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저 달을 보기 전에는
저 달이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알버트 아인슈타인
양자물리학의 출현은
서구 인식론에 큰 충격을 준 사건입니다.
왜 그럴까요?
관찰과 측정, 가설과 증명은
서구 근대 철학의 인식론적 문제를 해결한
과학적 방법론이었습니다.
세상은 명확하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며,
인간의 인지능력 밖에 있는 것들조차
적절한 이론을 세우고
실험을 통해 결과를 입증하는 방법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모습을 그려내고
법칙을 찾아내고
원리를 이용해 기술 혁명을 일으키던 근대 과학은
서구적 근대사회의 토대이자 기둥이자 지붕이었습니다.
이성과 경험을 종합해
전 세계를 지배하는 힘을 가지게 해준 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양자물리학은
여기에 큰 의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과연 세계를 정확히 인식할 수 있는가?
특히 인식론적 영역에서
이 물음은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빛은 파동인가 입자인가?
그것은 우리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떻게 관찰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 한마디 결론에 서구적 합리주의는 무너집니다.
관찰자의 의도에 따라 변하는 세상을 어떻게 논리로 확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단순히 아원자세계에
우리가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다는 의미가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냥 우리가 그려놓은 상상의 그림일 뿐인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측정할 수 없는 입자나
거리와 상관없이 즉각 반응하는 양자얽힘 같은
이해하기 힘든 현상 앞에서
근대적 서구과학의 인식론은
전혀 아무런 대책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과학자는 두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뭔지 모르니 끝까지 가보자는 파와
지금까지의 방법론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는 파로 말이죠.
끝까지 가보는 것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으니 그냥 놔두면 될 것 같습니다.
쪼개고 쪼개서
드디어 쿼크라고 하는 아원자의 구성 요소까지 찾아냈고,
그것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의 원리에 해당하는
힉스 입자까지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가설과 실험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냥 놔둬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후자들은
이제 관심을 물질이 아닌 의식으로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최소한 양자물리학자들은
우리 세상이 사람의 의식이 개입된 결과라는 것에는
동의하는 것 같습니다.
닐스 보어 말합니다.
“양자역학의 개념적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존재라는 큰 드라마에서
관중이자 배우로서의 우리 위치를 조화시키려고 할 때
우리는 심리학과 같은 다른 분야의 과학이나
부처나 노자가 직면했던 인식론적 문제로 되돌아가야 한다.”
이런 양자물리학의 주장이자 입장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그 유명한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보는 사람이 없으면
달이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는 사실상 양자물리학을 창시한 시조였지만
과학의 논리 패러다임이 흔들리는 것은 찬성하지 않았죠.
과학이론이라면
사물의 위치와 속도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하며
측정과 상관없이 물리적인 존재는 확실해야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입장에서 코펜하겐 해석이란
과학이 아닌 동화 같은 상상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치열한 논쟁의 끝은 아인슈타인의 패배였죠.
어찌 되었든
사물을 관찰할 때와 관찰하지 않을 때
전혀 다른 속성이 나타나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사실이었죠.
아인슈타인은 끝까지
그런 이상한 현상을 설명할 법칙과 이론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
양자물리학에서 사물은 어떻게 존재할까요?
관찰자가 관찰을 시도하면
물리적 사물은 어떤 위치에서 어떤 상태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관찰하지 않을 때는
그냥 확률적으로 가능한 모든 위치에서
가능한 모든 상태로 얼버무려져 있는
정말 괴상한 양상으로 존재합니다.
중첩된 일종의 구름 같은 상태로 있다는 겁니다.
이게 있는 것이 맞을까요?
이렇게 진도를 나가다 보니
어쩌면 우리가 보는 것은
우리 마음이 그렇게 보고 싶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미칩니다.
과학이라는 관점에서 이것은
도저히 허용될 수 없는 과학의 선을 넘는 생각입니다.
당연히 이것을 과학이라고 할 수 없으니
이런 말을 하는 과학자는
과학자가 아니게 됩니다.
양자물리학자들은
이론이 아닌 개인적인 견해로 그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들이 심리학자나 종교인이 아니지만
그들의 발언이 과학잡지가 아니라
명상 서적에 나타나는 이유입니다.
양자물리학이 아원자 세계에 대한 이론이니까
그것을 거시적인 세계에 끌고 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하지만 양자물리학이 밝혀낸 것만으로도
거시 세계를 설명하는 유턴 물리학은
사실이 아니라
오차가 좀 적은 묘사에 불과한 것이 돼버렸습니다.
그런 그럴듯한 설명을 현실이라고 믿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나요?
거시 세계라니
진짜 같아 보이는 오차가 적은 세상 말입니까?
뉴턴 물리학은 사실상
이것저것을 다 합쳐서 평균을 낸 점수에 불과합니다.
30명의 학생들이 속한 학급의 평균 점수만으로
그 학급의 학습 수준과 내용을 이해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30명의 아이들이 가진 성격과 능력과 가치를 알 수 있을까요?
평균 점수가 사실에 가깝습니까?
한 명 한 명 아이들이 가진 능력과 가능성이 사실에 가깝습니까?
이래도 거시세계가 더욱 사실적이고
미시세계는 이해하기 어렵다고 할 수 있을까요?
거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사실일까요?
최근 들어서는 이런 구분을 허무는 실험들도 이루어집니다.
이중슬릿실험이
아원자 입자 수준이 아니라 분자 수준에서도 이루어졌고
거기서도 관찰에 따라 파동과 입자를 왔다 갔다 하는
물질의 성질이 관찰된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 후손들은 과학 이론으로
생각에 따라 세상이 뿅하고 나타났다 사라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데이비드 봄은
과학의 대상을 드디어 의식으로 옮겨옵니다.
그는 실재와 의식의 본질을 하나의 전체로 이해하고자 합니다.
그것을 통합해 하나의 전체로 의식과 실재를 이해하려고 하자
그는 의식에서 나타나는 질서가
물질의 질서와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릅니다.
그는 말합니다.
“둘은 원래 단일한 전체 질서에서 갈라져 나온
서로 다른 측면이다.”
이렇게 해서 양자역학의 원리는
유식불교의 원리와 아주 가깝게 만나는 듯합니다.
의식을 말하는 양자물리학자들의 의견을
그대로 불교의 이론으로 옮기면
마치 아뢰야식이 변해
현행화된 주체의 인식작용과 대상인 세상이
보는 자와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을 뿐
실제로는 모두 같은 의식이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의식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은 없다는 겁니다.
양자물리학이 고민하는 인식의 문제는
유식학으로 풀면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의식은 그 범위와 작용에 따라 수준을 가집니다.
제8아뢰야식에서 풀리는 문제를 제6의식에서 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과학의 방법론을 적용해야 하는 물리학이
깨달음의 의식 수준을 넘나들 수는 없습니다.
결국 과학은 그 한계에 부딪히고 맙니다.
과학을 버릴 필요는 없지만
그것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범위와 수준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문자로 된 경전으로
깨달음을 설명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직접적인 앎을
이원적 언어의 테두리에서 전달하기 어려운 것처럼
과학도 철저하게 이원적 틀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과학은 현대인들의 공통 종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한계를 넘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데이비드 봄은 양자 포텐셜 이론을 통해
의식이 있는 양자장이 전체성이며
숨어 있는 변수들에 의거해
물리적 우주가 출연한다라는 생각을 꺼내들기에 이릅니다.
물론 이 생각은
많은 물리학자들에게 배척받았지만
문제는 실제로 실험을 해보니
이렇게 돌아가더라는 겁니다.
놀라운 발견이었습니다.
봄의 생각은
전체로서의 우주가 펼쳐져 드러나는 과정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파동도 되었다가 입자도 되는지에 대한 설명이
가능해졌다는 겁니다.
양자현상이 일어날 때
개별 입자의 궤도를 조직하는 양자 포텐셜
마치 카르마의 원리를 보는 듯한 양자 포텐셜이
실제로 작용하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된 겁니다.
비국소성,
즉 양자 차원에서
우주 전체의 정보가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숨은 변수의 내용을 알 수 없겠지만
양자장의 존재를 증명하는 곳까지는 도달한 것이죠.
양자얽힘이 이상한 현상이 아니라
존재계의 일반 법칙이라는 걸 알게 된 겁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체성의 작용으로
존재가 일어나는 모델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과학자인 데이드 봄이 하는 이야기가 마치
종교인이자 선승의 말처럼 들리는 것은
저만이 아닐 겁니다.
우리는 의식으로 전체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받아들일 때
전체를 받아들인 것이고
어떤 행동을 할 때도 전체를 향해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안으로 받아들인 것이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되는지를 결정합니다.
아뢰야식이 하나의 감각으로 드러나는 과정은
매순간입니다.
당신이 무언가를 집어들 때 느끼는 그 촉감에는
전 우주가 관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최신의 양자물리학이 내린 결론입니다.
--
우주와 우리는
의식의 세계 속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
우주 안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만물의 이론에는
인간의 의식이 반드시 고려되어야 한다.
기록 장치는 관측자의 역할을 대신할 수 없다.
-안드레이 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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