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라선공부

[릴라선공부] 십우도의 핵심

Buddhastudy 2024. 6. 17. 20:03

 

 

십우도 아시죠?

십우도.

십우도의 핵심은 뭐라고요?

소를 찾는 거?

 

십우도의 핵심은 뭐냐 하면

일원상이에요.

일원상.

 

 

처음에 시무

일원상 안에서 어느 동자가 소를 찾는다.

 

그다음에 소를 본다.

견우

일원상 안에 그림이 있어요.

 

그다음에 득우

고삐를 잡는다.

일원상 안에 동자가 소의 고삐를 잡아요.

 

그다음에 어떻게 돼?

목우

일원상 안에서 동자가 소를 키워요.

 

그다음에 기우귀가 소 등에 올라탔어요.

동자가 피리를 부르면서

기우귀가 집으로 가요.

일원상 안에

 

그다음에 뭐야?

망우존인

소는 사라지고 사람만 있어요.

일원상 안에.

 

그다음에 뭐?

사람도 사라지고 소도 사라지고

일원상만 있어요.

 

중요한 게 뭐예요?

일원상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는 그 마음이

그것뿐임을 깨닫는 게.

중요한 게 그거죠.

핵심은

일원상

 

그거는 소를 보기 전에도 있었습니다.

일원

일원상 안에 펼쳐지잖아요.

마음 하나 안에

마음 하나 안에 다 펼쳐지잖아요.

그게 다 꿈이라

그 안에 그려진 게.

 

그게 소위 말해서 체험이라는 건

소를 봤다,. ‘소를 고삐를 잡았다.’ 이게 체험이라는 거고

 

그다음에 확실해진다는 게 뭐예요?

소도 사라지고 나도 사라지는 게 확실해진다는 거지.

소를 키우는 게 확실해지는 게 아니고

소가 남는 게 확실해지는 게 아니에요.

소는 법을 상징하거든요.

 

거기의 의도는 뭐냐 하면, 불교는 뭐냐 하면

법을 찾는 게 불교가 아니에요.

소도 공하고 사람도 공해서

그것이 이 한마음 바탕 위에 일어난 꿈이구나라는 걸 깨닫는 게

불교의 핵심이라는 거.

 

근데 우리는 뭐

소를 집착하잖아.

그럼 소가 있을 때까지는 항상 사람이 있습니다.

소를 상대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지 않나요?

 

소가 먼저 사라져요.

대상이 먼저 사라져

법이라는 게 사라져야지 그다음에 사람이 사라지게..

그 깨달음의

그게 뭐냐면 꿈에서 깨어나는 과정이거든요.

 

그게 주객관이 무너지는 과정

주객관이 무너져야지 그게 확연해져요.

일원상이.

 

일원상만 남는 거.

인우구망이 일원상만 남는 게 그게 확실하게 밝혀져야 돼요.

그게 밝혀지고 나서도

여전히 하늘은 파랗고 땅은 검습니다.

발아래에 있어요.

꿈이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근데 이 모든 것이 여기에서 펼쳐진

이 일원상 안에 펼쳐진 꿈이라고 하는 것을 보게 되는 게

바로 입전수수 그 이전에 반본한원

반본한원

그게 꿈이야.

그 이전에는 다 있었어.

사람도 있었고 소도 있었어. 실체가 있었어요.

 

근데 그 인우구망이 되고 나서

, 이게 진짜구나라고 하더라도

이 현상계가 사라지지 않는다고.

 

근데 그때는 뭐냐?

이게 바로 환과 같은 일이구나라는 게 드러나는 게 바로

반본 환원이라는

이전에는 자연도 있었고, 소도 있었고, 사람도 있었고, 고삐도 있었고 다 있었어요.

 

이게 뭐냐?

이 마음 바탕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일이구나라는 것이 실상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왜 입전수수를 하느냐?

 

너만 알지 말라 이거야.

진정한 깨달음을 얻었다면 당연히 자비심이 생긴다.

이 실상을 깨닫지 못해서 사로잡힌 고통을

거기서 벗어나게 하려는 그 자비심이 그건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공부가 된 사람이라면

착각에서 있지도 않은 일에 괴로워하는 사람을 그냥 놔두지 않는다.

 

그러니까 입전수수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부가적인 거예요.

사실은 그건 당연히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자기 공부가 됐다면

안타까우니까.

 

근데 그 이전에

이것뿐이구나

 

그러면 반본환원은 저절로 됩니다.

?

우리가 여전히 깨달았다고 해서 죽지는 않잖아요.

눈앞의 현상은 드러나거든요.

 

근데 이게 그야말로 꿈과 같은 일이라는 게

저절로 체득이 되는 거예요.

중요한 건 일원상

이것뿐이구나.

내가 깨닫기 전에 이미 있었던 이것뿐이구나.”

 

깨닫고 나서 달라지는 공부가 아니란 말이에요.

어떻게 진정한 공부는 본각

본래 깨어 있었다.

 

본각이 시각이 되는 게 그게 진정한 깨달음이지.

지금 내가 깨어났어. 깨달았어. 이게 공부야라고 하는 건

아직 공부가 부족한 거다.

 

본래 깨어 있었구나.

한 발도 내가 움직인 적이 없었구나.

진정으로 내가 봐야 될 것은

본래 깨어 있는 이 마음이거든

 

지금 깨어 있잖아요.

잘 보이고, 잘 들리고

이것뿐이구나라는 거. 분명히

다른 거는 볼 것도 없고, 받아들일 것도 없고

 

그게 바로 장엄정토에요.

장엄정토는 뭐냐?

거기서 말하는 인우구망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없어, 한 점도

한 점도 이 가리는 게 없어.

그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그건 되는 거예요.

자연스럽게 자기 내면에서 변화되는 그림일 뿐입니다.

 

근데 어떤 자연이 드러나든,

어떤 깨달은 사람이 저잣거리에 나가서 누구를 가르치든

똑같은 거예요.

, 이 안에서 펼쳐지고 있는 환상과 같은 일이구나

 

그럼 뭐야?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다 내 생각에 속았다라는 그 말밖에 안 나와요.

뭘 깨달았다라기보다

 

본래 깨어 있었는데

두 번을 어떻게 깨닫습니까?

내가 다 내 생각에 속았구나.

내 분별에 뭐가 있는 줄 착각해서 추구를 했었구나.

 

물론 그렇게 해야지 벗어나죠.

그냥 그런 여정을 가지 않는 한은

그 실체가 없다라는 깨달음이 없겠죠.

 

근데 결국 뭐냐?

본래 깨어 있었고

본래 깨달아 있다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진정한 우리의 도착점이다, 이거예요.

 

그러고 보면

한 발도 내가 여기서 뗀 적이 없었구나

이것뿐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실체가 없는 것이다.

그게 바로 장엄정토인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