수행법은 멸의 단계에서 나오는데 어떤 것을 쓰는 것이 좋을까?
싯다르타는 기존에 자신이 배웠던 모든 것이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무아로 착을 떼고, 위빠사나로 진아를 찾고, 불이의 반야를 깨워 절대성을 회복하고
나아가 그 모든 것에 머무름이 없게 되어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들 모두가 훌륭한 수행법이 될 것이다.
다만 그렇게 해도 착이 없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감함으로써
지극한 허무의 경계에 이르러야 한다.
그래야만 수행을 시작하기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다.
지극히 평범해서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
네 번째는 도이다.
(대부분 도를 팔정도라고 하는데
바른 마음으로 정진하라는 뜻 정도로 알고 넘어가면 된다.)
앞서 말한 멸의 수행을 하게 되면
어떤 이들은 평생동안 첫 번째 진아의 경지에도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럴진대 그 뒤의 절대나 해탈은 말해 무엇하랴.
그러니 어떤 성취를 목적으로 하지 a라고
수시로 제자리로 돌아올 필요가 있다.
엄지손가락을 있는 힘껏 끝까지 올리려 하지 말고
되는 데까지 올렸다가 접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행을 열심히 하고 다시 그것을 놓는다.
이런 일을 수시로 반복하며 수행하는 것이 도이다.
엄지손가락을 올리고 내리면서 주먹의 감각을 찾는 것처럼
불법을 세우고 부수는 일을 반복하면서 자신의 본래 모습인 실존을 깨닫는 것이다.
이렇게 고집멸도의 네 단계면
불법의 큰 갈래는 잡힌다.
이제 세세한 것을 덧붙여 보완하면 불법으로서 제구실을 하게 될 것이다.
싯다르타
그는 일찍이 없었던 깨달음의 길을 활짝 열어젖혔다.
기존에 알고 있던 깨달음의 경지가 고차원의 생각이 교묘하게 그려낸 허상이었음을 밝히고
있는 그대로의 참된 실존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가히 누가 있어 이런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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