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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세계사] 세계사 3대 시민혁명 중 마지막! 프랑스 혁명은 왜 시작 되었을까?

Buddhastudy 2024. 10. 3. 18:52

 

 

1780년대 후반 프랑스는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7년 전쟁과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지만

딱히 이득을 보지 못하면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이를 해결하고자 외국에서 빚을 지고 돈을 빌렸지만

제대로 갚지 못하고 있었죠.

 

게다가 1780년대에는 흉년이 이어져

많은 이들이 굶어 죽는 등

대부분의 프랑스인들이 당장 먹고사는 문제에 있어서

큰 어려움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18세기 후반 들어서 독일의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말한

공론장이라는 것이 점차 발달하게 되었는데요.

주로 카페나 살롱, 또는 독서 클럽을 가리키는 이 공론장에서는

지식인들이 서로 계몽주의에 관한 서적을 돌려보며

새로운 정치 철학이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게다가 공론장에서는 철학적인 내용뿐만 아니라

현실 정치의 소식을 전하는 각종 신문도 모두가 돌려볼 수 있었죠.

따라서 지식인들은

이곳에서 자신들이 배운 것에 반하는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의식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었습니다.

 

한편, 재정적 파탄 상황에 직면하여 루이 16세와 그의 장관들은

일반 백성들 이외에도

귀족으로부터도 세금을 거두려고 시도하나

귀족들은 당연히 이를 거부했습니다.

 

루이 16세가 귀족들을 소집하여 조세제도 개혁에 대해 이야기하려 하자

이들은 조세에 관한 사항은 귀족만이 아니라

모든 신분이 참가한 삼부회에서만 논의할 수 있다고 주장했죠.

 

삼부회는

성직자, 귀족, 그리고 제3신분이라 불리는 나머지 프랑스인들로 구성된 조직이었는데요.

이렇게 3개의 신분으로 구성된 삼부회는

각 신분별로 투표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항에 대해서

성직자 신분, 귀족 신분, 그리고 제3신분이 각각 표결을 한 이후

2개의 신분 이상이 표결한 쪽이 승리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성직자와 귀족 신부는

인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이해관계를 공유하고 있었기에

귀족들은 삼부회에서 쉽게 자신들의 생각을 관철할 수 있다고 믿었죠.

 

조세개혁을 논의하고 싶거든 삼부회를 개최하라는 귀족들의 요구에

루이 16세는 1789년 초

어쩔 수 없이 1614년 이후, 무려 175년 만에 삼부회를 처음으로 소집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프랑스 혁명의 시작점 중 하나가 됩니다.

 

그러니까 아이러니하게도 프랑스 혁명은

일반 시민이 아니라

귀족들이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투쟁한 결과 시작된 것입니다.

 

어쨌든 루이 16세가 삼부회 소집을 명령하자

각 신분들은 자신들의 대표를 뽑기 위해 선거를 실시했는데요.

1201명의 대표가 선출되었는데

성직자 신분의 대표가 303, 귀족 신분의 대표가 291

그리고 제3신분의 대표가 610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인구 구성을 보면

성직자 대표 303명은 약 10만 명의 성직자를

291명의 귀족 대표는 약 40만 명의 귀족을

그리고 나머지 610명의 제3신분 대표는 무려 약 천만 명.

당시 프랑스 전 인구의 95%를 대표하고 있었습니다.

 

이후에 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팜플릿을 출판한 시에예스가

3신분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이다.

지금까지의 정치 체제에서 그들은 무엇이었는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무엇이 되기를 바라는가?

정치 체제 안에서 무엇이라도 되기를 바란다라고 말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요.

성직자와 귀족을 제외한 제3신분이라는 이름이 암시하는 것과는 다르게

3신분을 대표하는 이들이

결코 농민과 같은 일반 백성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3신분 대표의 대부분은

파리와 프랑스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변호사이거나

많은 부를 축적한 상인, 혹은 지주 출신이었습니다.

 

이들은 앞서 말씀드린 공론장에서

이미 당시의 정치 체제에 대한 불만을 잔뜩 경험한 이들이었기에

삼부회가 소집되었을 당시 이미 잔뜩 벼르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이후의 역사가들 중 일부가

프랑스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렇게 제3신문을 대표했던 이들의 대부분이

부르주아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소집된 삼부회는

178955일 베르사유에서 개회하는데요.

루이 16세는 조세제도를 개혁하려는 하나의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삼부회를 소집했지만

3신분은 그런 루이 16세의 뜻을 따를 생각이 없었죠.

 

그들은 삼부회가 시작되자마자

우선 표결 방식을 문제 삼기 시작합니다.

당시 삼부회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신분별로 표결이 이루어졌는데요.

이런 방식에서는 성직자와 귀족만 연합하면

3신분은 들러리 노릇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제3신분은 신분별 표결이 아니라

모든 대표들이 한 표씩 행사하는 방식을 선택하자고 주장합니다.

 

3신분의 주장은 당연히 귀족들에 의해서 거부되는데요.

5월 초에 삼부회가 소집된 이후

1달이 넘는 시간 동안 표결 방식에 대한 논쟁 때문에

정작 조세개혁은 제대로 논의되지도 못했죠.

 

그런데 귀족들이 계속해서 자신들의 주장을 거부하자

3신분의 대표들은 대담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바로 삼부회로부터 나와

스스로를 프랑스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국민의회라 칭한 것입니다.

 

이들은 국민의회의 대표로서

나머지 귀족들과 성직자 신분의 대표에게

국민의회에 참가하라는 요구를 하게 되지만

귀족과 성직자들이 참가하지 않더라도

국민의회는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죠.

 

이 소식을 들은 루이 16세는

이들이 모이기로 한 곳을 폐쇄해 버리지만

620일 이들은 베르사유 궁전 인근의 테니스 코트에 모입니다.

그리고 프랑스에 헌법이 생길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는

테니스 코트의 서약을 합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프랑스 혁명 초기에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바로 성직자 신분의 대표들이 국민의회에 참가한 것입니다.

성직자들까지 국민의회에 참가하자

루이 16세와 귀족들도 일단은 국민의회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죠.

 

이제 국민의회는

국민재헌의회로 스스로의 이름을 바꾸고

프랑스의 헌법을 도입하겠다는 목표를 더욱 분명히 했습니다.

 

베르사유에서 상황이 이렇게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을 때

수도인 파리는 어땠을까요?

파리 시민들은 기존의 체제에 대한 불만이 잔뜩 쌓여 있었기에

베르사유에서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국민재헌의회에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는 한편

왕과 귀족이 머지않아 국민재헌의회를 무력화하려고 시도할 것이란

의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이들을 자극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요.

루이 16세가 고용한 용병부대가

파리시로 진군하려 한다는 소문이 돈 것입니다.

이는 루이 16세가 국민재헌의회를 무력으로 진압하려 한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소문을 접한 파리 시민들은 분노할 수밖에 없었죠.

 

분노한 시민들은 714

파리시 안에 위치한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하는데요.

이는 바스티유 감옥이

그동안 왕권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을 공격하여

그곳에 수감 중이었던 죄수들을 풀어주고

그곳에 저장되어 있던 무기를 탈취했죠.

 

이후로 714일은 프랑스 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날짜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프랑스는 714일을 국경일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파리 시민들이

바스티유를 공격했을 당시

바스티유는 왕에게 있어서 크게 중요한 건물은 아니었습니다.

 

왕권의 상징으로 여겨지긴 했지만

당시 감옥 안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은

잡범 7명에 지나지 않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바스티유 습격 사건이

프랑스인들의 집단적 정체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으로 기억되는 것은

역사에 있어서

상징과 집단 기억이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파리 시민들이 무력으로 집단행동을 하자

많은 프랑스 귀족들은 불안감에 휩싸였는데요.

이에 많은 귀족들이 프랑스를 떠나 망명을 가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이후 프랑스 혁명의 진행 과정에서

외국에서 외국군을 지원하면서

반혁명의 중요한 세력으로서 영향을 끼치게 되죠.

 

그러나 당장은 귀족들과 루이 16세가 위축될수록

시민들과 국민재헌의회로 힘이 옮겨갔습니다.

시민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국민재헌의회는

이를 바탕으로 8월에

일련의 중요한 내용들을 발표합니다.

 

국민제헌의회의 대표들은

구체제를 상징하는 봉건제를 폐지한다고 발표했는데요.

이들은 농노제와 더불어 귀족들이 중세 이래로 유지하던 각종 특권들을 폐지하고

교회가 거두던 11조까지 폐지하죠.

 

더 나아가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이들이 공직에 진출할 수 있다는 것도 명시합니다.

또한 신분에 상관없이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것과

모두가 조세의 부담을 동등하게 져야 한다는 것도 발표합니다.

 

봉건제로 표현되는 구체제의 잔재들을 모두 폐지한다고 선언한 후

국민제헌의회는 826일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합니다.

 

당시 프랑스 계몽주의와 미국 독립선언문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은 이 선언문에서

프랑스 대표들은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태어났으며

왕권신수설에 대항해서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원칙도 분명히 했습니다.

 

또한 개인의 자유는

오직 타인에게 해를 끼칠 경우에만

법률로서 제약할 수 있다는 원칙도 밝히고 있었습니다.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826일 프랑스 국민제헌의회가 발표한 내용은 헌법은 아니었습니다.

권리 선언을 발표하기 직전에 선언한

봉건제의 완전한 폐지 역시

당장 전국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죠.

 

그러니까 17898월에 국민제헌의회가 발표한 내용들은

당장 시행할 수 있는 법률들이었다기보다는

일종의 목표이자 지향점이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설명드린 내용이

같은 해 5월 소집된 삼부회로부터 시작해서

불과 3달 남짓의 기간 동안 일어났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얼마나 빠른 시간 내에

프랑 인들이 그동안 경험한 세계가

완전히 급변하고 있었는지를 상상해 보실 수 있을 텐데요.

 

그러나 보다 장기적인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프랑스 혁명은 이제 막 시작한 것이었고

목표로 선언한 것을 달성하기 위해서

3신분의 대표들 앞에는

멀고도 험난한 여정이 남아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