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즉문즉설(2024)

[법륜스님의 하루] 모든 것이 공하다는 가르침이 삶의 의욕을 떨어지게 합니다. (2024.06.08.)

Buddhastudy 2024. 6. 18. 19:21

 

 

사전 학습을 통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읽어봤을 때,

그게 저를 더 혼란스럽게 하고

때로는 의욕을 떨어지게 만들기도 합니다.

지금껏 제가 이해한 바로는

공을 무상함으로,

즉 서로 연기되어 있는

인과관계가 결국에는 텅 비어있다고 해석했습니다.

가족 관계나 야망과 같이 제가 삶에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들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공이라는 관념에 접근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궁금증이 생겨서 고민입니다//

 

 

()이라는 말은 중국 문자로, 비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글자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같은 글자라고 해도

앞뒤 문맥에 따라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달라집니다.

한 가지 의미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10가지, 20가지의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한 글자의 뜻이

한 가지 의미만 갖는다고 이해하면

그건 색()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고

그것이 앞뒤 문맥에 따라서

이리저리 의미를 달리한다고 이해하면

그건 공()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라는 말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여러 의미가 있는 와중에 그중 딱 하나의 의미로 정해져 있지 않다는 걸 말합니다.

 

다른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은 질문자를 보고 좋은 사람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질문자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때는

질문자에게 어떤 좋은 사람이라고 할 만한 요소가 있다는 걸 말하고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때는

어떤 나쁜 사람이라고 할 만한 요소가 있다는 걸 뜻합니다.

이렇게 좋은 요소든 나쁜 요소든

그러한 요소가 있다는 것이

()에 반대되는 언어인 색()의 관점입니다.

 

()은 이 사람이 보기에 질문자가 좋아 보이고

저 사람이 보기에 나쁘게 보일 뿐이지

질문자 자체에는 좋은 것도 없고 나쁜 것도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 질문자에게 어떤 좋은 요소가 있어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어떤 나쁜 요소가 있어서

나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질문자에게는 좋은 요소라고 할 것도 없고, 나쁜 요소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다만 보는 사람에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좋아 보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나빠 보이기도 할 뿐입니다.

이럴 때 질문자는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고

()이다하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좋다 나쁘다고 할 만한 요소가 없다는 뜻입니다.

 

다른 예로

어떤 물질을 생각해 봅시다.

어떤 사람은 이 물질을 조금 섭취해서 병이 나았어요.

그러면 그 사람은 이 물질을 가리켜서 좋은 약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이 물질을 섭취해서 오히려 몸이 아파졌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이 물질을 가리켜 독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이 물질은 약일까요, 독일까요?

 

세상에서는 주로 세 가지로 말합니다.

첫 번째는 이 물질은 약이라고 말하는 경우이고

두 번째는 이 물질은 독이라고 말하는 경우이고

세 번째는 이 물질에는 약성도 있고, 독성도 있다고 말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공()입니다.

이 물질에는 약성도 없고 독성도 없고, 다만 그 물질일 뿐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따라

약성으로 나타날 때도 있고, 독성으로 나타날 때도 있을 뿐입니다.

 

물질에는 약성도 없고, 독성도 없고

다만 물질일 뿐이라는 것이

이 물질은 공()하다하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것이 물질적이든 생물학적이든 정신적이든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진실은 공()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인연을 따라

즉 시간과 공간의 조건을 따라

어떤 때 어떤 사람에게는 좋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다른 때 다른 사람에게는 나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약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독성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기 때문에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고,

()이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하고, 나쁜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이 존재의 본질을 일컫는 말이라면

()은 그것이 인연을 따라 우리에게 드러났을 때

이렇게도 드러나고 저렇게도 드러나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모든 존재의 본질이 공()인 줄 알면 괴로울 일이 없습니다.

상대방은 좋은 사람도 아니고 나쁜 사람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거나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시간과 공간의 조건에서는

때로는 좋게, 때로는 나쁘게 나타날 뿐입니다.

 

나를 기준으로는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그 사람의 본질은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사람일 뿐이에요.

그런데 지금 표정을 보니까 잘 알아듣는 것 같지가 않네요.

 

계율마저도 공()하다고 봐야 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항상 객관적으로 진리라고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심지어 계율이라고 해도

시간과 공간을 떠나서 절대적인 진리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무언가 절대적인 진리, 객관적인 진리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설령 계율이라고 해도

그렇게 생각하면 굉장히 위험해집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나침반을 놓으면

침이 흔들흔들하다가 북쪽을 가리키듯이

붓다께서도 시간과 공간의 조건 속에서

바른 길이 정해진다고 하셨습니다.

 

바른 길이라는 게 미리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주어진 시간과 공간의 조건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소승 불교에서는 중도(中道)라고 말합니다.

 

소승 불교에서 중도(中道)라고 말하는 것이

대승 불교에서는 공()이라고 불리게 된 겁니다.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소승 불교에서 이것이 진리다하고

형식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서,

그것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이

대승 불교의 공()이었습니다.

대승 불교의 입장은

진리라고 하는 것마저도 공()하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대승 불교에서도 공()이라는 단어가 처음부터 등장한 것은 아닙니다.

처음에는 소승 불교에서

이것이 법()이다하고 지나치게 절대화를 하기 시작하자

이에 반대해서 대승 불교에서는

정해진 법이 없다하는 주장을 했습니다.

 

소승 불교의 이것이 법이다하는 주장에 대해

대승 불교에서는 법이라고 정해진 것이 없다하며 비판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이다하는 표현으로 바뀌어 나간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라고 정해진 것이 없다하는 것이

()의 의미입니다.

()이라는 단어 때문에

공간적으로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다는 개념으로

잘못 이해될 수 있는데

실제 의미는 정해진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상대에게 집착을 합니다.

특히 자기가 좋아하는 상대방에게 집착을 하고

자기 뜻대로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막상 자기 뜻대로 안 되면

기분이 나빠집니다.

 

그 정도가 심해지면

그다음엔 알았다하고 내버려 두거나 포기하게 됩니다.

이것이 무관심입니다.

 

그러나 존재가 공()한 줄 알면

집착할 바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상대방이 원하는 대로 해줍니다.

 

그가 도와 달라면 도와주고,

도와 달라고 하지 않으면 돕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상대에게 집착하지도 않고

상대에게 무관심하지도 않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