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상과 본질의 차원: 세상 사람을 현상만 보고 사는 사람과, 현상뿐 아니라 본질의 눈을 떠서 현상과 본질을 함께 볼 줄 아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00:32]. 우리의 공부는 현상과 본질 모두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01:00].
- 자기 깨달음: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무언가를 구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자신을 잃게 됩니다 [01:30]. 깨달은 사람들은 '딴짓만 하지 않으면 그대로 나다'라고 이야기합니다 [02:12]. '딴짓'이란 구하고 찾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02:30]. 우리는 어릴 때부터 학원 등을 통해 평생 무언가를 배우고 구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습니다 [02:40].
- 고통의 원인과 해결: 마음 공부의 목표는 고통의 해결, 즉 해탈입니다 [05:43]. 부처님은 생로병사라는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출가했으며,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06:15]. 부처님의 첫 가르침인 '고(苦), 집(集), 멸(滅), 도(道)'는 고통의 발생과 해결 방법을 다룹니다 [09:06]. 고통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무명(無明)'인데, 이는 무의식적으로 '생각'을 '나'라고 동일시하는 착각을 의미합니다 [15:22].
- 생각과 의식의 구분: 보통 사람은 자신의 의식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생각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살아갑니다 [24:54]. 의식은 생각과 상관없이 항상 깨어 있는 본래의 '나'이며, 무한하고 완벽한 존재입니다 [18:30]. 생각을 '나'라고 착각하면 대상에 대해 사랑하고 미워하는 갈증을 일으키고, 이는 갈등과 고통으로 이어집니다 [28:29].
- 수행과 깨달음의 유지: 깨어 있는 훈련을 통해 생각을 나라고 착각하는 무명의 습관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19:15]. 서암 스님은 항상 '주인공아', '깨어 있어라', '남에게 속지 마라'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며 의식을 깨우는 훈련을 했습니다 [22:39]. 이는 자신이 의식임을 자각하고 생각에 끌려가지 않으려는 노력입니다 [32:00]. 경허 스님 또한 평생을 이 자각 속에서 살다 가셨습니다 [33:28].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고통의 원인을 파악하고, 진정한 자신(의식)을 깨달아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42:28].
오늘 제목은 ‘무위법, 차원에 대한 안목’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차원이 차원이다.
하여튼 차원을 다른 말로 ‘눈’이라고 그래요, 눈, 안목.
이 세상을 보는 안목
차원에 대한 안목
이 세상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눌 수 있겠네요.
차원에 대한 안목에서
현상의 차원만 보고 사는, 그런 사람이 있고
현상도 보지만
이 본질에 눈을 떠서
본질과 현상을 같이 볼 줄 아는 사람
그 차이가 있겠네요.
요즘은 좋은 시대입니다.
그런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으니까.
우리도 지금 그 공부하고 있는 거죠.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할 수 있죠.
-현상만 보고 살다가
본질이 있다는 걸 알고
현상과 본질에서 둘 다 자유로운
-세간이 있다는 걸 알고 살다가
출세간이 있는 것을 알고
세간에도 출세간에도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
이게 지금 우리 공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본문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깨닫기 위해서는
사실상 무엇을 할 필요가 없다./
내가 외부 상황을 알려고 하면 뭔가를 해야 돼요.
그런데 내가 나를 깨닫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하면 오히려 나를 등진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내가 나를 깨닫기 위해서는 사실상 무엇을 할 필요가 없다.
/내가 나를 깨닫는 일이니까
딴짓만 하지 않으면
그냥 그대로 나다./
깨달은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남의 속도 모르고.
우리들은 무언가를 구해서
평생을 무언가를 구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 구하는 습관이 꽉 배여 있는데
깨달은 분들은 얄밉게 이렇게 말을 해요.
“나는 이미 난데 나를 구하냐?
가만히 있으면 된다.
딴짓만 하지 마라.”
근데 그 딴짓이라는 거는 구하는 거죠.
구하고 찾고 하는 거.
요즘은 여러분 몇 살 때부터 학원 다닙니까?
점점점점 내려가서
요즘은 만 거의 만 2살? 한 살 반? 거의 만 1살 반부터 학원 가니까
평생을 뭘 배우러 다닌다 이거예요.
참, 뼛속 깊이 그게 몇십 년 동안 쌓여서 뭘 구한다 이거예요.
자기를 깨닫기 위해서는 밖에서 구하면 못 깨닫잖아요.
너무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습관이
지금 가만히 있지 못하고 평생 밖으로 뭔가를 구했다.
그래서 옛날에는 ‘3살 습관이 여든까지 간다’ 했는데
요즘 한 살 반 습관이...
찾는 습관이에요. 구하는 습관.
무언가를 구한다.
가만히 있지를 못해.
그게 우리들의 뭐 정직한 모습입니다.
우리 잘못 아니에요.
우리 부모님, 또 할아버지들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우리한테 잘하려고 그렇게 하신 거죠.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인류의 무명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게 뭔가를 구하는, 그 분별하는 그 체계 속에서 이루어져 있어서
우리 잘못은 아닙니다.
세상이 그런 거예요.
그래서 휩쓸려서 살면
구하는 게 고통이거든요.
그래서 빠져나오기가 어려워요.
그다음 문장이
/한눈만 팔지 않으면 저절로 나는 깨달아진다./
진짜로 한눈팔지 않으면
가만히만 있으면 깨달아져요.
근데 가만히 있는 이것을 못하지요.
보통 지나가는 사람을
이런 선방에
“1시간만 가만히 앉아 있어 보세요” 하면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1시간 앉아 있어 보라”하면
고문 중에 고문입니다, 정말 주리를 틉니다, 가만히 있지 못해요.
지금 그런 상황입니다.
일반인들은 계속 망념, 헛된 생각을 자꾸 하고 있다.
맞나요?
하루에 몇 가지 생각하세요?
우리 속담에 ‘5만 가지 생각을 한다’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계속 생각이 많다.
그래서 그 생각 없이 가만히 있으면 깨닫는 거예요.
근데 생각이 많아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이 아이러니를 해결하는 게 우리 마음공부예요.
그러면 우리 공부는 아주 간단해요.
마음공부의 목표는
분명하게 ‘고통의 해결’이에요.
고통의 해결.
고통의 해결을 불교에서는 ‘해탈’이라고
‘고통으로부터 해탈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이게 분명히 목표거든요.
고통의 해결.
모든 인류의 숙제 아닌가요?
고통의 해결.
근데 이 고통의 해결을 하는 것이
실제로 깔끔하게 해결하신 분이 석가모니 부처님이신데
그분이 출가했던 동기가
생로병사라고 하는 이 문제가 너무나 실감을 느껴서
자기는 왕자고, 부러울 것이 없는데
성 안에서는 몰랐는데 성문 밖을 나가 보니까
생로병사를 만나게 되어서
모든 인간이.
석가모니가 그렇게 질문하잖아요.
그러니까 싯다르타 태자가
“나도 죽느냐?” 이렇게 되는 거죠.
“우리 아버지도, 저 왕도 돌아가시고 나도 죽느냐?” 그러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이 문제는 정말 중요하구나.”
그래서 태자가 출가할 때 아버지가 말렸다는 거 아니에요.
당연히 말리겠죠.
그래서 말렸을 때 한 이야기가
“아버지,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가르쳐 주시면
제가 출가 안 하겠습니다.”
근데 아버지가 가르쳐 줄 수가 없었죠.
아버지도 그 문제 해결을 못 하셨으니까.
하여튼 생로병사의 고통이에요.
그래서 저는 이런 대목을 만나면
깨달음보다도
지금 우리 강의 제목이 ‘깨달음과 마음치유’
두 가지잖아요.
그러면 저는 깨달음보다도 마음 치유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개인적으.로
그리고 마음 치유를 하려면 깨달아야만 돼요.
그래서 깨달으려고 하는 거지
최종 목적은 마음 치유예요.
고통의 해결이에요.
그럼, 이 문제를 부처님이 결국에는 해결을 했다 이거예요.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았잖아요.
그리고 벌떡 일어난 게 아니고
49일간, 7일씩, 7자리를 그 주변에 옮겨 앉으면서
7번이나 총 49일간
이 깨달음의 해결을, 이 마음 치유, 고통의 해결을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잘 설명할까?” 하고 계속 숙고한 거예요.
납득할 수 있게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전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어요.
그래서 계속 반복해서 숙고하다가
결국은 찾아낸 게
부처님이 초전법륜이라고 해서
처음으로 법륜_ 법의 바퀴를
전_ 굴렸다.
초전법륜
그러면 초전법륜의 내용은
고- 집- 멸- 도
지금 불교의 생기초예요.
불교의 가장 기초, 부처님이 처음 가르침
근데 이게 다예요.
저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건강하다고 생각해요.
깨달음으로 가지 않고 고통을 다뤘어요.
그 고통을 다뤄서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서는 깨달아야 한다고 이야기를 해서
저는 이게 좋다고 생각해요.
여러분도 괜히 깨달으려고 하지 마세요.
그 깨달으려고 하는 것이 에고예요.
깨달음으로 그냥 가는 거는 에고예요.
근데 고통의 해결은 이건 아주 진솔된 인간의 문제죠.
그러니까 종교를 떠나서 고통의 문제
이걸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다 보니까 깨닫지 않고서는 안 되니까
이제 할 수 없이 깨닫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가야지 건강해요.
그렇지 않고 깨달음을 추구하면
깨달음이라는 권력에 대한 추구라서
에고가 거기에는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하는 걸
쭉 한번 추적을 이렇게 해서
12가지 체인을 통해서 고가 일어나는구나
12가지의 연쇄를 통해서 고가 일어나는구나
해서 제가 처음 불교공부할 때
카페에 앉아서 노트 펴놓고 이 12연기를
이 고통이 일어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꾸 써 보는 것
써보면서 내가 스스로 납득하는 것
그 12연기를 나한테 대입을 해서
내가 고통스럽다.
고통스럽지 않으면 이런 걸 공부할 필요가 없죠.
고통스러워요.
고통스러우니까 그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서
인류 최초로 이 문제를 깔끔하게 해결한 한 분이
이런 식으로 해결 했다 하니까 참고할 만하잖아요.
이거는 엄마가 학원 보내서 하는 게 아니고
스스로 좋아서 하는 공부니까
카페에서 항상 좋은 커피하고 좋은 디저트 빵을 놓고 달래면서
에고를 달래가면서 써보는 거예요.
참 쓸 때마다 재미있고, 할 때마다 깊어져요, 이해가.
압축하면 세 가지예요.
제일 처음에
마지막이 생로병사의 고통이잖아요.
잠깐만 써볼게요.
할 때마다 복습하는 거 아시죠?
근데 할 때마다 깊어져요.
사성제(四聖諦)_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고- 집- 멸- 도
근데 12가지가 있는데
지금은 다 뭐 시간 절약하기 위해서 안 쓰겠습니다.
[생로병사]가 고통이에요_ 태어나서 늙어서 병들어 죽는다.
이게 고통이에요.
그러면 생로병사의 원인이 뭔가? 할 때는 제일 중요한 게
[갈애]더라.
갈_ 갈증, 애_ 사랑, 사랑에 대한 갈증
여러분 없나요?
제가 보기에는 모든 인간은 갈애에 시달려요.
그 사람의 행동 양식을 보면
“왜 했는가?” 따져보면 그 사람의 갈애에요.
거의 모든 인간의 행동은
그 뒤에 갈애가 도사리고 있다
이렇게 이해할 수 있어요.
자기를 이해하는 방법이죠.
갈애 때문에 갈애, 사랑의 갈증을 느끼는데
애가 항상 [애증]을 낳죠.
그게 안 되면 증으로 바뀌죠.
사랑이 충족되지 않으면 증으로 바뀌는 거야.
그러니까 애증의 항상 갈등 속에 있다.
내 마음대로 안 된다.
그게 고통이에요.
이 애증의 문제가 내 마음대로 안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내 마음대로 안 되고
또 미운 사람을 멀리 하고 싶지만 보고 살아야 되고
가족이나 직장이나 이러면 참 고통스럽죠.
그런 애증이 있더라.
그리고 애증이 왜 생겼는가를 따져보니까
결국은 근본 원인은 [무명]이더라.
명_ 밝을 명자라서 무명_ 밝지 못하더라.
무명 때문에, 처음에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은 무명이다.
무명 때문에 갈애가 있고
갈애 때문에 생로병사의 고통이 있다.
이게 부처님의 설명이에요.
물론 12가지를 통해서 아주 촘촘하게 설명을 했죠.
하여튼 제일 중요한 게 3개인데(무명, 갈애, 생로병사)
무명의 내용이 뭐냐 하면
지금 보통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
자기를 깨닫게 되는데
보통 사람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항상 생각을 하고 있다 이거예요.
그래서 못 깨닫는다 이거예요.
그러면 왜 그런가?
무명 때문인데
무명의 내용은 뭐냐 하면
요즘 말로 써보면
우리는 21세기 지성을 가진, 인문학적인 토대를 가지고 공부를 하니까
[무의식적 동일시]
요게 무명의 내용이에요.
무의식
즉 자기가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채로 동일시하고 있다.
동일시라는 말은
나라고 착각하는 것
무의식적 잘못된 동일시
이게 무명의 내용이에요.
그러면 무엇에 동일시하는가?
무엇을 나라고 하는가?
이게 핵심이에요.
무엇을 나라고 하는가?
딱 핵심은 생각이에요.
사람마다 생각을 자기라고 동일시해요.
근데 그 생각이 하루에 5만 가지가 생기니까
자기는 굉장히 복잡하고 불안정, 계속 바뀌니까.
우리는 어릴 때부터 생각을 나라고 하는 동일시 속에서
예를 들면
-나는 남자다, 여자다
-나는 키가 얼마다
-나는 어떤 사람이다
여러분 자기가 ‘나는 어떤 사람이다’ 이런 거 있죠?
TV 예능 프로 보면
‘이상형 올림픽’ 해서 탈렌트끼리 딱 붙여서
나는 누가 좋다
12명 놓고 올라가면 마지막 결승전에서 한 명 뽑기
이런 거 하잖아요.
그러면 자기 생각이다, 이거예요.
사람마다 취향이나 이런 게 있어서
그 생각을 자기라고
‘나는 이런 사람이다’
각자가 자아관을 가지고 있어요.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하는 생각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것을 자기라고 지금 믿고 살고 있다.
지금 이게 지금 핵심이에요.
무명_ 밝지 못하다
무엇이 밝지 못한가?
사람마다 무의식적으로 생각을 자기하고 동일시한다.
이게 착각이라고, 나에 대한 착각
이게 가장 기본, 가장 근원에
모든 이 고통의 근원에는 나에 대한 착각이 있다는 거예요.
이걸 부처님이 발견을 해낸 거죠.
무의식적 생각을 나라고 동일시하는 것
이게 무명이다.
이 말은 소화는 됩니까?
예 하여튼 인문학적으로 풀어보면 무명의 내용이 이거다 이거예요.
그럼 이거를 바로잡으려면
이것을 무의식적 생각 동일시를 바로잡으려면
무의식적을 의식적으로 해야 되겠죠.
무의식을 의식으로 바꾸고, 의식적.
생각이 아니라
생각을 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본래 나를 나라고 해야 되죠.
맞아요?
그럼 본래 나는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생각이 있건 없건 깨어 있는 우리의 의식
다시
생각이 있건 없건
항상 깨어 있는 우리들의 의식.
그러면 의식적으로 의식을 동일시해야 되죠.
무명을 명으로 바꾸려면
의식적으로
자기 의식이 자기라고 하는 그 동일시를 의식적으로 한다.
무명의 습관을 명, 반야 지혜라고 불러요.
지혜의 습관으로 바꿔 나가는 것
이게 말하자면 수행이라면, 이게 습관 바꾸기.
말 나왔으니까 생각이 나네요.
선에서 그 당나라 시대에
선의 황금기에 두 사람의 라이벌이 있었어요.
한 명은 임제
동시대에 또 한 명의 아주 뛰어난 선사가 있었는데
그 사람 이름은 덕산이에요.
그때는 뭐라고 불렀냐 하면 ‘임제할’, ‘덕산방’이라고 불렀어요.
임제는 “진리가 뭡니까?”라고 물어보면
‘진리가 뭡니까?’라는 것이 생각이잖아요.
그 생각으로 물어보는데 생각으로 답하면
둘 다 지금 미스테이크를 계속
무명 속에서 대화 나누는 것이라서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생각을 탁 끊어주기 위해서
물어보면
할을, 고함을 탁 쳤다 이거예요.
물어보면 고함을 탁 치는 것
그래서 그 생각을 딱 끊어주는 것
이게 임제의 가르침이에요.
근데 그 임제를 정말 믿는 사람이
그 고함소리에
“아, 내가 생각으로 또 생각으로 뭔가를 또 묻고
생각의 답을 기다리고 있구나” 하고
“생각 속에서 못 헤어나고 있구나” 하고 알아차리는 그 기회를 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할’을 가지고 ‘고함’을 쳐서
그 사람의 정신 차리게 만드는 것
생각에서 나오게 만드는 것
공부는 생각에서 나오게 하는 게 핵심이에요.
그러니까 임제가 ‘할’을 했다, 이해되죠?
그리고 ‘방’이라는 말은 몽둥이 방(棒)자예요.
덕사는 “진리가 뭡니까?” 물어보면
몽둥이로 때렸다 이거예요.
덕산방_ 덕산 스님은 방을 썼고
임제할_ 임제는 고함을 가지고 가르쳤다.
지금 중요한 거는
“진리가 뭡니까?” 할 때
‘진리는 이런 것이다’라고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건 생각이고, 생각에서 나오게 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고함이나 몽둥이를 썼다.
이게 선의 황금시대에, 조사선 시대에 이렇게 했어요.
서암 스님은 서암사에 살았기 때문에 서암이라고 불렀어요.
암환주인(巖喚主人)
서암 스님은 환_ 부른다, 주인을 부른다.
그래서 서암 스님은 어떻게 했느냐 하면
항상 툇마루에 방장 스님이었어요.
서암사의 방장 스님이었는데
이 스님은 가만히 보면
거의 대부분 시간이 툇마루에 딱 앉아서
방장실 툇마루에 앉아서
아무도 없는데 혼자서 자문자답을 하는 거예요.
뭐라고 부르냐 하면
“주인공아”
자기가 자기 보고
“주인공아” 하고 스스로
“예”
“깨어 있어라.”
“예”
“남에게 속지 마라”
“예”
계속 하루 종일 그러는 거예요.
유명한 일화예요.
보세요.
주인이 주인공, 혹은 줄여서 주인
생각이 주인이에요? 의식이 주인이에요?
지금 안목이라는 것은
생각하고 의식을 구분할 줄 아는 게 안목이에요.
지금 무위법 할 때 차원에 대한 안목.
차원이, 생각의 차원하고 의식의 차원하고를 구분할 줄 아는 것
이게 우리 공부의 아주 핵심이에요.
생각은 생겼다가 사라지는 현상이고
의식은 생각 안 해도 의식은 있죠.
소리 들려요.
생각 안 해도 소리 듣죠.
의식이 듣죠.
의식은 자동적으로 하는 것, 힘이 들지 않는 것.
소리 듣고 여러분 저를 포함해서 여기 보이죠?
여기를 보시는데 힘이 듭니까?
생각하면 힘이 들지.
근데 생각 안 해도 저절로 보이고 들리고 하지요.
그게 의식이에요.
의식은 말하자면 컴퓨터의 기본 모드
그리고 채널 돌리면 드러나는 것은 생각
드러나는 것은 현상
기본 모드는 액정 화면에 깔려있는 그 액정 화면 자체.
항상 공부를 할 때
보통 사람은 의식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고 살아서
무의식, 즉 생각을 자기라고 동일시하고 산다.
오늘 제가 이런 식으로 약간의 개념 정리를 해드리는 것은
일단 공부할 때 이렇게 명료하게...
이건 뭐냐 하면 여러분
자기가 고통이 있다는 것은 병이 났다는 소리예요.
그럼 병의 원인을 알아야 되잖아요.
대부분 사람들은 병의 원인을...
병의 원인을 알면 약이 있어요.
근데 병의 원인을 알기가 어려워요.
병원 가보세요.
병의 원인 알려고 뺑뺑이 돌잖아요.
뭐 찍고, 뭐 찍고, 뭐 검사하고, 하루 종일 해야지 원인이 나오잖아요.
근데 그 하루 종일 찍고 검사하는 것을
석가모니 부처라는 분이
우리 대신에 먼저 정말 정밀하게 해봤다 이거예요.
그래서 해봤더니 원인은 [무명]이다.
무명의 내용을 현대식으로 설명하면
무의식적으로, 의식하지 못하고, 자동적으로, 습관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생각을 자기라고 동일시하고 있는 것
이게 가장 근본 원인, 첫 단추 잘못된 것
여기서 지금 잘못이 나와서 그래서 [갈애]라고 하는
이 생각과 생각을 일으키는 이 ‘몸’을 나라고 해서
이것이 ‘아무개’라고 하는 자아가 되어서
이것이 ‘나다’ 하고 하니까
그 나는 이 대상에 대해서
사랑하고 미워하는 이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구조
그 속에 지금 우리가 수십 년을 살아왔다 이거예요.
이게 지금 병의 원인이다.
병의 원인을 알아야지 치유를 할 거 아닙니까?
가장 기본적인 병의 원인은
지금 무의식적으로 이 순간에도
생각을 나라고 착각하고 살고 있는 것
이게 무명이다 이거예요.
이걸 바로잡기 위해서
서암 사언 스님 같은 경우는
이걸 바로잡기 위해서 자기가 깨달은 거예요.
“아, 나는 생각이 아니고, 왔다 가는 손님인 생각이 아니고
항상 이렇게 깨어 있는
365일, 24시간, 항상 깨어 있는 자기
이게 의식이구나” 하는 걸 깨달았다 이거예요.
그러면 그 의식을 깨달아도
습관적인 생각이 또다시 나를 의식이라고 안 하고...
여러분 의식은 남자예요? 여자예요?
남자 여자라고 말할 수 없죠.
의식의 크기? 말할 수 없죠.
의식의 모양? 말할 수 없잖아요.
툭 트여 있잖아요.
그러면 그 툭 트여 있는 것이 나예요.
아니 그냥 깨놓고 말하면
툭 트여 있는 이것이 난데
우리들은 그 툭 트여 있는 상태로 못 살고
몸을 중심으로 해서
몸에 붙어 있는 생각 찌꺼기들, 생각 무더기들을 조잡하게 얽어서
나라고 지금 동일시하고 살고 있다, 이거예요.
이게 나가 되니까
밖에 있는 건 남이 되고
나는 남하고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구조.
왜냐하면 보자마자 ‘좋다, 나쁘다’ 해버리니까
이 나라는 놈은 특징이
상대를 만나자마자
“내 마음에 든다, 안 든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보자마자
“든다, 않는다” 이렇게 해서
항상 갈등을 일으키고
사랑과 미움을 갈등을 일으키는 존재다, 이거예요.
그걸 나라고 하니까 인생이 고달프다, 이거예요.
항상 갈등 속에 있다.
근데 이거를 바로잡기 위해서 봤더니
나는 그 째째한 생각들이 아니고
생각은 째째한 거 아세요?
이럴 때는 경상도 말을 써야 돼.
자기를 동일시하는 생각들은 좀 보면 되게 이기적이에요.
기본적으로 좀 이기적이야.
그래서 이걸 꼬롬하다 그래
사투리로 꼬롬해, 이 생각들이.
그런 것이 아니고
툭 터진
오늘 날씨 좋네요.
햇살이 아주 싱그럽고
저 밖에 은행나무의 첫 이파리가 막 터져 나오네.
좋은 시절이네요.
이 지금 햇살이 가득 찬 이 푸른 하늘처럼
툭 터져 있는 무한대의 의식이 난데
이걸 놓친다 이거예요.
이걸 발견해도 놓친다.
암환주인(庵喚主人)
서암 화상은, 서암이
환_ 불렀다, 주인을 불렀다.
주인이 자기의 주인이다, 이거예요.
자기의 주인은 생각이 아니고
무한대로 깨어 있는 푸른창공 같은 의식이다.
의식 있죠?
의식 없는 사람?
의식 있죠.
그 의식은 생각이 오건 가건 상관없이
의식은 항상 이렇게 있어요.
요게 나예요.
지금 의식이 보고
의식이 듣고
의식이 느끼고, 촉감
실제로 자세히 관찰해 보면
모든 것을 의식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있어요.
근데 그것을 까먹고
여전히 생각의 습관은 강해서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어디론가 그 생각의 내용으로 끌고 간다.
생각의 내용은
대개 과거 아니면 미래예요.
현재에 깨어 있지 못하고
과거나 미래로 우리를 끌고 가는 거예요.
그것을 이기기 위해서
앉아서 스스로
“주인공아.”
“예”
따라옵니까?
의식이 깨어 있으면서 자기 의식을 보고
“주인공아” 하고 스스로
“예”
“깨어 있어라.”
“예”
“남에게 속지 말라.”
“예”
요랬다 이거예요.
왜 이런지 이해되세요?
12연기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고통으로 끌고 가니까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서
깨어 있는 훈련을 스스로 그런 식으로 했다.
이게 참고가 되잖아요.
이 말을 현대식으로 직설적으로 번역을 하면
주인공이 의식이죠. 맞아요?
그러면 자기가 의식이죠.
자기가 의식으로 깨어 있으면서
자기가 자기 보고
“의식아”
“예”
“깨어 있어라.”
“예”
“생각에 속지 말라.”
“예”
지금 따라옵니까?
근데 그걸 놓치면 어떻게 돼요?
이걸 딱 놓치면 어느새 생각이 쓱 와서
우리를 어디론가 끌고 가 버리는 거죠.
그러면 컴컴하죠, 갈등의 세계죠, 그렇게 되면.
공부가 자기가 생각이 아니고 의식이라는 걸 한 번 깨닫기는 쉽지만
습관적으로 와서 나를 채가는 그 생각에 딸려가지 않기는
굉장히 뚝심이 필요해요.
이게 지금 수행이라고 하는 거예요, 수행.
서암 화상이 지금 ‘주인공아’ 하고 부른 거나
천하의 경허도 돌아가시면서
임종게, 마지막에 이렇게 하고 돌아가셨다 이거예요.
이 말은 경허도 평생을 이렇게 했다, 이거예요.
경허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 돌아가시면서
경허가 죽으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임종게가 뭐냐 하면
동그라미 하나를 턱 그리고
이거 원시는 중국의 선사의 원시예요.
근데 좀 긴데 그중에서 네 줄만 딱 뽑아서
경허가 돌아가시면서
일원상을 하나 턱 그리고
이 시를 딱 쓰고 돌아가셨어요.
경허가 평생을 살아왔던 경허의 살림살이를 남기고 간 거예요.
심월고원(心月孤圓)
광탄만상(光呑萬像)
광경구망(光境俱忘)
부시하물(復是何物)
경허 스님 말씀에
심월_ 마음 달, 이때 마음은 의식이죠.
항상 마음 심(心)자는 요즘 말로 번역을 하면 의식이에요.
그러면 심월_ 의식의 달,
이 말은 밤이 깜깜한데
달이 딱 뜨면 그 빛이 고고하게 전체를 비추잖아요.
그것처럼 우리들의 의식이 심월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이 의식이 지금 비춰서
이 적막강산을 생기 있는 삶의 현장으로 만들어주고 있어요.
지금 이해돼요?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는 그냥 죽은 적막강산이에요.
내가 있음으로써
이렇게 봄에 새싹이 나오고 하는
이 아름다운 햇살과 이 모든 것이 다
내가 안 알아주면 이게 어떻게 성립하겠어요.
아니 이걸 알아주고 안 알아주고 이전에
내가 없으면 존재하지 않아요.
이 세계가, 이 우주가, 이 시공간이
지금 나의 의식이 없으면 이것은 존재하지 않아요.
무서운 일이에요.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우주적인 사건이에요.
심월_ 마음 달이라는 말은
우리 한 명 한 명의 의식을 말하고 있다.
빛을 비추는 의식.
심월이 고_ 고는 외로울 고(孤)자인데
왜 심월은 외롭느냐 하면
이거는 무한대라서 그래요.
우리들의 의식은 무한대죠.
이 세상은 의식 하나밖에 없는 거예요.
하여튼 신기해.
저는 이 대목만 오면 이렇게 좀 약간 짜릿해.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의식이 있죠?
저의 의식이 있죠?
우리가 지금 서로 이심전심하고 있죠?
의식과 의식이 서로 끼어서 서로 이렇게 교류하고 주고받고 있지 않아요.
경계선이 어디예요?
여러분의 의식하고 저의 의식 사이의 경계선
어디까지가 내 의식이에요?
없잖아요.
제 의식도 무한대고, 여러분 각자의 의식도 무한대잖아요.
무한대의 부분이 유한이 아니에요.
무한의 부분은 무한이에요.
한 개 무한인데 우리 각자의 의식도 무한이에요.
이 의식이 한 개밖에 없기 때문에 고자를 많이 써.
고월(孤月)이라는 말도 많이 써요, 외로운 달이라고 표현해.
이거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이건 하나다.
그리고 원(圓)_ 둥글다는 것은 완벽하다는 뜻이죠.
여러분께서 이 의식으로 보는데
여러분 의식이 이 세계를 보는 데 있어서
장애 받는 게 있나요?
깜짝 놀래요.
이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아무개라고 하는 개인이 하는 게 아니라
사실은 이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이 한 개 의식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심월이 고원하다,
이 말 한마디 속에 굉장히 많은 게 들어 있죠.
그리고 광탄(光呑) 거기서 빛이 나오는데
여러분 우리 의식에서 빛이 나오고 있어요.
방광한다 그러잖아요. 방광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의식이 방광하고 있어요.
광이, 그 빛이 탄_ 마신다.
만상(萬像)_ 만 가지 모양들을, 만 가지 산물들을 다 마시고 있다.
여러분 그렇지 않나요?
지금 이 의식이 이렇게 비춰서
이 만가지 사물들을 다 지금 품 안에 품고 있다.
그러면서 광경(光境)이 구망(俱忘)
본질인 의식의 빛도 잊어 먹고
그리고 비춰지는 이 경계들,
광과 경, 빛과 경계를, 이 대상을,
구_ 모두, 망_ 망각하다, 모두 잊어버릴 때
이 말은
이 자연스럽게 모두 펼쳐져 있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때.
지금 스스로는 본질과 현상이 분명해요.
본질인 의식과 현상으로 드러나 있는 이 삼라만상이 스스로 분명해.
그런데 이걸 굳이 본질이다, 현상이다, 하지 않는다 이거예요.
그걸 하지 않는다.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본체와 작용을 모두 가만히 두고 내려놓았을 때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지만
이거다 저거다, 본질이다 현상이다라는 생각을 안 해.
그래서 광(光)과 경(境)이 구(俱) 모두 망(忘) 다 내려놓았다 할 때
마지막에, 돌아가시는 마지막 말이 뭐예요?
부(復)_ 다시
시(是)_ 이것이
하물(何物)_ 뭐꼬, 다시 이것이 무엇인가?
몰라서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게 아니고
이 한 덩어리 상태에서
한 덩어리라서 이제는 구분하지 않아.
그래서 뭐라고 알 수가 없다.
알면 분별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는 말은
이것을 대상으로는 알 수 없는데
자기는 이렇게 분명하다.
그래서 이 “부시화물”이나
“주인공아” “예”
“깨어 있어라” “예”
“생각에 속지 마라” “예” 하고
계속 이 자각을 스스로 다지고 있는 거 하고
경허 스님도 돌아가실 때 마지막이
자기 깨달은 경지를 다 이야기해 놓고
모든 걸 다 잊어먹는다.
그리고 다시 “이것이 어떤 물건인가?” 하는
이 하나의 자각 속에서 돌아가는
평생을 이거 하나를 딱 가지고 살았다 이거예요.
그러면 다시 “이것이 무엇인가?”
이것이 진짜 화두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화두라는 것은
처음에는 몰라서 무엇인가지만
나중에는 이건데, 이거 하나밖에 없어서
빛이니, 경계니, 다 잊어먹고
이거 하나밖에 없는 온전한 상태에서
이거를 뭐라고 할 수 없어서
달마는 이걸 모른다고 했고, 달마는 ‘불식’ 모른다고 했고
보조국사는 ‘불회’ 알 수 없다고 했고,
경허는 다시 ‘어떤 물건인가?”
자기는 분명한데 뭐라고 말할 수는 없어.
입을 열 수가 없어.
이미 한 덩어리가 되어서
우리가 계속 이 의식을 깨닫고 난 뒤에도
의식하고 하나 된 사람은 알 수 없어요.
드리고 싶은 말씀은
지금 우리가 [무명]의 연쇄 속에서 일반적으로는 살고 있다.
무명, 내가 누군지 착각하고 있다.
몸과 생각을 나라고 동일시하는 것
이걸 바로잡아야 되고
그것 때문에 [갈애]
갈애의 내용은 번뇌예요.
갈애의 내용은 번뇌, 장애라고 대개 불러요.
’번뇌의 장애‘ 할 때
장_ 막힐 장
애_ 안 내려가고 걸린 상태
막혀서 걸려 있는 상태
여러분 인생이 시원하게 뻥 뚫려야 되는데
유쾌 상쾌 통쾌하지 못하고
뭔가가 여기가 막혀서 걸려 있는 상태
요게 장애의 뜻이에요.
막혀서 걸려 있다
이게 번뇌예요.
보통 사람은 뭔가가 여기가 막혀서 살아가는 그런 거예요.
오래된 습관이기 때문에
시간 투자를 해야만이 바로잡아요.
아직 의식을 못 깨달은 사람은 빨리 의식을 깨달아야 되고
의식을 깨달은 사람은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생각의 습관에 빨려 들어가는 것을
계속 스스로 돌이키고, 돌이키고 해서
이 자리를 딱 깨어서 사는 방법을 확립하기.
이게 공부다 이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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