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분별에 속지 마라.
1) 분별이란 무엇인가?
5차원 실존에 이르면 유, 무, 공을 비롯해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 체계가 모조리 부서진다.
2차원 평면 세계에서 3차원 입체 세계로 넘어오면
그동안 알고 있던 2차원의 지식들은 까마득한 먼 나라 얘기가 되고 만다.
그렇듯 실존은 가히 천지개벽을 억만 배 이상 하는 것보다 큰 충격을 몰고 온다.
세존은 세 명의 스승으로부터 진아와 절대, 그리고 해탈의 경지를 배웠지만
그건 모두 4차원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물론 3차원의 의식 구조에서 보면 4차원으로의 도약은 실로 이루 말할 수 없는 변화이다.
수행자들이 평생을 매진해도 도달하기 어려운
높고 높은 경지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세존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5차원 실존의 열매마저 움켜쥐었다.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두 개의 차원을 뚫고 실존에 이른 쾌거이다.
세존이 실존에 잠겨 있을 때 어떤 상태였을까?
그리고 다시 생각을 일으키기 위해 어떤 과정을 거쳤을까?
이 대목에 관한 얘기는 불경에 없다.
세존은 깨닫는 법에 대해서는 설하면서도 깨달은 이후에 대해선 침묵했다.
그건 수행자들이 깨달음의 상태를 관념으로 그려
허상에 사로 집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흘러 시운이 변했으니
나에 대한 변화 정도라도 밝힐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5차원 실존
이 상태에서 사물을 보면 평상시와 다름이 없다.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의 형태는 깨닫기 전이나 동일하다.
다만 한 가지 놀랍도록 달라진 것이 있으니
그건 바로 나이다.
나가 있긴 한데 존재하는 모든 것 자체이기에 매우 모호한 상태게 놓여 있게 된다.
물론 실존에 몰입해서 보면 그것이 너무 당연하여 일모의 의심도 내지 않는다.
하지만 형이하의 세계에서 돌이켜 보면 참으로 막연하기만 하다.
아무튼 실존이 나임에도 마치 원처럼 분명히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그 상태로 쭉 있다가 불현듯 나를 분명히 하려는 현상이 일어난다.
첫 번째로 등장하는 나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이다.
비유비무로 한정을 하자 나의 윤곽이 희미하게나마 그려진다.
하지만 이것 역시 모호하기는 매한가지다.
그래서 실존은 시야를 더 좁히게 되는데
이때 나오게 된 것이 유이면서 무인 것이다.
유와 무가 공존하는 형태의 나
앞선 비유비무 보다는 그럴듯해졌다.
이렇게 유와 무가 공존하는
다시 말해 모순된 것들이 하나의 유기체를 이루고 있는 세계를 일러
4차원이라 한다.
양자역학에 보면 소립자들이 상태중첩으로 존재하는 기이한 현상들이 나오는데
바로 4차원의 질서에 편승한 때문이다.
아무튼 오랜 수고 끝에
실존은 유와 무가 공존하는 형태의 나를 찾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형태의 나도 뭔가 찜찜한 구석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실존은 다시 한번 시야를 좁히게 되고
어느 순간 유와 무가 갈라져 어느 한쪽으로 결정된 세상이 펼쳐졌다.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3차원 세계이다.
이제 무는 배경 속으로 잠재되었고
보이고 만져지는 모든 것은 유뿐이다.
실존은 무수한 유속에 내재 되어 그것을 나라고 믿고 살아가게 되었다.
3차원까지 응축해 좁혀진 실존,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그래서 삼라만상 모든 것은 실존 그 자체이지만
우리가 속한 차원에서 표현하면 [유를 나라고 믿는 실존]이다.
이렇게 되니 문제가 생겼다.
실존이 나를 분명히 하는 과정은 퍽 좋았다.
하지만 나에 너무 몰두하다 보니 원래의 상태로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되돌아가려는 건 고사하고
나를 찾던 습성에 의해 계속해서 나를 더 분명히 하려고만 한다.
잠시도 쉬지 않고 나에 관한 초점을 뚜렷하게 하려는 데서 온갖 번뇌망상이 일어나고
고해가 되어 버렸다.
자신이 실존임을 잊고 유인 나도 돋보이게 하려는 데에 혈안이 되면서
중생은 비롯되었다.
하지만 예외는 있는 법
유에 갇힌 실존의 일부에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바로 수행자들의 구도심이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도심에도 여전히 나를 분명히 하려는 욕구인 아상이 남아 있다.
이것이 수행을 끊임없이 방해한다.
수행을 통해 한두 단계의 성취를 얻으면
아상이 작동해 세 단계 네 단계로 격상시킨다.
아상은 너무나 집요하여 실존으로 복귀하기 전까지 왜곡을 멈추지 않는다.
가령 위빠사나로 알아차림의 각정을 이루면
아상은 곧바로 그것을 대각으로 포장한다.
실존이 된 것처럼 꾸며야 나가 더욱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이것에 속지 않고 더 정진하여 절대나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도 마찬가지이다.
나를 부각시키기 위한 아상의 합리화는 여전히 살아 있다.
이런 상대적 비교 심리를 총칭하여 분별이라 부른다.
그래서 수행자는 필히 분별의 함정을 살펴야 한다.
분별에 속으면 그 길로 수행은 멈춘다.
특히 명패를 조심해야 한다.
스승의 명패, 고승의 명패, 큰 스님의 명패, 각자의 명패, 실불의 명패.. 등과 같은
온갖 허울 말이다.
수행자들은 그런 것들에 손사래를 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엔 그것에 취해 우쭐하는 마음이 겹쳐져 있다.
수행?
별것 없다.
당신을 옭아매고 있는 그런 허울들을 죄다 벗어 던져보라.
다 벗었다 싶으면 생각을 칭칭 감고 있는 언어들도 외면해 버려라.
그렇게 발가벗어 원래의 모습으로 그냥 있어 보라.
그냥!
‘나를 분명하게 하려는 분별식’을 모조리 털어내면 깨달음은 저절로 열린다.
그게 그렇게 힘든 것인가?
분별의 위험을 가장 잘 인지하는 수행으로 묵조선이 있다.
이것은 중국의 한 유파인 조동종에서 전해진 것으로
특히 일본으로 건너간 조동종과 우리나라의 원불교에서 중심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묵조선에선 삼라만상 모든 것은 깨달음, 그 자체이므로
쓸데없이 왜곡하는 짓을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러니 말을 잊고 고요히 좌선하며
마음을 관하는 것이 수행이다.
위빠사나의 觀에서 일체의 분별을 빼 버린 것으로 보면 된다.
이렇듯 분별로 인해 왜곡된 것만 가라앉히면
저절로 깨닫게 된다는 것이 묵조선의 핵심이다.
앞서 여러 번 언급했듯이
태어나면서부터 주먹을 쥔 상태로 평생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주먹을 느껴 보라고 하면 어떨까?
주먹을 쥐고 있으니까 그냥 느끼면 된다.
맞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묵조선의 주장은 타당하다.
자신이 부처요, 깨달음 자체이니 그냥 그것을 확인하면 그뿐이다.
하지만 너무 당연해서 그것이 되질 않는다.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을 청정히 하여 주먹을 느껴 보려 해도
그게 될 리가 없다.
왜냐, 그냥 있으려는 것 자체도 왜곡이기 때문이다.
해인에서 말하는 그냥은
어느 무엇에도 의지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말한다.
여기서 의지함이 없다는 것은 일체의 착이 끊어진 원래의 모습이다.
금강경에서 말하는 응무소주와 유사하다.
그렇기에 그냥 이 말처럼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이처럼 묵조선의 주장은 정곡을 잘 찔렀지만
현실에선 그것이 그리 녹록지가 않다.
묵조선으로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은 세존을 위시해서
용수나 달마, 원효 같은 타고난 도인이 아니면 안 된다.
그래서 분별을 끊기 위해 해인이 등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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