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수행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1) 나는 왜 명상을 선택하였는가?
저는 앞서도 말했지만
어느 한 종교만이 옳다거나
어느 한 수행법만이 무조건
모든 사람에게 다 최고라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중에서도 저의 수행 방법으로
기독교도 아니고, 불교도 아닌
명상 수행법을 선택하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저는 앞으로 이 책에서
그러한 저의 생각을 솔직히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교회나 절에 가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는 거의 매주 교회나 사찰에 기쁘게 나가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가는 곳이 어디든
도처에서 하나님, 부처님의 은총과 자비를 깊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수, 석가가
기독교나 불교란 거대 종교를 만들고
성경이나 불경을 쓴 것으로 착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행동하시고 실천하시기도 바빠서
가만히 앉아 책을 쓸 시간을 내실 여유도 없었습니다.
그것을 그분들보다 훨씬 후세대에
그분들에 비해 훨씬 못한 영적 수준의 사람들이
제 생각과 자기 기억에 의해 만든 것이
바로 성경이고, 불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과 불경에는 웃지 못할 넌센스도 많습니다.
조그만 지구 하나만을 위해
이 무한한 우주를 창조했다는
매우 비효율적인 우주관이 그렇고
죽은 자가 유한한 이 지구에 다시 이 몸을 가지고 부활한다는
시대착오적인 부활설이 그렇고
인간이 지옥에 가는 것도 제 자유라는 <자유의지론>이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면 아이들에게도 자유라는 게 있고
어른들에게도 자유라는 게 있지만
그 자유의 질적인 수준이 다릅니다.
아이들은 무조건
제게 해로운 것도 덤벼드는 무지한 자유지만
어른들은
현명한 지혜로 선택하는 자유를 누림으로
자유 의지를 다 같이 가졌다 해도 똑같은 자유 의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지옥에 갈 인간들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서
더 선지향적이고, 지혜로운 자유 의지의 본성을 가진
더 높은 자질과 지혜를 가진 고등 인간을 창조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의지론의 허점인 것이지요.
즉 자유에도 그것을 누릴 주체의 수준에 따라
누리는 자유의 내용이 달라지므로
높은 차원의 자유 의지를 가진 인류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질적인 문제가 간과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 지금까지 딱 한 번 사용하고 계속해서 개점 휴업하고 있는
비효율적인 에덴 동산론이 그렇고
전지전능하다는 하나님이
아담에게 여자가 필요한 것을 미리 예측 못해
나중에야 그의 갈빗대를 뜯어내
그의 세계를 수정 보완하시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합니다.
또 성경에는 짐승들이 인간을 위해 만들어졌다는데
그렇다면 왜 짐승들은 도살당할 때
그들은 기뻐하지 않고, 울부짖으며 슬퍼하는지도 의문입니다.
자기가 만들어진 목적이 달성되는
최고의 기쁜 시점인데도 말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깜빡하셔서
이 점에까지 미처 신경을 못 쓰신 것일까요?
게다가 천국에 갈 사람과 지옥에 갈 사람
그렇게 딱 이분법적으로 모든 사람들을 나눌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저는 매우 회의적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점수로 나뉠 수 있는 존재들인가요?
또 설사 그렇다 쳐도 그렇다면 커트라인은 몇 점인가요?
60점이라면
59점짜리 인간은 너무 억울할 것이고,
61점짜리 인간은 또 그 이후엔 완전히 선하게 될까요?
그들이 모자란 점들은
천국에 가면 되풀이되지 않고 바로 완벽하게 시정될까요?
그렇다면 지금 바로 그렇게 할 일이지
왜 심판, 그때 이후나 그렇게 해서
보다 더 적은 사람들만 구원받게 할까요?
도대체가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일이 한둘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여기서는
기존 종교의 그런 논리적 모순점들을 일일이 논박하자는 것이 아니므로
더 이상의 구체적인 얘기는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의식 수준이 낮은
몇천 년 전에 인간들 사이에 흘러다니던
설화나 신화, 혹은 상식들을 가져다
그 시대의 사람들인 성경이나 불경의 저작자들이
무심결에 인용하다 보니
지금과 같은 모순들은 가져오고 만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위와 같은 부실한 신학적인 논리들은
이제 현대인들에게 믿음의 강요를 넘어
믿음을 구걸하는 신세로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의 상식이나 이성적인 수준이
이미 그런 가르침의 수준들을 넘어서 있기 때문입니다.
보통 수준의 현대인들이
이미 천년 전, 최고 과학자나 지성인보다
더 뛰어난 이성과 지성을 가지고 사는 것이
현실이고 사실입니다.
불교도 정도 문제일 뿐, 이런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금강경에서는
모든 것이 다 공하다 하면서
아공 뿐만 아니라 법도 공하다 합니다.
하지만 스스로 이런 금강경의 법은 법 중에 최고라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모순 아니겠습니까?
모든 것이 공하다면 그 공하다는 그 법마저도 공해야죠.
거기에 예외를 두는 것은 자가당착입니다.
또 최초엔 우리가 부처였는데
홀연히 무명이 생겨서 번뇌 중생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왜 홀연히 무명 번뇌가 생길까요?
이 점을 모르는 채 그냥 그렇다니까
무조건 닦아서 없애자고 닦기만 하면 다 해결될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닦아서 부처가 되어도
다시 또 언제, 무명 번뇌가 홀연히 생겨날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때 가서 대체 어쩔 건가요?
물론 이런 교리나 이론들 자체가
종교가 가진 진리를 판단하고 추구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스스로 부족하고, 하자가 있다는 사실이
바로 기존의 종교는
실제로는 진리 그 자체인 하나님, 부처님이 직접 만들고 지어낸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들이 만든
하나의 거대한 생각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젠 우리 인류의 사고 체계가 발전한 만큼
솔직히 이런 종교의 부족한 문제점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이제는 기존 종교들이 사람들을 인도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의 교리와 이론들을 되돌아보고
시대에 맞게 개혁하고 바꿔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다고 기존 종교가 지향하는
진리라는 고매한 목표가 손상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오히려 성경에 손을 대서
수정하고 교류를 바꾸었던 과거 니케아 종교회의라든가 하는 것을
정직하게 열던 시대가
지금보다 더 양심적이고 합리적인 이성의 시대가 아니던가 하는
생각마저 할 때가 있습니다.
사실 모든 종교는
훌륭한 성각자분들의 언행을 보고
우리 인간들이 만든 것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인공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옛날 지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이 만든 것을
지금 지혜가 발달한 사람들이 볼 때는
논리적으로 합리성이 부족한 면을 가진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러나 우리가 생각으로 만든 인공 종교가 있다면
반대로 그것 이전에 자연종교
즉 진리라는 것을
말과 글 이전에 자연적으로 보여주고
암시하는 차원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제 그것에도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할 때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한다고
제가 기존 종교나 수행인들의 훌륭한 점들을
무시한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분들은 이런 부족한 종교의 형식적인 콘텐츠를 통해서도
자신들을 잘 발전시키고 업데이트하신 분들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편파적이고 비상식적인 소프트웨어를 더 개량하면
더 나은 업데이트가 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더 많은 사람들을
기성 종교에 대해 열리게 하고
더 열린 자세로 기존 종교의 가르침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럴수록 그들의 영성은
더 효과적으로 빨리 더 크게 넓어지겠지요.
이러한 점을 자각하면서
어렸을 때는 20년을 기독교에 묻혀 살았고
청년 시절 이후엔 불교를 믿어 출가까지 했던 제가
이제는 자연종교라는 제3의 길을 선택한 것입니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제가 기존 종교들을 믿지 말자거나
그들의 좋은 점을 다 부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히 그것들의 겉모습은
이미 낡거나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상당수 성직자들은
자기만이 옳다는 독단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마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눈먼 도서관 사서 같이.
저는 기존의 종교들은 마치
어린이 교과서에 나오는
바위가 말하고 바람과 대화하며
태양이 생각하는 그런 신화의 구조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성경 불경이 최초로 만들어지던 그 시대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것이 그 시대의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최고의 방편이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지가 발달한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성직자들이
몇천 년 전, 그 신화들을 아직도 문자 그대로 고집하고 있는 데서
바로 이 모든 넌센스 퀴즈 같은 문제들이 벌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래서 기존의 종교 속에 있는 신화적 요소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방식에 따른 해석들은
오해와 편견을 막기 위해서
이제는 상당 부분 수정되어야 하며
그에 아직도 빠져 있는 신앙인들이나 수행인들은
어린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방식 같은, 의인법적 신화의 내용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뜻하는 것인지를
보다 더 열린 방식으로 고찰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더 나은 지혜로 판단된 소프트웨어에 의해
더 나은 영적 서비스를 받아
문자 이전의 진리에 대해 내적으로 깨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럴 가치가 있는 영혼들입니다.
시대는 눈부시게 발전하는데
이제 우리들은 시대에 뒤처진
우리들보다 인지가 떨어지는 사람들이 만든
질 낮은 교과서를 그만 볼 권리가 있습니다.
이제 시대는 제3의 종교혁명을 요구합니다.
기존의 종교들은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실험을 했지만
세상을 바꾸는 데 실패하였습니다.
기독교에는 신약 성서가 나와야 하며
불교에는 개량으로 더 많은 깨달은 사람들을 양산하는
새 경전과 새 수행법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나 이는 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것은 진리의 길만을 걸어가신
예수나 석가의 문제가 아니며
그분들을 자기 종교에 끌어다 쓴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이제 종교 분야에서도
과거에만 얽매인 보수 수구 세력들은
혁신 신진 세력들에게 그 독점의 자리를 내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명백히 진리의 길을 가르치신 분들의 부족함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방식으로 재해석하며
그것만이 옳다고 타인에게 주장한 사람들의 부족함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진짜 하느님이라면
기독교나 성경 안에만 갇혀 계실 분이 아니며
부처님 또한 불교 안에만 갇혀 계시는
그런 분이 아님은 자명합니다.
진리는 그것을 가리키고 표현하는
매체가 있든 없든 스스로 본래부터
그대로 잘 존재해 왔습니다.
저는 이제 그래서 그 부족한 문제를 해결하는 보완책으로
[명상]을 제창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제가 명상의 길을 선택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명상의 길에서는
경전에 ‘오직 이것만’이라는 그 어떤 제한도 두지 않으며
반대로 또 그 어떤 종교도 배척하지 않습니다.
명상에 있어서는
실로 세상이 그대로 살아있는 경전이며
삼라만상과 우주가 그대로 살아계신
하나님, 부처님의 몸통이십니다.
요즘 적지 않은 목사님, 신부님들이
깨달음에 관심을 가지시거나
명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종교에 대한 기존의 보수적이고 수구적인 자세를 버리고
열린 가슴으로 자기의 양심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또 적지 않은 스님들이
기존의 방법만으로는 안 된다고
제3의 수행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는 백봉 김기추 거사님의 ‘거사풍 수행과 깨달음
즉 출가하지 않고 세상을 직업을 가지고 살면서
공부 방법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이 수행하여 깨치는 것이라는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저의 앞으로의 살날도
이런 목표를 향하여 바쳐질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이나 불교라면 무조건 싫어하고
타 종교인들도 또한 그러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이게 바로
“내가 누군데, 무얼 믿는 사람인데” 하는
아상을 가져서 그렇습니다.
서로 한 생명이고, 서로 하나의 진리인 하나님, 부처님을 따르고 모시는
놀라운 우주 생명인 형제들인데
서로 가진 생각 하나만으로 상대를 부정하고 전쟁까지 한다는 것이
바로 비극 아닙니까?
그런데 이 비극을 누가 조장하고 있습니까?
세상의 비극은 바로 우리들이 잘못 가진 생각들로 인해서
지금도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생각이 잘 창조되면
그 결과는 아름답지만
잘못 창조될 때 그 결과는 이렇게 무서운 결과도 초래합니다.
이것을 보다 더 포용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깨우쳐주고, 서로 부드럽게 융화시켜주어야 합니다.
진실로 더 큰 것만이
더 작은 것을 품에 안을 수가 있습니다.
앞으로 이렇게 열린 시대에는
목사님이든, 스님이든, 속인이든 간에
훌륭한 말씀은 우리가 받들어 배워야 하며
그가 어떤 종교, 종파인이냐 와는 상관없이
그의 영성과 진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그를 평가하고, 그런 성각자의 가르침을 배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이는 마치
한국을 사랑하는 한국인이라면
그의 국적이 남한이든 북한이든
심지어는 재일교포, 재미교포이든 간에
그의 나라 사랑하는 그 마음을
우리가 기리고 인정해 주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단언컨대 진리는
어느 종교나 책 안에만 갇혀 있지 않습니다.
이미 온누리에 진리가 넘쳐나고
우리가 오히려 지금 살아있는 그 진리 안에 들어 있건만
우리 마음이 분별하고 한쪽만 바라다보는 것이 아닌가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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