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스님/법륜스님의 하루

[법륜스님의 하루] 치킨집 운영이 불살생 계율에 어긋나는 일일까요? (2025.04.30.)

Buddhastudy 2025. 5. 6. 19:54

 

 

  • 21년 동안 치킨집을 운영해 온 사람이 자신의 직업이 살생을 금하는 계율에 어긋나는지 질문합니다 [05:31].
  • 스님은 최선, 차선, 괜찮음, 최악의 길과 같이 삶에서 선택을 하는 방법에 대한 불교적 개념을 설명합니다 [07:05].
  • 재가 불자가 지켜야 할 다섯 가지 계율을 설명하며,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규칙은 없다고 언급합니다 [08:35].
  • 살생을 유발하지 않는 방식으로 고기를 먹는 것과 살생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고기를 먹는 것을 구별합니다 [09:06].
  • 스님은 살생을 유발하는 행위를 피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지만, 재가 불자에게는 좋은 길과 괜찮은 길도 허용된다고 강조합니다 [11:42].
  • 스님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생을 하는 직업이라 하더라도 자랑스러워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14:15].
  • 질문자의 직업이 최악의 경우는 아니지만, 최선의 경우도 아니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14:37].
  • 가능하다면 직업을 바꾸라고 조언하지만, 불가능하다면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고 조언합니다 [15:58].
  • 어떤 문제가든 해결해 줄 수 있는 특별한 기도는 없으며, 질문자가 원하는 대로 기도해야 한다고 설명합니다 [17:49].
  • 불교는 욕망을 버리는 것이며, 모든 욕망을 충족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불교 가르침에 어긋난다고 설명합니다 [18:35].

 

 

저는 21년째 치킨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저는 제 일이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일이라 여겨 당당했습니다.

그런데 정토회에서 오래 활동한 도반 한 분이

제 직업이 살생하는 일이므로 그만둬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이 일이 자식들부터 시작해 대대손손 악업을 끼칠 수 있으니

지금 당장이라도 멈추는 게 좋겠다고까지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며칠간 마음이 심란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제가 이 일을 십 년 더 이어가도 되는지 스님께 여쭙고자 합니다.

이처럼 직업에 대한 걸림이 생긴 상황에서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도 궁금합니다.//

 

 

그 일을 그만두고 살아도 큰 어려움이 없다면, 그만두는 것이 좋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서가 아니라, 굳이 안 해도 된다면 계속할 필요는 없겠죠.

 

...

 

매일 남의 살을 끓는 기름에 튀기면서

그걸 잘했다고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는 없죠.

질문자도 나중에 죽으면 지옥에 가서 그렇게 된다고 생각해 봐요.

그게 자랑스러운 일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는 길에는

최선의 길, 차선의 길, 차악의 길, 최악의 길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떤 선택을 할 때는

최선의 선택, 차선의 선택, 차악의 선택, 최악의 선택이 있어요.

우리가 항상 최선의 길만 갈 수 있을까요?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최선의 길만 가려면, 부처님처럼 출가해서

밥은 남이 먹다 버린 것만 얻어먹고

옷은 남이 입다 버린 것만 주워 입고

잠은 나무 밑이나 동굴에서 자야 합니다.

그런 삶을 살면,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의 다른 생명에게도 일절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면서 항상 최선의 길만 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차선의 길도 존재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남이 먹다 버린 밥을 얻어먹는 것은

이미 버려진 음식을 먹는 것이어서

누군가의 몫을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또 내가 그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다른 누군가가 굶게 되는 것도 아니고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타인의 불행 위에

내 행복을 쌓는 삶이 아니죠.

이처럼 부처님처럼 사는 길이 있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재가 수행자의 삶을 사는 길도 있습니다.

실제로 부처님이 살아계셨을 당시에도

출가 수행자의 길만 제시하신 것이 아니라

그 길을 따르기 어려운 이들을 위해 재가 수행자의 길도 열어 두셨습니다.

 

재가 수행자로 살아갈 때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계율은 지켜야 수행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생명을 함부로 해치지 말 것

둘째,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지 말 것

셋째, 결혼은 허용되지만, 성추행이나 삿된 음행을 삼갈 것

넷째, 거짓말이나 욕설, 사기를 치지 말 것

다섯째, 술을 마시고 취하지 말 것

이 다섯 가지마저 지키지 않는다면

수행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기를 먹지 말라는 내용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산불로 인해 토끼가 타서 죽었다면

그 고기를 먹는 것은 살생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내가 그 고기를 먹는다고 해서 생명을 죽인 것도 아니고

살생을 조장한 것도 아니죠.

이처럼 살생과 무관한 경우라면

고기를 먹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고기를 먹는 것이 살생을 유발한다고 생각하면

직접 죽이지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살생을 부추기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만약 버려질 음식에 고기가 들어 있다면

그건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것을 먹는다고 해서 살생이 더 일어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나 누군가가 나를 위해 준비한 음식에

고기가 포함되어 있다면 그건 다릅니다.

그 고기는 다른 사람이 먹을 수도 있었던 것이고

내가 그 고기를 먹는 것은

살생을 더 유발할 가능성이 생기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 두 경우가 다릅니다.

하나는 살생과 무관하지만,

다른 하나는 살생을 조장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비행기에서 제공되는 기내식은 먹지 않으면 버려집니다.

이런 경우에는 내가 그 음식을 먹든 말든 살생과 무관합니다.

 

반면 식당에서 돈을 주고 고기를 사 먹는다면

고기 소비가 늘고 그만큼 살생도 증가합니다.

결국 최선의 길이란

단지 내가 직접 죽이지 않는 것만이 아닙니다.

살생을 유발할 수 있는 행위까지도 삼가는 것이

불교적 관점에서 최선의 길이에요.

 

스님들에게도 고기를 먹지 말라.’하는 계율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군가 스님을 대접하려고 일부러 고기를 잡았다면

그 고기를 먹는 것은 살생을 유발하는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스님이 고기를 먹지 않는다면

그 사람이 굳이 고기를 잡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비록 직접적인 살생은 아니더라도 간접적인 살생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나를 위해 고기를 잡았다고 여겨지는 고기는 먹지 말라.’하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중에 음식에 고기가 들어 있었다면

그것은 먹어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나를 접대하기 위해 따로 고기를 준비했다면

그것은 나로 인해 살생이 일어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고기를 정육점에서 사서 먹지만

옛날 시골에서는 손님이 오면 집에서 직접 고기를 잡았어요.

내가 고기를 먹지 않았다면 그 동물을 죽이지 않았을 텐데

내가 먹는다고 했기 때문에 살생이 벌어진 것이죠.

이런 경우의 고기는 먹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경전에 고기를 먹지 말라.’하는 계율은 없지만

누군가가 나를 위해 잡은 고기라면

그런 고기는 먹지 말라.’하는 기록은 있습니다.

이것은 최선의 길을 가는 수행자에게 해당하는 말입니다.

 

반면에 차선의 길을 가는 재가 수행자에게는

직접 살생만 하지 않으면 된다고 되어 있어요.

식당에서 고기를 사 먹는 행위까지 하지 말라는 말은 없습니다.

이건 차선의 길에 해당합니다.

 

차선의 길도 못 간다면 차악의 길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부나 도살꾼처럼 살생을 피할 수 없는 직업을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가능하면 그런 일을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에스키모나 몽골 유목민처럼

그것이 유일한 생계 수단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기른 양을 잡아먹고 살아갑니다.

그 지역에는 채소도 없고, 고기 외에는 먹을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에게

불교를 믿지 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먹는 음식 때문에 불교가 그들을 배제한다면

그것은 마치 기독교에서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하느님을 믿지 말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성소수자도 하느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하듯이

환경이 다른 조건에 놓인 사람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양을 잡지 않고 살 수 있다면 더 좋겠죠.

요즘은 양을 팔아서 다른 음식을 살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과거에는 시장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여름에는 양에게 풀을 먹여서 젖을 짜고

그 젖으로 만든 치즈나 버터로 먹고살았어요.

겨울이 되면 양을 잡아 고기를 먹었고

일부는 바짝 말려서 여름까지 먹으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당시 그 지역의 생활방식이었습니다.

이러한 삶의 조건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수행은 항상 현실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최선의 길을 갈 수 없다면 차선의 길을 가야 하고

차선의 길도 가기 어렵다면 차악의 길이라도 가야 합니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최악의 길은 피해야 합니다.

 

질문자의 직업이 도살업이라면 가능하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생계를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바닷가에서 자란 어부에게 물고기를 잡지 말라.’하고 말하는 것은

불교를 믿지 말라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어부라는 직업을 버려야만

불교를 믿을 수 있다는 식의 이분법은 모순이에요.

어부도 불교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생계를 위한 직업 선택에는 현실적인 고려가 필요합니다.

이상적이지는 않더라도

차선이나 차악의 길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거예요.

다만 이러한 현실적인 이유로 허용되는 경우라 하더라도

그 행위를 당연하게 여기거나 자랑스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쩔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선택한 길일뿐이지

그것이 옳거나 당연한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질문자는 치킨집을 운영하면서 살아있는 닭을 가져오나요,

아니면 이미 도축된 냉동 닭을 가져오나요?

 

그러면 질문자가 직접 닭을 죽이는 것은 아니므로

최악의 경우는 아닙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냉동 닭을 들여와 판매한다는 것은

그만큼 수요를 유지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결국 더 많은 닭이 죽임을 당하게 되겠죠.

그렇기 때문에 이 직업은 불교적 관점에서 최선의 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에

제가 처음에 그 직업을 하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물어본 거예요.

예컨대 치킨집 대신 옷 가게를 하거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갈 수도 있다면

굳이 치킨집을 고수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이 일이 수익이 더 난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고집한다면

그 직업을 바꾸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다른 기술이 없다거나

이 일을 20년간 해왔고

또 직접 칼로 닭목을 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도축된 닭을 튀겨 판매하는 상황이라면, 최악의 상황은 아니에요.

살생을 유발하는 행위에 해당하니까 차악이라고 할 수도 있고

내가 직접 죽이지는 않으니 차선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결국 그 중간쯤에 해당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보다 나은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죄를 짓는 건 아닙니다.

질문자의 직업일 뿐, 오계를 어긴 것도 아니잖아요.

물론 그 모습을 보고 누군가가

치킨집을 하면 살생을 유발하니 좋지 않습니다.’하고 의견을 낼 수는 있죠.

 

하지만 그 일로 인해

당신의 아들이 안 좋아진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직업을 바꿀 수 있다면

바꾸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다.

 

저한테 누군가

스님이라면 해진 옷을 입어야지, 옷이 멀쩡해 보인다.’라고 말한다면,

그 의견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저 역시 더 검소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해진 옷을 꿰매 입기가 쉽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떨어진 옷을 손질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일을 맡아줄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다들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니 차라리 버리라고 권하죠.

 

그러나 정토회에는 바느질 공방이 있어서

옷을 수선해 주는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그 덕분에 제가 이렇게 해진 옷을 계속 입을 수 있는 겁니다.

만약 그런 사람이 없었다면

어쩔 수 없이 저도 해진 옷을 버릴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우리는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도저히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남이 버린 옷을 주워 입고, 남이 버린 음식을 먹고살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가능하면

새 옷은 사지 않고, 음식도 검소하게 먹고, 생활도 소박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질문자의 직업을 바라보면

내가 남의 것을 훔치는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냐?’라고 자부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내가 큰 죄를 짓고 있구나.’하고 자책할 필요도 없어요.

이것이 중도적 관점입니다.

해결이 좀 되었나요?

 

기도할 때는 본인 마음대로 하세요.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질문에는

답하기가 모호합니다.

보통은 무엇을 위한 기도인지 목적들이 있을 거잖아요.

부부 갈등을 겪고 있다든지

애가 말을 안 듣는다든지, 장사가 안된다든지

요즘 심리가 불안하다든지

이런 구체적인 사정이 있다면

그것에 맞게 조언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런 맥락 없이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하고 묻는 것은 막연합니다.

상황마다 해법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는

부처님을 믿으면

모든 일이 척척 풀릴 것이라는 식의 만병통치약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문 하나만 받아서 그것만 외우면

부부 문제도, 자식 문제도, 사업 문제도

심지어 건강 문제까지

다 좋아질 것이라고 믿는 겁니다.

 

불법(佛法)이란 결국 무엇이든 움켜쥔 것을 내려놓고 버리는 데서

해탈의 길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문 하나만 달라는 요구는

하나를 움켜쥐고

거기에 얻고자 하는 모든 욕망이 반영된 요구입니다.

 

이런 요구 자체가

애초에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어긋난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런 식의 요청에 대해

이 기도문으로 하세요.’라고 답하는 것이

오히려 바른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질문자가 좋을 대로 기도를 하라고 답한 거예요.

물으라고 해서 물었는데

답변을 그런 식으로 하면 어떡하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사실 그것이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적합한 대답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할 때는

질문자가 좋을 대로, 엿장수 마음대로 하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