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어디서 누구밑에서 하는게 아니라
항상 지금여기 눈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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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이란
인간인 내가 열심히 수행 정진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 모든 존재들 사이에 기본적인 공통점을 찾아내고
그러한 속성으로서의 자신을 문득 재발견할 때
홀연히 찾아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집 강아지와 나를 비교해 봅시다.
강아지도 보고, 듣고, 느끼며 나도 그러합니다.
나한테는 있는데 개한테는 없는 것은
우주의 진리가 아닙니다.
모든 생명이 똑같이 갖춘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눈앞의 세상을 보고, 듣고, 해석하는 것이나
강아지가 그러는 것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 해석한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 자기 눈앞에
그런 인식의 장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파리나 모기조차도
그러한 인식의 장을 자기 눈앞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잡으려 하면 재빨리 피해서 도망갑니다.
참으로 신통방통한 본래성품의
인식 활동이자 현현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인식의 기능과 장은
어디에서부터 일어나고, 어디로 돌아가는 것일까요?
그것이 의식이라면
의식은 대체 무엇이며
어디에서 나타났다가 어디로 다시 돌아가는 것일까요?
누가 무엇이 이러한 현상을 일으키고 거두는 것일까요?
본래부터 우리와 분리할 수 없이 있는 이 현상에
깨달음의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의식과 그것이 솟아 나온 의식의 발현처는
과연 어디이며 무엇일까요?
우린 그것을 몸이라고 여기지만
의식이 떠나게 되면
결국 몸은 시체가 됩니다.
우리가 고된 하루를 보내도 하룻밤만 숙면하면
다시 원기를 회복하는 신비는 대체 무엇일까요?
우리는 생각과 느낌으로만 진리를 찾기에 못 찾습니다.
거꾸로 한번 우리의 감각의 대상이 되지 않는
절대적인 그 무엇이 있기에
우리가 이처럼 생명현상으로 나타나
생각과 느낌을 가지는 것이라고 뒤집어 봅시다.
우리는 너무 상대적 인식 활동에만 습관이 들어
절대성으로 존재하는 진리를 못 찾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목은
이제 상대성 세계에 아주 심하게 중독이 되어 버렸습니다.
마치 호수의 물결 무늬만 너무 오래 보다 보면
호수물은 보지 못하듯이.
모든 생명의 근원귀의처이며
일체의 존재가 원형으로 실재하는 곳.
비유컨대 얼음과 물이 형체 없이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H₂O의 상태
바로 이것이
바로 우리의 본래성품이며 본래면목입니다.
그것을 형상으로 표현하자니
허공과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만
범인이 인식하는 허공은
물건의 상대적 빈공간이라
절대성의 참허공을 보는 것도 아닙니다.
핵심은 바로 오랜 기간 훈습된
상대적 인식만 하는 습성을
벗어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상에서 행주좌와 어묵동정 중에
이 생각, 느낌, 감정은 어디에서 나와
어떤 상태로 잠시 머물다가
어디로 돌아가는가를
항상 정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달만 집중하면
눈앞에 살아있는 본래면목이 스스로 드러날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 살아가는 이것이
있는 그대로 본래면목이 드러난 소식처입니다.
누구나 자기 눈앞에 인식의 장을 펼치고
그 속에 자기 몸이 산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다만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
다 자신이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본래면목을 보면
자기 몸과 세상이 다 영화 장면처럼
한 덩어리 환영으로 보입니다.
즉 내가 실제라면 실제로 보이고
환영 같다면 환영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처럼 일상생활 속에서
자기의 온 활동을 정견하면서
일상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공부는 어디나 누구 밑에서 하는 게 아니라
항상 지금 여기 눈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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