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 탐색의 날 강연-
대한민국의 기원
-호사카 유지(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교수)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환영합니다.
저는 세종대학교에 호사카 유지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들이 세종대에 혹시 입학하신다면 저는 교양과목에서 여기에 계시는 많은 분들을 만날 수가 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세종대에서는 교양학부를 교양대학으로 승격하여서 대학휴머니티칼리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요새 세계적으로 교양과목의 중요성이 많이 거론되고 있죠.
왜냐하면 전공만 알고 있으면 세계하고 통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계적인 많은 이슈들을 기본적으로 알고, 그 위에 자신의 점검을 가져야만이 세계인들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가 있고, 통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무려 한국도 선진국의 대열에 들어갔습니다만,
많은 선진국에서는 대학교 4년 과정 중에서 2년 정도는 다 교양과목을 이수하도록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금 다른 제도이지만, 그 중에서 제가 교양 쪽에서 정치외교, 역사 이런 것을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그 중에서 ‘대한민국의 기원’이라는 내용으로 조금 여러분들이 맛볼 수 있게 그렇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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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한국 독립으로의 길
1. 카이로회담
배경: 1943.9. 이탈리아 항복
미, 영, 중국이 앞으로의 전쟁수행과 전후 처리 문제를 협의 -> 카이로 회담
1943.11.22.~11.26: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영구 처칠 수상, 중화민국 장세스 총통 등 3정상들이 회담에 참가//
한국이 어떻게 독립을 했을까요?
특히 일본 쪽에서 말하는 내용은 “한국은 자신의 힘으로 독립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말합니다.
“연합국이 일본을 이겨서 그 결과 한국이 독립했기 때문에 한국이 스스로 독립한 게 아니다.”
이것은 일본 논리입니다.
동의하세요?
동의 해요?
아니죠.
자, 그러나 우리는 동의하지 않지만 정확하게 여기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한국의 독립이 어떻게 결정되었을까요?
그것은 카이로 회담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카이로 회담에 참여한 사람들은 3사람이죠.
당시에 중화민국, 현재는 대만이잖아요. 중화민국의 장세스, 장개석이라고도 하죠.
그리고 이 사람은 누구죠? 미국의 당시 대통령, 루스벨트죠.
그리고 이쪽에 살쪄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처칠이에요.
이 3사람이 카이로에서 1943년에 만나서 2차 대전에 대해서 논의하고, 그리고 2차 대전이 끝난 이후에 세계의 질서에 대해서 논의를 했습니다.
이때 한국의 독립이 결정 됩니다.
2. 카이로 선언과 한국
-카이로 선언 194.11.27이 발표됨
-카이로 선언 속 한국 특별조항_3국은 한국민의 노예상태를 염두에 두고, 적절한 시기에 한국이 해방되고 독립되기를 결정한다.//
카이로 선언에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 이러한 내용이 들어갔습니다.
“한국민의 노예상태를 감안하여서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해방시켜서 독립시킨다.”
이러한 내용이 카이로 선언에 정확하게 기재가 되었습니다.
이 기제가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독립되기도 어려웠습니다.
이게 중요한 부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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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는 왜 한국 독립을 카이로선언에 삽입시켰는가?
자, 그러면 이곳을 카이로 선언에 삽입한 사람은 장제스입니다.
장제스의 제의를 받아서 루스벨트하고 처칠이 승인한 것이었습니다.
자, 장제스는 왜 ‘한국의 독립을 강하게 카이로선언에 넣어야 된다.’
이렇게 주장을 했을까요?
그 요인은 1942년 4월 29일, 상하이에서 이루어졌던 일왕 히로히토의 생일 잔치, 거기에 폭탄을 던져서 의거를 달성한 윤봉길 때문이었습니다.
이거 배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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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윤봉길의사의 의거
-1934년 한인애국단 결성: 임정 김구주석이 일본 요인에 대한 암살계획을 수립
-1932.4.29. 윤봉길의 의거: 한인애국당의 윤봉길이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열린 일왕 생일축하 행사에 폭탄을 던져 사라카와 육군대장(=총리와 동격) 등 2명을 살해. 기타 다수가 중경상을 입었음//
자, 윤봉길의 의거가 왜 한국의 독립으로 이어졌을까요?
그 상하이에서 일어났던 윤봉길의 의거를 보고 아주 감격한 사람이 장제스였습니다.
장제스가 말했죠.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라고 해서 크게 감동하여서
이것 때문에 이후,
대한민국의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중국이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관계가 당시에 성립되었기 때문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동맹국으로 당시에 중국이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43년의 장제스가 카이로 회담에 참여한다 라는 것을 알게 된 김구 선생님을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사람들이 장제스를 찾아갔습니다.
장제스는 사실 그때 일본하고의 전쟁이 중국 안에서 계속 이루어져서 카이로회담에 가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김구 선생님이 말합니다.
“절대적으로 카이로회담에 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한국이 독립한다라는 내용을 정확하게 약속해 달라.”
이러한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장제스는 결심하여서 카이로회담에 참여했습니다.
거기서 요점을 그대로 말하면서 연합국의 자질이나 루스벨트는 그것을 승인하여서 카이로 선언에 대한민국의 독립이 기재가 되었습니다.
이게 중요한 부분이에요.
그러니까 임시정부 그리고 독립운동
그 결과가 한국의 독립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이것이 독립운동이나 독립전쟁이 없었더라면
대한민국의 독립이 없었다라는 그러한 증거가 되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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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포츠담선언
1. 포츠담회담과 포츠담선언
-나치 독일 항복 후, 1945.7.18.~8.2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미, 영, 소 3개국 정상(트루면, 처칠, 스탈린)이 모여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처리에 대해 논의
-포츠담 선언: 이 회담 기간 중 트루먼, 처칠, 장제스의 공동성명으로 발표된 것//
이제 나치 독일이 거의 항복했습니다.
그래서 처칠이나 루즈벨트는 포츠담회담을 열었죠.
이곳은 1945년의 이야기였습니다.
여기에는 장제스도 다시 참여하려고 했지만, 이제 중국에서 일본군하고 마지막 싸움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멀리에서 참여한다, 그 내용에 모두 찬성하겠다.”
그런 식으로해서 대신 스탈린이 여기에 참여를 했죠.
2. 포츠담선언 제8조
-카이로선언의 말들을 이행되어야 한다.
일본의 주권은 혼슈, 훗카이도, 규큐, 시코쿠완 연합국이 결정하는 작은 섬들에 제한된다
-> 한국 독립 결정//
그런데 포츠담선언 제8조에는 이렇게 기재가 되었습니다.
카이로선언의 말들은 이행되어야 한다.
그래서 카이로선언에서 여러 가지가 합의가 있었지만 ‘한국을 독립시킨다’ 라는 내용도 이제 이행되어야 한다라고 해서 이 내용이 일본에게 제시됩니다.
일본은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것이었죠.
그래서 결국은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은 마지막 수단은 원폭투하, 그리고 소련의 일본 참전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일본이 무조건 일본이 항복을 한다하더라도 한국에 대한 독립에 대한 약속이 없었으면 일본이 패배한 그 일본 안에 한국이 그대로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독립하고 일본의 패배는 별개의 문제인 것입니다.
자, 일왕 히루히토는 포츠담선언을 받아들여서 광복이 되었습니다.
항복 문서에 일본이 서명한 것은 1945년 9월 2일 일입니다.
바로 8월 15일부터 9월 2일까지 여유가 있었죠. 이 사이 일본은 무엇을 했을까요?
그냥 가만히 있었을까요?
일단 항복을 했기 때문에 8월 15일에, 그래서 미군도 극한적으로 점령한 소련군도 마음을 놓았습니다.
일본은 여유가 좀 있었어요, 3주 정도.
무엇을 했었을까요?
여러분이 일본군이면 그 사이에 무엇을 했을까요?
자료를, 중요 문서 자료를 다 태워버린 것입니다.
이 사이에 일본은 실제적으로 40년 이후에 아주 중요한 문서를 거의 다 태워버렸습니다.
그것을 또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본군 중에서 그때 많은 자료를 태웠습니다.” 라고 일본을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서 위안부 문제라든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에서 자료가 부족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아무튼 간에 일본은 항복을 했죠.
그 사이를 우리가 관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소련이나 미국이 관리를 했었어야 되는데, 그런 부분도 좀 아쉽게 남았습니다.
앞으로 이 부분은 그래도 조금씩 남아있는 자료를 우리가 노력해서 현재 발굴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 9월 2일 일본의 대표가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사진이죠.
여러분들이 고등학교에서도 이런 사진을 봤을 겁니다.
이 사람이 누구일까요?
시게미츠 마모르라는 일본의 외상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절름발로 이렇게 나타났어요.
그렇게 해서 서명했어요.
오른쪽 다리가 위족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오른쪽 다리를 언젠가 잃어버렸습니다, 언제?
1932년 윤봉길의 의거 때 폭탄 맞아서 죽지는 않았지만 이 사람은 오른쪽 다리 전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사람이 서명하러 나타났습니다.
이것을 볼 때 우리의 관점이에요. 이것은. 제가 우리라고 할 때 한국이에요.
2003년에 한국 사람으로 국적을 완전히 옮겼고, 1988년에 한국에 왔기 때문에 31년 되었어요, 한국에 온지.
그러니까 저는 이름만 일본 이름이고요, 한국사람입니다.
2명의 아들이 있는데, 다 군대에도 다녀왔고요, 한 놈은 아직 있어요, 군대에.
아무튼 간에 이거 우리가 해석할 때에 바로 윤봉길의 신념이 일본을 패배시킨 상징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윤봉길의 의거라는 것은 독립전쟁, 독립운동의 집결체였던 것이죠.
윤봉길 뿐만이 아니라 당시에 한국민의 그 많은 사람들의 소원이 거기에 담겨져 있었던 의거였던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해서 대한민국은 독립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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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어.
-독립전쟁, 독립운동이 없었으면 한국의 독립은 어려웠다.
-오키나와(=유구왕궁)와 비교
-한국의 독립= 한국의 독립전쟁과 연합국이 공동으로 이우어낸 쾌거//
결론, 대한민국은 독립전쟁, 독립운동이 없었으면 독립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오키나와 아시죠?
오키나와는 일본의 지금도 소속하잖아요.
그러나 원래는 유규왕국으로 왕국이었습니다.
1870년대 일본이 유구를 오키나와로 바꾸어버리고 편입해 버렸습니다.
만주를 망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오키나와는 지금도 일본 안에 남아 있습니다.
이유는 독립전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국도 독립운동이 없었으면 그럴 가능성이 없지않아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대한민국을 독립시킨 가장 중요한 요소는
독립전쟁, 독립운동이라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각인하여서
일본 측의 이상한 논리를 극복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저의 수업을 들으시면 많이 들으실 수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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