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마음공부, DanyeSophia

[현덕마음공부] 미움과 적대시는 불안에서 온다

Buddhastudy 2023. 9. 12. 19:21

 

 

미움과 적대시는 간혹 마음의 문제에서 발생하기도 한다.

실존적 불안과 소멸 불안은 적대시 등을 통해서 잠시 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갈 수 없고 해결책도 아니다.

결국 불안이 자아의 문제라는 것을 통찰하고

비자아의 삶이 가능한지 탐구해보아야 한다.

 

 

--

오늘은 미움과 적을 만들고 있다면 우리는 불안한 것이다라고 하는

제목으로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미워할 사람을 미워하고

나쁜 짓을 한 사람에 대해서는 항의를 하고

그다음에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 혹은 세력에 대해서는 적대시도 하고

우리는 그렇게 살아갑니다.

 

근데 심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죠.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가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거나 적대시하는 마음이 생길 때

우선적으로 검토해 봐야 할 일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얘기해 보겠습니다.

 

일단 인간은 싸워왔죠.

유사 이래로 인간은 서로를 죽이는 일을 멈추지를 못했습니다.

오늘날까지도요.

 

그래서 결국 인간은 분열 없는 세상을 원한다.

이런 거는 그냥 아름다운 문학적 표현이고

실제로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이게 차가운 사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보통 이렇게 하죠.

나는 너를 설득할 수 없어, 기다려, 쓸어버리겠어.”

이런 표현을 쓰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은 더 큰 파워를 추구하는 것이죠.

왜냐하면 자기의 관점이나 자기의 이익을 포기하는 것은

사실은 에고 차원에서는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그거는 우리가 인지상정으로 이해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에도 조선시대 당파싸움이 심했는데

이런 일화가 있습니다.

어떤 아들이 아버지한테 아들도 유학을 배우고 아버지는 유학자고

근데 서로 당파싸움, 당파가 갈려서 싸우는 것이죠.

그럴 때 아들이 하는 얘기가

아버지 이것이 공맹의 도에 부합하는 것입니까?”라고 물어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아주 착잡한 눈으로 아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아들아, 나도 이것이 공맹의 도에 부합하지 않는 소인배의 짓이라고 하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다.

우리가 그것을 부정하는 순간 우리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죠.

이게 하나고.

 

또 중세시대 때에 서유럽의 종교 전쟁이 많았지 않습니까?

종교 전쟁에서 싸움에 나가기 전에

각 세력은 각자 똑같이 하느님에게 기도를 합니다.

우리의 적을 무찔러달라고, 절멸시켜달라고.

 

근데 여기도 하느님한테 기도하고, 저기도 하느님한테 기도하는 것이죠.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다라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또는 알아차려도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요즘에 보수진보 대립, 혹은 정치적 하여튼 대립들이 많습니다.

정치적으로만 대립하는 게 아니고

세대 간, 성별 간, 또 경제적으로 양극화되고

대립이 아주 많습니다.

 

평소에는 되게 상식적이고 동네 아재인데

자신을 어떤 진영에 일체화시키는 순간에

굉장히 한쪽으로 치우친 사람이 되는 것이죠.

 

근데 사실 보면은

평상시에 생활하고 이런 것들은 되게 대단히 상식적이고 좋은 사람입니다.

근데 그 문제만 가면

자신의 어떤 한 측면이 아주 두드러져서

심지어는 적대시까지 될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일단 내 마음속에서 미움과 적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하는 것은

위험한 신호다라고 하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고요.

 

 

두 번째는 근데 이것은 어디서 왔는가?

우리가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고, 또 그 적을 설정하는 이유가 있을 거란 말이죠,

심리적으로.

심리적인 측면을 한번 더듬어 보겠습니다.

 

심리적인 측면은 이런 겁니다.

인간이 자기가 누군가를 모를 때, 현실감이 없을 때

실존적 불안을 느낀다.

이렇게 표현하지 않습니까?

 

태어나서 열심히 살아왔지만 50~60 정도 되면

꿈 같기도 하고, 도대체 이게 다 뭐 하는 짓인가? 하는 느낌이 드는 것이죠.

그래서 중년의 위기다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이럴 때 사람은 좀 예민해지고, 또 거칠어지고, 어쩌면 좀 우울해지고

이런 약간의 허무감에 시달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심리적으로 보면, 하나의 돌파구일 수는 있는데

적을 설정하면 굉장히 갑자기 세상살이가 의미 있게 되는 것 같고

굉장히 현실적인 것 같고

뭔가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고

이런 느낌이 드는 것이죠.

 

그래서 적을 설정하면

적과 싸우고 있는 나의 실존을 체감, 실감하면서

실존적 불안이 조금 줄어든, 줄어든다기보다 망각한다.

잠시 그런 얘기를 할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싸우고 있을 때는 치열하니까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죠.

그래서 뭔가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을 한다는 느낌도 들고

하여튼 그런 것들이 순간적이지만 좀 채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심리적으로는 실존적 불안에 대한 하나의 돌파구로

이런 미움과 적대시의 관점이 생길 수 있다 하는 게 하나고요.

 

 

두 번째는 아무래도 현실적인 측면에서 보면

우리는 영역 싸움을 하는 동물이죠.

그러니까 생존 투쟁을 한단 말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이 문명을 발전시키고 지성을 발전시켜서

어쩌면 인간들은 서로 싸우지 않고도 발전하고

같이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어쨌든 우리는 그것보다는 배제하는 방법을 우선 씁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이 어떻고 인생이 어떤지는 몰라도

어쨌든 여기서 떨려나는 것, 밀려나는 것

그렇게 해서 소멸하는 것은 무섭다 라고 하니까

그게 어떻게 보면은

자기 자신과 타인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과 타인에 대해서 너그러움을 가지는 것보다는

소멸의 불안이 더 커서

싸우게 되는 것이고

싸움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는 것이

더 우선하는 본능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와 너그러움이라고 표현했는데

이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이런 것이죠.

이게 서로 구분하고, 차별하고, 적대시하고, 미워하는 것이

얼마나 뭐랄까 바보 같은 일인가 하는 것에 대한 알아차림이죠.

 

두 번째는 그런데 인간은 지성을 가진 존재니까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고, 또 찾아봐야 되겠다 라고 하는

어떤 결심과 희망, 이런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쪽으로 머리를 돌리는 것이죠.

 

두 번째는 너그러움이라고 하는 것은

톨러런스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결국은 알고 보면 서로 불쌍한 존재 아니겠습니까?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뭐가 뭔지 모른 채 살라고 내던져진 존재라고 하는

측면에 대한 서로의 동질감 때문에

우리가 서로 심지어는 싸우기도 하지만

어떤 인지상정, 동병상련을 느끼면서

서로에 대해서는 약간 봐주는

이런 이해와 너그러움이라고 하는 것들이 필요한데

현실에서는 소멸 불안이 압도적이기 때문에

싸움을 통해서라도 살아남으려고 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심지어는 적을 만들어내야 할 정도의 실존적 불안에서 벗어나려고 하면은

우리가 뭐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있을 것 같습니다.

 

크리슈나무르티 얘기는 그걸 잘 알아차리라고 하는 것이죠.

알아차리고 열정을 가지고 탐색해보라.

그리고 거기에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로 한다.

그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느냐?

쓸데없는 짓을 안 하는 데서 온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미움, 적대시, 불안 이런 감정이라고 하는 것은

주체를 에고를 가지고서는 풀기 어렵다는 것이죠.

왜냐하면 내가 주체가 있다라고 하는 것은 객체가 있는 것이고

내가 있으면 너가 있고

그래서 이미 쪼개진, 분열된 세계를 전제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니까

그게 결국은 뭐라고 하더라도 대립과 투쟁으로 간다는 거죠.

 

왜냐하면 자아, 나의 몸이 있고, 나의 것이 있고

이런 나를 내세우는 자아의 차원에서는 뭐랄까

내가 우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다음에 내가 손해 보면 안 되니까 이익을 봐야 하고

그다음에 나의 관점이나 견해를 관철해야 하고

이런 것들이 확보되어야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니까

 

우리가 무슨 문제를 해결한다든지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학습한다든지 할 때

그게 기본적인 편향으로 바이어스로 딱 깔려있는 것이죠.

 

그러니까 진정한 의미의 관용이나 타협은

있는 그대로를 가지고 해야 되는데

그게 왜곡이 되니까 쉽지 않다.

 

그런데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남도 자아 개념이 있으니까 자아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남도 그런 거죠.

그러니까 서로의 왜곡과 왜곡의 시각이 부딪히는 것이죠.

결국 잘 안되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에는

아이고 안 되겠다. 그냥 싸우자

힘의 논리로 넘어간다.

이렇게 일반적으로는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알아야 될 것은

답을 알 필요가 없고요.

이게 답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건 필요한 거죠.

 

내가 주체를 가지고 시도하는 문제 해결이라고 하는 것의 한계를 정확하게 알아차리면

다른 가능성에 대한 모색을 해야 되겠다라고 하는 필요성이 생기지 않습니까?

 

그러면 필요성이 생긴다라고 하는 것은

관심과 동기가 생긴다는 건데

그러면 그것을 위한 어떤 에너지를 어디선가 끌어와야 되지 않습니까?

그럼, 그 에너지는 결국은 불필요한 에너지를 차단하고 그 에너지를 갖고 오는 것이죠.

 

여기서 불필요한 에너지라고 하는 것은

주체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려면

나의 나와바리, 나의 영역을 안정되게 하고 확장하려고 하는

그 모든 시도라고 하는 것의 문제점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그쪽의 에너지를 쓰지 않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막대한 에너지를 우리가 확보하게 되면

그 에너지를 가지고 가보지 않은 길

우리가 싸우지 않고도 서로의 지성을 가지고

인간이 인간을 서로 이해하고 너그러움을 가지고

만들어 갈 수 있는 길이 있는가 하는 것을

그때 비로소 알아볼 수 있다는 겁니다.

 

어떤 결론을 이미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이 길이 아니다, 이 길 끝에는 절벽밖에 없다라고 하는 것을 실감을 해야

다른 길에 대한 모색이 가능하다.

이런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실감이라고 하는 것은 뭐겠습니까?

결론을 내리자면

나라고 하는 것이 있으면 불안과 투쟁을 벗어날 수가 없구나.

거꾸로 나라고 하는 관념이 없으면 불안과 투쟁이 필요하지 않구나.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명상을 하건, 묵상을 하건, 뭔가 탐구를 하건

무엇이든지 간에 이것과 관련되어 있다

이 주제와 관련되어 있다라고 하는 것이죠.

 

자아라고 하는 것이 정말로 그렇게 중요하고 필요한 거냐?

하는 탐구와 관련되어 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뜻 볼 수 있는 것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무아지경에 빠졌을 때

숙면, 깊이 잠든다든지

책을 읽고 뭐 한다든지, 어떤 작업을 할 때 아무 생각 없이 한다든지

또는 심지어는 드라마나 음악을 들을 때 무아지경으로 빠져들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럴 경우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근심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지나고 나서

그때 행복했다 그때 참 좋았다라고 하는 것은

보통은 자아가 이렇게 뭔가 채워질 때보다는

자아 자체를 잊어버리고

그런 생각 없이 뭔가에 빠져들어 있을 때에

지나고 나면 우리는 그때가 참 좋았다이런 느낌을 받는 것이죠.

 

 

오늘은 불안과 적대시하는 마음의 한쪽에

실존적 불안 또는 소멸 불안이 자리하고 있을 수 있다.

그것을 알아차리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면

자아가 꼭 필요한가에 대한 탐구를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한 에너지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 에너지는

우리가 현실적으로 생존 투쟁에 쓰는

그런 에너지의 불필요한 부분을 끌어와서 탐구에 사용할 수 있다라고 하는 것

그리고 내가 채워지는 것보다는 내가 텅 비어 있을 때

우리는 본질적인 만족과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이런 얘기를 여러분들과 나누어 보았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