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근_육조단경

[육조단경12]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 내 세계는 내 눈에 따라 달라진다

Buddhastudy 2024. 6. 13. 18:34

 

 

/마음공부의 목표는

본질을 깨닫고 본질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본질이 어디 있는지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야

본질을 깨달을 수 있다./

 

본질이 어디 있는가?’ 이 말은

물고기가 물속에서 물이 어디 있는가?’ 하고 묻는 거와 같다.

이제 소화됩니까?

. 물고기가 물속에서 물이 어디 있는가?’ 하는 말과 같다.

이미 우리들은 자기의식 속에 있죠.

 

그리고 본질이 무엇인지 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이렇게 지금 읽는

이것이 가면 갈수록 분명해져요.

이것이 처음에는 약간 어슴푸레한데

가면 갈수록 이것이 분명해서

항상 이 속이니까

이거를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어.

항상 이 속이니까.

 

/그래서 본질이 무엇인지 알아야 본질을 깨달을 수 있다.

본질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작용하는 나 자신이다./

 

그러니까 이것도 참 중요한 거예요.

본질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작용하는 나 자신이다.’

 

이렇게 지금 보고 듣고 할 때

의식이 보고 의식이 듣는 거예요.

이게 참 이런 말을 한 번 딱 계합을 해야 돼요.

딱 하나가 일치가 돼야 돼요.

지금 보고 듣는 것이

사실은 의식이 보고, 의식이 듣는 거예요.

지금 의식 속에 있잖아요.

 

근데 이 의식이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있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여기 지금 작용하는 나 자신이다.

 

/본질을 추구하는 시선이 밖이 아니라

자기에게로 반조해야만 본질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니까 추구하는 시선이 밖을 향한다. 이 말은

현상계 속에서 찾는다는 말이에요.

본질을 현상계 속에서 찾을 수는 없어요.

그래서 이건가? 저건가? 해서는 안 돼.

그렇게 해서는 영원히 못 깨달아요.

통으로 이 현상 자체가 하나의 이 본질에 나타난 이미지의 세계

이미지 세계 안에서 실물을 찾을 수는 없다, 이거예요.

 

/본질을 추구하는 시선이 밖이 아니라

자기에게로 반조해야만 본질을 깨달을 수 있다.

참선에서는 이 방향성이 중요하다.

그래서 회광반조라는 가르침이 있는 것이다.

빛을 돌려서 거꾸로 비춘다./

 

이때 빛은 당연히 의식이죠.

그러니까 의식이 다 파악, 보고 있는 거예요.

돌려서 의식이 의식을 본다.

의식이 의식을 자각한다.

의식이 의식을 볼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자각할 수는 있어요.

지금 이렇게 보고 있는 이거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육체와 정신, 육체를 통해서 작용하는 것이 정신이다.

그럼, 이 순간에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이것은

정신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정신을 자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신은 어디 있는가?’ 할 때

눈 뒤에 있지, 눈 밖에 어디 대상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이다.

이 말입니다.

 

/석존도 깨닫고 나서

일체중생이 여래의 지혜와 덕상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우리 모두 본질

즉 불성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다는 깨달은 분들의 거룩한 불성 선언이다.

석존이나 육조의 확언 덕분에

이것이다하는 확언 덕분에

우리는 방황하지 않고 본질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그러니까 항상 하나의 구호를 말한다면

지금. 여기. 의식

구호로서 말한다면

지금. 여기. 의식

이것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렇게 확언 덕분에 우리는

방황하지 않고 본질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나의 본질

즉 자성은 원래부터 완벽하다./

 

모양이 없으니까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으니까 완벽합니다.

모양이 없어요.

 

/불성이란 만들어 가는 어떤 것이 아니라

본래 완전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달으면 된다.

그렇다면 질문은 간단명료하게 집중된다.

나의 본질이 무엇인가?/

 

나의 본질은 신기하게도

앞 시간에 여러분 정신이 있어요? 없어요?” 할 때

정신이 있습니다할 때

그 정신이 희한하게도

복습할 수 있는 게

실제로 1시간이 지났죠, 아까

첫 시간에 ‘1시간 지나면 첫 시간이 어떻게 될까요? 한번 봅시다그랬잖아요.

여러분 첫 시간은 어때요?

완전히 사라졌죠.

기억에만 남아 있고 완전히 사라졌어요.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깨어 있는 이 각의 깨어 있는 바다

각의 바다 자체

이것 자체는 지금 변함이 없다 이거예요.

 

여기에 인연 따라 온갖 것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있지만

요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대로서의 그 자체는

지금 변함이 없다.

 

나의 본질이 무엇인가?

현상이 아니고 본질은 무대다. 이 필드 자체다.

 

/육조대사는 이어서 그 본질이 무엇인지 드러낸다./

이어서 참 좋은 말을 또 하세요.

 

첫 번째는 보리자성이 본래청정하다 했잖아요.

/이어서 우리는 다만 이 의식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은

다만 이 의식이 작용하는 것입니다.

의식을 쓴다이 말이나

다른 말로 우리의 모든 것은 의식의 작용이다

같은 말이죠.

 

우리의 모든 것은 의식의 작용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가다가 일부러 이래요.

제가 가끔 의식을 확인하기 위해서

의식이 뭐지?” 해봐요.

그러면 의식이 뭐지?” 하는 순간

의식이 뭐지하는 이거야.

다 따라오십니까?

이 순간 작용하는 거다 이거예요.

이 순간, 작용하는 거.

 

내가 보고, 듣고 하는

내가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이 나를 통해서 작용하고 있다.

그러면 살아가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는 [의식이 살아가고 있다]

 

만약에 이 이야기를, 이 말을

우리가 깊이깊이 따져본다면

이 순간에도 의식은 나를 통해서 작용하고 있죠.

그러면 나는 여기다가 맡길 수 있어요.

이것을 정말로 내가 실감하거나 믿는다면, 정말로 믿는다면

자성에 맡겨서 살 수 있어요.

매 순간순간을.

 

맡기고 쉰다.

그러므로 자성에 맡기고 쉰다

이게 가능해진다, 이거예요.

이게 수행이에요.

 

이런 말씀을 왜 하느냐 하면

본질을 깨닫고, 본질이 되어서 살아가는 것이잖아요.

근데 본질이 되어서 살기가 벅차요, 일반인들은.

본질이 되어서 살기가 참 벅차.

 

그래서 그 과도기적으로 수행의 입장에서는

그러므로 본질에 맡기고 나는 쉰다.

쉬는데 알아서 본질이 잘 한다.

 

조금 전에 제가 가끔 가다가 저는 제 의식을 확인하기 위해서

의식이 뭐지?” 일부러 해본다 이거예요.

그러면 의식이 뭐지?” 하는 순간

의식이 뭐지 하는 이거다 이거예요.

가만히 있으면 자각이 조금 흐려질 수 있으니까

심심하니까 한번 의식이 뭐지?” 해본다 이거예요.

그러면 의식이 뭐지?’ 하는 이것이 의식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여기서 대상이 아니다. 주체다.

항상 본질은 주체다.

그래서 주체가 뭐지?” 하는 놈이 주체다 이거예요.

그럼 확인이 돼요.

 

그러면 이제 이렇게 되는 거죠.

나무아미타불 하면서 나무아미타불하는 게 아미타불이거든

나무는 귀의한다는 말이잖아요.

아미타불에 귀합니다하면서

방향은 귀합니다하는 이것이 아미타불이니까

저쪽으로 안 하고

귀의합니다한다는 거죠.

이렇게 되면 자꾸자꾸 계합이 일어난다, 하나가 된다.

나무아미타불을 밖으로 안 하고

나무아미타불 하면서 안쪽으로 돌이킨다, 이거예요.

회광반조

그러면 하나가 된다.

확인하고 확인하고 확인하고 계속 확인해 가는 것.

 

이 작업이 애석하게도 하루아침에 깨닫는다고

바로 되지는 않아요.

우리들의 분별의 습관은 너무나 커서

그 습관을 이겨 나가기에는

계속 이런 식으로 돌이키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다만 이 의식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육조의 이 말씀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마음공부의 방향이 달라진다.

육조단경을 공부할 때는 첫 시간에 결단을 내리는 것이 필요하다.

누구나 일거수일투족이

다만 이 불성을 쓰고 살아가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 불성이 본질이고 부처라면

우리 누구나 이미 본래부터 부처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육조대사의 선언이다./

 

그러니까 누구나 사실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데

이걸 모르고 있다.

이것이 육조 대사의 선언이에요.

 

이때 완성되어 있다는 것이

현상이 완성되어 있다는 거예요? 본질이 완성되어 있다는 거예요?

이거를 혼동하면 안 돼.

 

현상이 완성되어 있다는 말이 아니에요.

현상은 항상 상대적인 과정에 있는 거예요.

근데 어떤 상대적인 과정에 있더라도 본질은 완성되어 있다.

 

그래서 완성되어 있다, 이 말을

본질이 완성되어 있는 거지,

현상도 완성되어 있다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이 말은 무슨 말이에요?

건강하거나 아프거나 관계없이

항상 이 본질은 깨어서

그 모든 것이 일어나는 바탕으로서 존재한다.

그 말이죠.

그러니까 이 말을 혼동하지 말자하고 말씀드립니다.

 

/막상 확인하고 보면

자성은 24시간 깨워서 작용하고 있다./

 

지금도 있어요.

정신 나간 사람.

있죠? 항상 있어요.

그리고 꿈을 꿔도 꿈을 꾸잖아요.

잠이 폭 들어도 잠이 푹 들어서 할 건 다 하고 있잖아요.

 

가끔가다가 저는 중요한

이런 말을 해서 좀 죄송하지만

한 번씩 정말 중요한 손흥민 선수의 축구 시합이 있을 때

몇 시에 한다 생각하고 자고 있으면

그 시간 되면 깨더라고.

그러니까 희한해.

난 분명히 잤는데 그 시간 되면 깨 .

누가 깨우죠?

하여튼 깬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희한해.

어쨌든 작용하고 있다. 항상 작용하고 있다.

 

/자성의 특징은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살아서 작용한다는 것이다./

 

여러분 재밌게도 언제 나도 나로 끝나고요.

어디서 나도 나로 끝나고,

누구에게 나에게도 나로 끝나.

언제나의 나가 자성이에요.

누구나의 나가 자승이에요.

어디서 나의 나가 자성이에요.

 

/공평하게 살아서 작용한다.

움직이나 고요하나 한결같이 작용하고 동정일여

우리들의 의식은 움직이나 고요하나 한결같이 작용한다./

 

아까 연장선상에서

완벽하다, 완전하다는 말은 본질로서 완전하다는 거지

현상이 완전하다는 것은 아니다. 이거예요.

 

여러분 완전한 현상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이 세상에?

있다 하더라도 찰나 간이겠지, 살짝.

 

그러니까 현상에서는 완전함을 바라는 건 어리석어요.

근데 놀랍게도 본질은 항상 완전이다.

그러면 동정일여, 몽중일려 오매일려 이런 말이 변함이 없다는 말인데

변함이 없다는 것이

현상에서 그런 거냐? 본질에서 그런 거냐?

본질에서 그런 거다, 이거예요.

본질은 완벽하지만, 현상은 완벽하지 않아요.

다 달라

그러면 그 다른 거대로 비춰서 세계가 나타나요.

 

그러니까 돼지 눈에는 돼지 세계로 보인다.

또 부처 눈에는 부처 세계로 보인다.

따라서 본질은 돼지든 부처든 본질은 같지만

그것이 살아가는 그 세계는 달라요.

해석이 다르다 이거예요.

세계는 같더라도 달리 보인다 이거예요.

 

그래서 그런 비유 쓰잖아요.

같은 물이 물고기한테는 공간으로 느껴지고, 물이.

인간한테는 호수, 연못으로 그게 느껴지고

하늘을 나는 새한테는 그것이 반짝반짝 빛나는

그러니까 이걸 천상이라고 불렀어요, 비유에서는.

천상의 신들한테는

그 물이 호수에 태양을 반사하고 있기 때문에

호수가 물고기한테는 집이고

인간한테는 호수인데

천신한테는 액체 보석처럼 보인다는 거예요.

태양을 반사시켜서 .

 

그리고 아귀한테는

아귀는 욕심이 많아서 목구멍은 바늘구멍만 한데

막 게걸스럽게 먹으려고 하는 항상 배고픈 아기라 그러잖아요.

아귀한테는 호수가 고름 물로 보인대요. 고름 호수로 보인대.

 

인간한테는 호수로 보이고

물고기한테는 집으로 보이고

천신한테는 반짝이는 수정, 그러니까 액체 수정으로 보이고

같은 것이

 

그러니까 이 피지컬 이모션을

멘탈바디에 따라서

돼지 눈에는 돼지세계로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세계로 보이기 때문에

비록 본질은 같더라도

내가 어떤 세계를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은

나한테 달린 거예요.

이건 내 책임인 거예요.

내 눈이라는 거야. 내 눈.

내가 어떤 눈을 가지고 보느냐에 따라서

이 세계가 다르게 펼쳐져요.

 

그러니까 기왕 살아가는 것, 행복한 세계에서 살아가고 싶잖아요.

같은 세계인데 어떤 사람한테는

그러니까 자살 일보 직전의 사람한테는 암울한 세계고

그러나 어떤 큰 노력했던 것이 이루어진 사람한테는

이게 아주 희망찬 세계잖아요.

같은 세계가.

 

그것처럼 이 세계가 어떻게 보이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이에요.

 

우리 공부가 본질은 모든 사람한테 완벽하게 갖춰져 있지만

그 본질에 나타나는 세계를 어떤 식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은

여전히 개인의 책임이다.

 

그러니까 그 책임을

내가 좋은 세계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나의 눈에 달렸다.

그래서 이 공부가 또 중요한 거예요.

 

그래서 이 세 가지 몸의 오염의 정화

오염된 상태는 돼지 눈인데

그 오염이 정화되면 부처 눈이에요.

오염의 정화도 중요하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무시하면 안 된다.

본질만 무조건 강조해서는 그 사람이 아무리 본질을 깨달아도

그 사람이 사는 세계 자체가 변하는 거는 아니다.

 

세계가 변하려면

나의 이 세 가지 몸에 오염된 것이 정화되어야

내가 돼지 눈에서 부처 눈으로 바뀌어야

이 세계가 이렇게 바뀌어진다.

 

이건 너무 당연한 거예요.

현상은 내 책임이에요.

본질은 완벽하지만.

 

따라서 우리는 또 열심히 노력도 해야 돼요.

본질이 완벽하다고 놀면 안 된다 이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