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멘토·코딩교육

[인생멘토 임작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용감한 사람으로 아이가 성장하게끔 돕는 방법

Buddhastudy 2024. 7. 3. 18:49

 

 

두 살 차이나는 첫째 딸과 둘째 아들을 키우는 엄마가 있었어요.

그런데 딸이 동생보다 키가 작은 거예요.

그리고 아이가 자기가 키가 작다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습니다.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으면

아이가 키 크는 약을 사달라고 해서 그것도 먹고 있대요.

엄마는 아이가 키에 민감하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아이 앞에서 키 이야기를 하지 않으신다고 하고요.

 

그런데 아이들이 밖에 나갈 때도 있잖아요.

엘리베이터를 타면

남매를 보고 어른들이 이렇게 묻는대요.

쌍둥이야? 오빠니?”

 

그러면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아서 집에 오면 울기도 하고

어른들은 왜 그렇게 아이들 나이를 궁금해 하냐?’면서 계속 짜증을 낸답니다.

 

이런 상황이 자주 발생하니 엄마도 당황스럽고

아이를 어떻게 도와줘야 되는지 난감하신 거죠.

 

엄마가 아이를 어떻게 도와줘야 할까요?

 

 

--아이의 자기권리감 키우기

 

양육 문제를 잘 풀려면

왜 그것이 문제가 되는지

그 원인을 디테일하게 분석해봐야 합니다.

 

그래서 이 문제에선

아이가 왜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는지를 확인해봐야죠.

그래야 아이 마음을 충분히 공감해주면서

감정코칭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에요.

 

우선 키가 작다는 건 많은 사람들에게 컴플렉스죠.

키가 작은 거 그 자체로는 결코 문제가 아닌데

그게 심리 사회적으로는 문제가 되기 쉬워요.

그것이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에요.

 

키는 눈에 보이고

그래서 아주 쉽게 비교가 되잖아요.

아이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그런 열등감을 이성적으로 잘 처리하는 방법을 배우고 연습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아이를 도와주기는 커녕

어른들이 "쌍둥이야? 오빠니?" 하고 아이에게 물어본다면

아이의 열등감이 계속 자극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아이에게 쌍둥이인지 오빠인지를 물어보는 건

명백한 프라이버시 침해입니다.

한국의 많은 어른들은

아이니까, 아이한테는 그런 걸 물어봐도 괜찮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나 성인들에겐

"혹시 쌍둥이세요? 저쪽이 오빠인가요?" 하고 안 물을 거 아니에요.

아이니까 그런 질문을 그냥 하는 거예요.

 

상대가 성인이라면

우리가 하지 않아야 하는 행동을

상대가 아이라고 해서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건 무례한 행동입니다.

 

역으로 아이가

"혹시 아줌마는 나이가 몇 살이에요? 자녀들은 몇 명이에요?

키가 몇 센티미터에요? 몸무게 70킬로 넘나요?"

이런 걸 물어봤다면

아이에게 물어봤던 그 어른이 어떻게 느꼈겠어요?

 

본인은 그런 질문 받으면 싫어할 거면서

왜 아이에게는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물어보냐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런 어른들은

아이의 마음을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위주로 아이에게

자기 나름의 친근함을 표시하는 것일 수도 있어요.

그러나 아무리 그것이 친근함을 표현하는 것일지라도

상대방이 싫어하면 안 해야 합니다.

 

내가 아이에게 어떤 걸 물어봤을 때

그것이 아이에게 어떤 심리적 영향을 미치게 될까?

이런 걸 생각해 볼 수 있는 집단 메타인지가

우리 사회에 이제 있어야만 합니다.

 

아이는 어른들이 그런 걸 물어볼 때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지만

상대가 같은 아이가 아니라

나보다 큰 어른이잖아요.

그러니까 싫다는 내색도 표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는 겁니다.

 

같은 아이들끼리는 그런 걸 물어보지도 않아요.

그건 아이들이 관심이 없는 주제에요.

한국 어른들이 관심을 가지는 주제죠.

 

상대방을 진정으로 아끼지도 않으면서

그냥 궁금하니까

오지랖이 넓은 것은 한국 문화의 독특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부모의 양육 방식과 자기권리감

 

상류층과 빈곤층 부모의 양육 방식에 대해 사례연구를 수행한 사회학자 아넷 러로는

상류층 부모의 양육 방식이

자녀의 사회적 성취에 유리함을 준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불평등한 어린 시절>이란 어마어마한 책을 출간하셨습니다.

 

그분의 연구에서 상류층 집안의 아이들이 보이는 독특한 특징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어른들 앞에서도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것에 대해 주저함이나 거리낌이 없었던 거예요.

 

보통 아이들은 처음 보는 어른들 앞에서는

좀 부끄러워하고 소심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이 아이들은 상대방이 어른이라고 해도

소위 말해 졸지를 않는 겁니다.

또박 또박 자기의 생각을 논리정연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아이들은 자신을 어린 꼬마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어른과도, 비교적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태도 자체가 당당한 느낌을 주는 거죠.

 

반면에 빈곤층 아이들은

어른들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거나 좀 주눅이 들어 있었어요.

자신의 생각을 자신감있게 이야기하질 못했습니다.

"내가 어른한테 어떻게 이런 생각을 말할 수가 있겠어?" 이런 거죠.

 

저도 저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어른들이나 선생님들이 너무나 큰 존재로 느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그분들이 지금의 나보다 한참 나이도 어리고

결점들도 많은 미성숙한 사람들이었는데

제가 어리기도 하고

저의 성장 환경은 빈곤층 양육 방식에 가까웠기 때문에

저 스스로 당당하지가 못했던 거죠.

저의 응당한 권리를 주장을 못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억울했던 점이 하나 있는데

저의 학창 시절 연좌 책임을 묻는 학교 선생님들이 그렇게 있었어요.

 

제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서른네 살 체육 교사가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떠들고 산만하니까

집합을 시키고, 줄을 서라고 했어요.

전 말 잘 들었던 학생이니까

선생님 말에 순종하고, 줄을 서려고 했는데

하필이면 선생님 앞에 줄을 섰었고

선생님이 저와 제 주위에 있는 동기들 머리를

딱 소리가 크게 날만큼 몽둥이로 내리쳤습니다.

 

몇 명을 본보기로 때리는 걸 보여주면

학생들이 말을 잘 듣는다는 사실을, 그 선생님은 아셨어요.

저희가 그렇게 맞는 것을 보고

모든 동기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습니다.

 

저는 머리가 아파서 죽을 것 같은데.

그리고 너무 억울했죠.

난 잘못한 게 없고

오히려 선생님 말을 잘 들으려고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맨 앞으로 선생님 앞에서 줄을 선 겁니다.

 

한번은 28살 영어 선생님이 반 아이들이 너무 떠들었다고

다음 번 수업 시간에 아이들을 교실이 아니라

운동장에 집합시켰어요.

그리고 21조로 해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 두 발을 손으로 잡고

두 손으로 작은 돌들이 가득 있는 운동장 흙밭을 두 손으로 걸어가게 시키셨어요.

그걸 수업 시간 50분 내내 하게 했습니다.

 

제가 그걸 하면서 정말 억울한 거예요.

전 안 떠들었거든요.

그 벌을 받고 나서

제 손바닥이 다 까져서 피부가 벗겨졌어요.

 

이런 게 대표적인 군대 문화죠.

남성 교사들이 본인이 군대에서 그런 경험을 많이 해봤기 때문에

학교에 와서 자신들이 당했던 똑같은 짓을, 똑같이 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같은 학생들이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고 주장할 수 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학생들이 어디 있었겠어요.

억울하지만 스트레스받으며 그냥 넘길 수 밖에요.

사례에서의 아이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아넷 러로는

계층에 따른 이런 아이들의 태도를 구분하는 개념으로

상류층 아이들에게 자기권리감이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나에겐 응당 존중받고 누려야 할 권리가 있으며

그것이 침해되었을 경우엔

용감하게 나서서

내 권리를 지키겠다는

일종의 마인드셋과 용감함인 거죠.

 

자기권리감을 성품들로 이해해보자면

비판적 사고와 판단력으로

이것이 공정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사고할 수 있는 개방성공정함

그런 사고에 기반해 부당함에 맞서 권리를 지키고자 일어설 수 있는 용감함

자기권리감을 구성하고 있는 성품들입니다.

 

3가지 성품들 중에서 어느 하나라도 미비하면 자신의 권리를 지킬 수가 없습니다.

당시 저에겐 그런 자기권리감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냥 스트레스받으며 참고 지낼 수 밖에 없었어요.

과거를 생각해보니 불쌍했네요.

 

 

--감정코칭을 통한 자기권리감 훈련

 

그래서 저의 어린 시절에, 누군가가 멘토로서

제가 자기권리감을 잘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야 합니다.

제가 제 권리를 지키지 못했던 것은

일종의 비겁함이었죠.

 

무서웠기 때문에 당당해지지 못했고

제 권리가 침해당하는 것을 주장하지 못했던 거예요.

그러니 인생에서 손해가 얼마나 많았겠어요.

 

내 권리를 지킬 수 있어야

남의 권리를 소중하게 여길 수 있고

공동체가 형성이 되어

이 사회가 점점 좋아지는 겁니다.

 

따라서 부모님들은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자기 권리를 잘 지킬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셔야 하는데

이런 사건이 발생했을 때 부모님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이가 자기권리감을 키울 수 있도록

감정코칭을 해주시는 일이에요.

 

아이가 이런 일을 당하면 얼마나 스트레스 받겠어요.

저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 교사들 얼굴이며, 심지어 나이까지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거예요.

 

아이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해 주시고

아이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게 도와주시되

이제 자기권리감을 키워야하므로

엘리베이터에서 어른들이 그런 질문을 했을 때

어떻게 대응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아이와 같이 전략을 짜는 것이 핵심이에요.

 

아이가 그런 어른들에게 말해줄 수 있는 모범 답안이 있어요.

하나를 알려드리자면

아이가 그런 상황에서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그런 개인정보를 저에게 물어보시는 건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9살 짜리 아이가 만약 이렇게 말한다면

상대 어른들은 많이 놀랄 겁니다.

 

"9살짜리 아이가 개인정보라는 개념을 알아?"

이렇게 말하면

상대를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권리를 내가 지키겠다는 의사를 표시한 것 뿐이죠.

 

그러면서 상대 어른은 자기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을 거예요.

물론 깨닫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우리 아이는 어쨌든 훌륭하게 자기 권리를 지킨 거니까요.

 

그런 어른들이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저런 피드백을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못 받아 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피드백을 아이 입에서 들으면 얼마나 그게 이해가 잘 되겠어요.

각인이 팍 되겠죠.

그래서 새롭게 깨달았다면

다시는 아이들에게 그런 비슷한 질문을 하지 않을 겁니다.

 

부모님이 이런 사회적 맥락에 대해 아이와 같이 이야기를 하시고

아이가 상황을 파악한 다음

스스로 대응 전략을 짜볼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감정코칭이에요.

 

자기권리감은 이렇게 지적이고

논리적인 사고 과정을 수행해야 길러지는 겁니다.

그래서 지적 훈련을 강조하는

상류층 부모들의 양육 방식 아래에서 크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자기권리감을 가지게 되는 거예요.

 

아이 주도를 통해 적당한 전략이 세워지면

거울을 보고 아이가 연습해 보게끔 해줘도 좋겠죠.

거울 앞에서 말하는 걸 연습해 보는 거예요.

 

그렇게 연습이 된 아이는

이제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면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서

용감하게 나설 가능성이 높아지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경험 한 번이

아이의 인생에서 얼마나 힘이 되겠어요.

 

 

--우리가 아이의 미래입니다

 

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그 아이들 부모님의 양육 방식을 항시 체크하게 됩니다.

아이가 정말 잘 컸으면 하는 바람이 크기 때문이에요.

 

잘못 크면 안 되는데...

잘 성장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아이를 도와주는 부모가 첫 번째,

아이가 성장하는 공동체 환경이 두 번째란 말이죠.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는데

아이가 잘 성장하려면 정말로 그러합니다.

모든 어른들이 아이를 잘 성장하게끔 도와주어야 하는 거예요.

 

그리고 사실 그건 아이를 도와주는 것만이 아니라

어른들 본인을 도와주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아이들이 미래의 우리의 리더가 되어

우리의 삶을 편안하게 해줄 역량을 갖출 것이기 때문이에요.

 

아이들이 정말로 우리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