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이게 분명하게 드러나...
이거 생각 아닙니다. 절대
그냥 이거예요.
그냥 이거
그냥 이거
그냥 이거예요.
이 자리를 계속 두드리고 있거든요.
이 자리를.
생각이 아니에요.
그런 거랑 똑같아
우리가 어느 집에 방문했어요.
그러면은 문을 두드릴 거잖아요.
초인종이 없다고 칩시다.
그러면 생각으로
여기에 문을 두드리면
아니면 여기가 여기야라고 해서 전달이 됩니까?
안 되죠.
두드려야지 이게 전달이 되잖아요.
그런 것처럼
이거는 자기가 들어갈 문이란 말이에요.
그런 느낌이라 이게
이게 실감이라는 게
두드릴 때 이게 실감이 나잖아요.
문 두드릴 때 실감 나잖아
그렇게 비유할 수 있는 거.
왜냐하면 이거 분명하거든.
이런 거보다 더 분명하거든요.
이거는 벌써 일어난 거고
이것보다 더 분명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의심이 조복되는 거예요.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거역할 수가 없는 거기 때문에
분별심이 항복할 수밖에 없는
그렇게 그런 상태가 돼요.
이게 분명하지 않으면
분별심이 얼마나 교묘한데요.
얼마나 합리화를 잘하고, 변신을 잘하는
절대 그걸 때려잡을 수가 없어요, 그거를.
이게 분별심에 항복한다는 거는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에
이게 거부할 수가 없기 때문에 항복하는 거지
그냥 뭔가 어떤 잠깐 잠깐의 트랙이 들어간다거나 기술이 들어가면
그거 들통이 납니다.
분별심이 얼마나 교묘한데.
그래서 마구니라 하고 마왕이라고 하는 이유가 있어요.
가장 대항하기 어려운 게 그 마왕이잖아요.
마치 마술사 같아
마법을 부리는 마왕이야.
마력이 있어요, 분별의 마력이.
그게 자기도 모르게 되게 속게 만드는 게 있어요.
분별심이라는 게.
분별심은 허상인데
그거에 속으면 엄청난 위력이 있는 거예요.
사람을 살리고 죽여요. 그게.
생각에 사로잡힌 것일 뿐인데.
그게 진짜 눈앞에 있는 것처럼 만들어버리거든요.
그래서 여기에는 분별심이 힘을 못 써요.
분별심이 힘을 못 써.
왜냐면 분별도 여기 아류라 그냥
여기서 드러난 망상인 거예요.
이게 분명해지면
생각이 저절로 안 일어나고
생각이 일어나다가도 스르르 그냥 힘이 빠져버리죠.
저절로.
“아, 이거 알아차려야지, 놓아버려야지” 여기까지 가지 않아요.
그냥 딱 보면 그냥 저절로 사라지고 없어요.
“놓아버려야지”라는 그것도 없어.
보면 그냥 사라지는 거예요.
위력이 사라지는 거예요.
그 말도 좀 사람들한테
어감을 주는데
우리가 잡았다가 놓는 이런 구조가 아니라니까
그냥 딱 보면 딱이라 그냥
그렇게 되는 거지.
뭘 어떻게 노력이 들어가질 않아요.
여기 방이 어둡잖아요.
불을 딱 켜면 어둠은 사라지잖아요.
그런 느낌이었거든요. 이게
놓아버림이라는 것이
뭘 잡다가 놓았다가 이런 과정이나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라.
딱 잡고 있는 게 허상이면 끝나는 거예요.
거기서 그냥.
근데 이게 진짜라고 알기 때문에
이렇게 어두운 거지.
그게 딱 보면 끝나는 거예요.
놓아버림의 과정이 필요하지가 않아.
그냥 보면 알지.
그래서 공부가 두 번의 고비가 저는 있다고 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진짜 스스로, 이게 생각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어떤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생각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어떤 감정이 일어나더라도 감정이 오염시킬 수 없는 게 드러나는 게
가장 첫 번째 중요한 고비인 거예요.
항상 이게 뭔가 와 닿았으면요
자기 스스로 한번 그렇게 한번
진짜 이게 생각이 어찌 할 수 없는 건지
감정이 어찌 할 수 없는 건지
아니면 어떤 사람이 어찌 할 수 없는 건지
상황이 어찌 할 수 없는 건지
세계가 어떻게 어찌 할 수 없는 건지
물리적인 어떤 것이 이거를 깨부술 수 없는 건지를
항상 잘 봐야 돼.
그게 분명해지면 분명해질수록
우리가 여기에 마음을 놓게 되거든요.
근데 분명하지 않으면
그만큼 마음을 못 놔요, 쉬지를 못해요.
그래서 한 점 의혹이 없어져 버려야 돼, 이게.
한 점 의혹이 없어지면 어떻게 되냐?
저절로 안 쉬고 싶어도 그냥 저절로 쉬어요.
갈데가 사라져 버려요.
분명함이 공부를 성숙시키지
분명하지 않고 의심이 왔다 갔다 하면
그 상태에서 헤매다니거나 정체돼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안 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스스로 심장에다가 손을 얹고
칼이 들어와도 달라지지 않는
분명하게, 그런 확신이 있어야 됩니다.
생각은요.
생각은 경계고, 무상한 것이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생각으로 잡은 거는
반드시 불안정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자기 스스로 변화시키질 않아요.
그리고 진짜 이게 드러났다면요.
수많은 말들이 이렇게 그냥 쑥쑥 스폰지에 물이 스며들 듯이
이해의 과정이 아니라 그냥 쓱쓱 들어오는
머리가 귀가 듣는 게 아니라
몸이 듣는 듯한
흡습되는 듯한 느낌이 있어요, 흡수.
번번히 그냥 쑥쑥
생각을 거치지 않고
“내 얘기를 하고 있네” 이런 게 돼야 돼.
내 얘기야, 내 얘기, 내 얘기
나의 현실을 얘기하는.
그게 아니면
뭔가 머리로서 그거를 규정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면 어떤 느낌이나 상태를 잡고 있는 것이고.
(다시 해야겠습니다.)
근데 잘 보세요.
그러니까 기존에 해왔던 것도 다 놓아버리고
과거의 경험도 다 잊어버리세요.
지금 분명하면
여기에서 과거 현재 미래가 다 포섭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뭐냐면
지금 이게 분명하니 항상
지금 지금 여기
이게 그냥 여기
그냥 말이 끼어들지 않은 여기에서
이게 실감이 나느냐.
우리 물을 마시면 이게 실감이 나듯이
이게 실감이 나요.
이게 탁 와닿아야 해요.
그거를 잘 보세요.
보살님처럼 생각이 많거나 온갖 노력을 해왔던 분들은
그냥 일없이 한번 두드려보는 게
공부에 큰 가장 직접적인 변화를...
왜냐하면 여기에는 생각이 없거든.
여기서 이걸 하는데 너무 분명한 하게 이거
요 하나에서 뚫려야 된다, 요 하나에서.
일 없이 그냥 이렇게 해보는 게 더 나아요.
생각으로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해보는 게 나아요.
몸으로 부딪혀.
몸으로 하라니까
앉아 있거나 이런 게 아니라
그냥 직접적인 자극
여기에서 시원해 버리는 거거든요.
직접적인 자극에서
차라리 그게 훨 낫죠.
자기 삶에서, 지금 순간순간의 삶에서
분명해져야 돼.
다 잊어버리고.
잊어버리면 잊어버릴수록
이거를 덮고 있는 그 생각들이
엷어지고 옅어지고 그렇거든요.
왜냐하면 그 기억들이 이걸 막 덧씌우고 있으니까
이게 드러나고 싶어도 드러날 수가 없는 상황이에요.
특히나 공부에 대한 어떤 기억이나 규정이나 노력이나
이런 거 다 집어치우고
그냥 일상생활에 사십시오.
사는데 그냥 한 걸음 걷는 데서
손 하나 이렇게 움직이는 데서
그냥 뭐 한 번 부딪히는 데서 분명하냐?
사람들 체험 오는 순간에 인연들을 보면 복잡하지가 않아요.
기억에 남는 게
어떤 분은 그날 회식이 있었대.
그냥 직장 회식이 있는데 술이 좀 적당히 취했는데
집에 와서 가구 모서리에 무릎 부딪히다가 소식이 왔어요.
“아야” 하는 순간에.
거기에 무슨 생각이 있겠습니까?
그냥 지나가다가
이런 모서리에 탁 걸려서 부딪히는데
그때 딱 자각이 온 거예요.
일상을 살아가는데
그때 그 순간에 자각이 온 거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단순한 거예요.
근데 너무 복잡하고 어렵게 이거를 접근하려고 그러니까
그건 다 복잡하고 어려운 건 다 망상입니다.
이것처럼 단순한 게 없어요.
생각도 필요 없는 건데 이게
그냥 이건데.
근데 자꾸 생각으로 하려고 그러잖아요.
자꾸 생각이 끼어들고
그걸 자꾸 따라가잖아요.
공부는요.
아무 말이 없다는 얘기하죠.
아무 소리가 없다.
부처님이 그렇게 얘기를 하시잖아요.
그러니까 물론 그것도 소리지만 그것도 알아들으라고 하는 건데
그 말을 잘 새겨..
아무 말이 없는 걸 나는 계속 말하고 있잖아.
그럼 부처님 말씀하신 거하고 아무 상관없는 거예요.
부처님도 말이 없는데
내가 더 많이 설법을 해.
마음속에서.
그러니까 이게 아무 말이 없는 거예요.
진짜 중요합니다.
특히나 보살님처럼
뭔가 의도를 갖고 많이 공부해 오신 분들
그다음에 학문까지 하시고
그런 것이 나름 공부라고 생각해 오셨을 텐데
이런 경우일수록
그런 뭔가 자기가 의도를 내서 뭔가 공부를 하려는 마음이 되게 강해요.
그게 생각으로 잘 돌아갈 거고
그것은 절대 아니다.
이거는 무식한 사람도 어렵지 않게 통하는 공부예요.
그래서 옛날 선사들이 그런 얘기하잖아요.
호미가 생긴 게 '기역' 자 모양으로 생긴 것을 알 정도면
다 공부를 한다.
그게 무슨 지식이 필요합니까?
그럼 여기에 무슨 ‘기역자 모양의 호미다’ 라는
그런 지식도 필요 없는 거예요. 이거는.
그래야지 모든 거를 다 실어나를 수가 있는 거예요.
너무도 단순하고 너무도 분명한 거예요.
그래서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 애벌레도 이 힘으로 꿈틀거린다.
걔네들이 무슨 생각이 있겠어요?
그래서 보살님은
갓난아기가 태어났을 때
이미 완전하게 갖추고 있는 그것이었나를
질문해 볼 필요는 있어요. 진짜
갓난 아기한테는 공부라는 게 없거든.
특히나 머리 좋은 사람일 경우에는 그래요.
머리를 자꾸 규정하려 하니까.
/내가 엄마 배 속에서 태어났을 때 이미 완전한 것이었나
이미 갖춰져 있던 것이었나
그러면 내가 하고 있고, 노력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다 밖에서 들어온 겁니다.
밖에서 들어온 거는 보물이 아니에요.
타고난 게 보물인 것이지./
그래야지 이거는 배신을 안 하고 달라지지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거예요.
그런 얘기를 들으면
‘타고난 게 뭔가’ 막 이런 식으로
언어화 해서 상상을 하거든요.
그게 아니에요.
애기가 뭘 알겠어
그냥 이거지.
다 잊어버리세요, 다.
그냥 여기에서 분명해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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