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온 지 3년 차가 됐는데
아무래도 친구도 없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어떻게 살아야 될지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 제 스스로를 돌이켜 보니까
굉장히 배부른 돼지처럼 살고 있더라고요.
그러다 베트남에서 많은 봉사활동을 다니다 보니까
이타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점점 강해지면서,
봉사활동을 취미생활로 하는 게 아니라
이제는 제 인생 전체를 타인을 위해 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회사에 사표도 내었고 다음 주까지 근무합니다.
조그마한 자선 단체를 하나 만들면
엔도르핀 솟으면서 즐겁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8년 가까이 직장생활을 하다가
직장을 벗어나서 첫발을 떼려고 하니까
굉장히 무서운 것도 있어서 스스로 배수진을 쳤습니다.
남을 돕기 위해 필요한 최소 금액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모두 나눠주었습니다.
다만 저희 부모님께서는 굉장히 힘들어하시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이제 이해를 좀 하세요.
그런데 아버지는 굉장히 힘드신 것 같습니다.
제가 장남으로서 아직도 싱글인데,
장가도 못 가고 애도 없고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하나 걱정이 되나 봅니다.
눈물도 처음으로 제 앞에서 보이시고
지금은 3개월 정도 연락을 끊으셨습니다.
남을 도우면 도울수록
제가 저희 아버지 가슴에 못을 박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마음이 너무 괴롭습니다.
제가 어떤 선택을 하면 좋을까요?//
그냥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세상의 일반적인 삶으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 정도의 마음을 갖고서는
남을 돕는 활동을 오래 지속하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17살에 절에 들어왔습니다.
아들이 절에 들어간 것이 부모로서는 더 가슴이 아플까요?
밖에서 혼자 살면서 봉사를 하겠다는 게 더 가슴이 아플까요?
보통 아들이 절에 들어가면 어머니가 절에 찾아와서
‘너, 나 죽는 꼴 보고 싶냐?
지금 절에서 안 나오면 약을 먹고 죽어버리겠다’
이렇게 얘기하거나
'부모의 고통도 구제하지 못하는 네가
무슨 일체중생을 구제하느냐?'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것은 이미 부처님도 겪었던 일이에요.
부처님도 출가를 하겠다고 하니까
부모님이 결사반대를 했습니다.
결국 결혼까지 하고 아기를 낳은 상태에서 출가를 했습니다.
세속적으로 생각하자면
다음 왕을 계승할 사람인데
나라를 버리고 나온 셈이 되었어요.
차라리 남편이 죽어버렸으면
아내가 재혼이라도 할 수 있는데
살아서 수행자가 되었기 때문에
아내는 재혼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부처님의 아들 입장에서는
본인을 안 낳았으면 몰라도
낳아놓고 아버지가 집을 나가버린 겁니다.
인간 윤리로 보면 부처님은 불효막심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왜 우리는 부처님을 위대하다고 말할까요?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건
성인인 어머니의 인생이잖아요.
내가 나의 길을 가는 것은 나의 인생입니다.
항상 자식은 부모의 말을 들어야 한다면
자식은 부모의 노예이지, 어떻게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까?
임금의 노예든 주인의 노예든 부모의 노예든,
노예인 건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인생을 자기가 결정을 못하면 모두 노예입니다.
질문자는 스스로 무슨 대단한 결심을 한 것 같지만
제가 보기에는 인생의 주인된 자세가 불분명합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 정도 수준이면
그냥 돌아가라고 얘기한 거예요.
질문자가 아버지의 재산을 훔친다든지
집안 물건을 없앤다든지, 아버지를 욕먹게 한다든지,
이런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부모를 때리는 것도 아니고
남의 물건을 뺏는 것도 아니고
성추행하는 것도 아니고
사기 치는 것도 아니고
욕설하는 것도 아니고
술 먹고 행패를 피우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내 인생을 가는 것인데 무슨 문제가 됩니까.
그 길을 누군가 반대하고
내가 그걸 못 따라준다고 해서
'죄를 지었다' 이렇게 생각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어떤 여성이 법륜 스님을 좋아해서 결혼하자고 매달리며
'너는 한 여인도 구제 못 하는 주제에
무슨 일체중생을 구제하느냐?' 이렇게 말하면
제가 결혼을 해줘야 돼요?
질문자는 지금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남을 핑계 대고 있어요.
남을 위해서 봉사하겠다는 생각도 썩 좋은 생각은 아니에요.
남을 위해서 봉사하겠다는 건
남을 위해서 나를 희생한다는 얘기인데
사람은 희생을 하게 되면
반드시 남이 그 희생을 알아주기를 원하게 됩니다.
내가 한 일을 아무도 안 알아주면
나중에 인생이 허무해지고
‘내가 미친 짓을 했나’ 이렇게 후회하기가 쉬워요.
내가 돈이 100만 원 있는데
이 100만 원을 갖고 음식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고
술집에 가서 좋은 술 마시고
친구들하고 어울려서 놀았을 때 얻는 기쁨이 있습니다.
이렇게 내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킬 때 얻는 만족감을
‘즐거움’이라고 표현합니다.
그것보다는 배고픈 사람 100명에게 음식을 나눠주는 것이
나한테 더욱 보람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내가 비싼 옷 한 벌 사 입는 것보다는
옷 없는 사람 100명에게 옷을 사주는 게
나한테 더욱 보람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내가 뭔가 도움이 돼서 뿌듯한 마음이 드는 것을
‘보람’이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의 행복에는 이렇게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욕망 충족에 따른 즐거움은 그때뿐입니다.
나중에 후회할 수도 있고, 허전해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보람이라는 감정은 시간이 흘러도 오래 유지됩니다.
욕망을 채워서 만족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보람 있는 일을 하며 살 것인가?
이것은 내 선택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길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또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그들에게 구애받지 않아야, 그 길을 오래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남을 위해서 그 길을 가면
나중에 반드시 배신감이나 후회가 따릅니다.
그래서 위험하다는 거예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첫째, 내 이익을 추구하기보다는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둘째, 그것이 바로 나를 위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셔야 나중에 괴로움이 생기지 않습니다.
금강경에서는 이걸 ‘무주상보시’라고 표현했습니다.
옆에 누가 목이 마른다면
물 한 그릇 떠주면서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하면 내가 나중에 괴롭지 않게 됩니다.
사람들은 보통 남을 도울 때 반드시 뭔가를 기대합니다.
돈까지 바라지는 않지만,
칭찬이나 뭔가 알아주길 바랍니다.
그런 대가가 따라오지 않으면
반드시 배신감을 느끼거나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 남을 돕는 길을 가려면
남을 위해서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이런 삶이 더 보람 있다’
이런 관점을 갖고 가셔야 합니다.
저는 주로 저가 항공으로 이동하고
간소한 숙소를 잡다 보니
사람들은 저를 보고 훌륭하다거나
아니면 좀 인색하다는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가난한 곳에 가서 구호 활동을 하다 보면
그런 평가에 별로 구애받지 않게 됩니다.
그곳에서는 10달러만으로도 아이들을 지원할 수 있고,
100달러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요.
비행기를 한 번 더 경유해서 가는 저가 항공권을 구매하면
직항보다 30만 원을 더 절약할 수 있습니다.
일찍 도착해서 쉬나 중간에 공항에서 쉬나 마찬가지 아니에요?
그렇게 절약하면
가난한 아이들 몇 명을 더 도와줄 수 있는데 그걸 왜 안 합니까.
숙소를 잡는 것도 그렇습니다.
100달러짜리 숙소나 10달러짜리 숙소나
그날 저녁에는 좀 차이가 느껴지겠지만
나중에 돌아보면 별 차이가 없습니다.
일 년쯤 지나서 돌아보면
그때 얼마나 좋은 숙소에 묵었는지가 중요할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식사도 오늘 저녁에 불고기를 먹을지 라면을 먹을지가
지금은 차이가 있지만
1년 뒤에 돌아보면 오늘 무얼 먹었는지 기억하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경험을 몇 번 해보면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잖아요.
제가 생활을 검소하게 해서 조금만 절약하면
더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고
그들의 삶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삶을 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서 이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들을 돕는 것이 저 스스로 더 좋기 때문입니다.
이런 관점이 없으면 자꾸 자기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어떤 종교인들은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고 말하기도 하고
나무 밑에서 주무신 부처님을 예로 들며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 사람들이 좋은 집에 살거나 재물을 많이 가진 것이 알려지면
사람들은 그들을 비난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분들을 불쌍하게 봅니다.
자기모순에 빠져있으니 스스로 얼마나 괴롭겠어요?
또 다른 사람들에게 숨길 것이 있으니 늘 눈치 보며 살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비싸고 좋은 옷 사 입는 걸 좋아하시죠?
그런데 그런 옷을 입고 있으면
다리가 아플 때 거리에서 아무 곳에 앉을 수 있나요?
옷이 상할까 봐 그렇게 못합니다.
그래서 옷은 적당한 걸 입는 게 좋습니다.
대중교통을 타거나 적당한 차를 타고 다니면
배고플 때 어디든 들려서 뭔가 사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주 고급 차를 타고 다니면
배고플 때 아무 곳에 주차하고
길거리 음식을 사 먹기가 어렵습니다.
품위를 지켜야 하니 그렇게 못합니다.
이처럼 비싼 옷을 입고, 비싼 차를 타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그게 오히려 자기 삶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속박받고 살아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고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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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이 어느 정도 정리되어야
봉사하면서도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할 가능성이 큽니다.
질문자는 아버지가 가슴 아파한다고 하면서 울먹거렸는데,
그런 정도로는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평생 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냥 돌아가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린 겁니다.
남을 돕고 사시겠다면
적어도 ‘그런 삶이 내게 좋으므로 그렇게 산다’ 하는 관점을
분명히 가지셔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바라나시’라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바라나시에서 제일 큰 부잣집에 야사라는 외아들이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재벌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집의 외아들인 야사는 부처님을 뵙고 출가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없어진 아들을 찾다가
결국 자기 아들이 출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걱정이 된 야사의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세상 많은 젊은이가 출가해도 너는 안 된다.
너처럼 부잣집에서 호화롭게 자란 이가
어떻게 독충과 야수들이 들끓는 들판에서 살 수 있겠니?
너의 어머니도 눈물로 호소하고 있단다. 집으로 빨리 돌아가자”
그러자 야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제 얼굴을 보십시오.
제가 집에서 쾌락을 즐길 때보다
지금이 더 편안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제야 야사의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을 보며
전보다 훨씬 맑고 밝아졌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야사는 이어서 이렇게 말했어요.
“제가 왜 이 좋은 곳을 두고
다시 그 괴로운 곳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야사의 아버지는 아들의 옷이나 잠자리, 음식 등을 걱정했고,
야사는 행복을 얘기한 거죠.
야사의 아버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야사의 아버지는 결국 야사의 권유로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출가하지는 않았지만, 평생 재가 수행자로 살았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석가족이 살던 카필라바스투는
하나의 작은 왕국이었습니다.
석가족이 지배하던 왕국입니다.
부처님의 아버지는 그곳의 왕이었고, 부처님은 다음 왕이 될 태자였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출가하자
아버지 정반왕은 늘 근심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깨달음을 얻고
위대한 스승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또, 고향에 돌아와서 법을 설하고
많은 사람이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왕궁의 하인도 깨달음을 얻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깨달았지만
부처님의 아버지인 정반왕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의아해했습니다.
카필라바스투에서 제일 존경받는 이는 정반왕이었고
그런 왕이라면
부처님의 말씀 한마디에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깨달음을 얻었음에도
정반왕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제자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정반왕은 왜 법문을 듣고도 깨닫지 못합니까?”
그랬더니 부처님은 이렇게 웃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정반왕에게는 아들만 있지 부처는 없다”
경전에 기록된 정반왕의 모습을 보면
늘 아들을 걱정하는 이야기뿐입니다.
정반왕은 부처님이 무얼 먹었는지
무슨 옷을 입었는지
어디에서 주무시는지
이런 걱정뿐이었습니다.
이처럼 정반왕에게 부처님은
아들로만 보였을 뿐입니다.
부처님의 법문에는 한 번도 귀를 기울인 적이 없습니다.
이런 정반왕이 깨달음을 어떻게 얻을 수 있었겠어요?
부모는 아이들이 어릴 때 좋은 보호처가 됩니다.
그러나 성인이 되면 부모는
대부분 그들의 미래를 막는 큰 걸림돌이 됩니다.
추운 겨울에는 장작 10개를 넣고 불을 때는 게 사랑이라면
더운 여름에는 불을 때지 않는 게 사랑입니다.
더운 여름에 장작 10개를 땐다면
너무 더워 견디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과잉보호를 해서 자녀들을 괴롭힙니다.
자식이 어릴 때는 따뜻하게 보살펴 주어야 하고
자식이 좀 자라서 사춘기가 되면 가만히 지켜봐 주어야 합니다.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경험이 쌓이는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연애도 해보고 후회도 하면서 직접 넘어져 봐야 합니다.
그래야 성인이 될 때 자립심이 생깁니다.
이런 기회를 부모가 막으면
아이들은 스스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게 됩니다.
요즘 어떤 부모는 자식을 위해
결혼도 시켜주고, 집도 구해주고, 직장도 구해줍니다.
손주를 낳으면 그 아이까지 돌봐주죠.
평생 죽을 때까지 그렇게 키운 과보를 받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질문자의 부모님은
질문자를 어린아이처럼 보는 것 같습니다.
자식이 걱정스러우신 거죠.
평소 질문자가 집에서 하는 행동이나 직장생활 등 모든 면에서
자식을 아주 떳떳하고 어른스럽다고 느꼈다면
그렇게 반응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하지만 미덥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부모님 댁에 갔을 때 청소하고, 위로도 해드리고
여러 가지 보살펴드리는 모습을 보였더라면
‘이제 자기가 알아서 살겠구나’ 하면서 좀 안심하셨을 거예요.
그런데 질문자가 지금까지 보여드린 모습은
아직 미덥지 않기 때문에 자꾸 그런 말씀을 하시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를 탓할 필요도 없고,
그런 말에 속박될 필요도 없습니다.
‘부모님은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이렇게 받아들이고 자기 삶을 살면 됩니다.
부모님이 그렇게 말하신다고 자꾸
‘내가 불효를 하고 있나’ 이런 생각이 든다면
그건 질문자가 아직 성인이 안 되었다는 걸
반증한다고 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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