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한테는 5가지 눈이 있다는 거예요.
일종의 요즘 말로 하면
이 눈은 사고방식이에요.
인간이 이 세계를 보는 사고방식에
크게 봐서 5가지 사고방식이 있다.
첫 번째는 육안, 육체의 눈
육체의 눈은 보여지는 사물들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에요.
그러면 아주 틀림없이
이 눈에 보이는 걸 가지고 만들어진 사고방식은
제일 먼저 지금 이 육체를 나라고 이렇게 동일시하는 거죠.
그럼 육체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남이 되는 거죠.
그러니까 나와 남이라고 하는 이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육안
사실 이게 돼지 눈이죠.
‘돼지 눈에는 돼지 세계로 보인다’ 할 때
그 돼지 눈을 육안이라고 이렇게 하죠.
근데 육안 위에 천안
천안이라는 말은 천을 보는 눈이에요.
천은 인도에서는 범천, 도솔천, 무슨 천 무슨 천 있잖아요.
그거를 보는 눈을 천안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뭐 도솔천이니 도리천이니 하는 것은
인간이 선정삼매에 들어가면
그때의 정신 상태, 그때의 어떤 경지
선정삼매의 경지에 들어가서 보는 눈을 천안이라고.
그러니까 천은 선정삼매의 상태.
여기서 한 가지
육안하고 천안은 육도윤회 안의 눈이에요.
육도윤회를 하는 세계 안의 눈.
그러면 지옥부터 인간까지가 육안이죠.
지옥부터 인간까지를 보는 눈이 육안이라면
천안은 인간 위에 천상계
천상계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을 천안이라고 한다.
그러면 육안 천안을 합치면
육도윤회 내의 세계고
이것은 부처님의 깨달음 전에
인도인들이 대개 가지고 있던 눈이에요.
그러면 부처님 깨달음은 특징이 뭐냐 하면
육도윤회로부터의 해탈이에요.
그러면 육도윤회 안에서 보는 세계를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인도인들이 지향하는 바예요.
그러면 부처님 이전에 육도윤회 안에서 최선의 방법은
육도윤회 중에서 가장 높은 경지인 천상에 가는 것이
인간계는 다섯 번째니까
여섯 번째인, 육도윤회의 가장 높은 곳은 천상이니까
천상에 가는 것이 인간의 목표였어요.
근데 부처님은 육도윤회 자체로부터 해탈했다 할 때
육도윤회가 현상계다 이거예요, 현상계.
그러니까 부처님은 현상계 안에서
제일 높은 곳을 지향하던 인간들의 사고방식에서
한 번 더 깊이 들어갔는데
그것은 본질을 봤다는 거죠.
그래서 혜안은 본질을 본 거예요.
지금 육안, 물질을 보는 눈
그다음에 천안은 선정삼매에 들어가서 천상계를 보는 눈
그리고 그보다 더 깊어지면
혜안인데, 혜안은 본질을 보는 눈이에요.
본질을 본다.
그래서 대개 선에서는 초견성을 하면
혜안이 떠진다, 이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면 그 위에 법안은 뭐냐 하면
법을 보는 눈이에요.
혜안은 본질을 보는 눈이잖아요.
근데 법을 보는 눈은
법은 뭐냐 하면
본질의 입장에서 현상을 보면 현상이 법이에요.
그래서 이 현상이 법계라고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이 사물들이 모두 법으로 보인다, 이 말은
현상의 입장에서 봤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차이점이 뭐냐 하면
현상과 본질을
현상의 입장에서 본질을 보는 거, 이게 혜안
또 본질이 되어서 현상을 보는 이거는 법안
차이점 아시겠습니까?
그래서 혜안은 돈오점수라고 하고
그리고 법안은 돈오돈수라고
돈수, 수행도 끝나는 거예요.
깨닫고 수행도 끝난다.
그러면 수행의 내용이 무엇인가?
이게 핵심인 거죠.
지금 당장 우리한테 가장 중요한 부분이 이 대목이에요.
아직까지 혜안을 못 뜬 사람은 빨리 혜안을 떠야 돼요.
혜안은 초견성,
혹은 일별이라는 말도
‘한 번 본다’ 볼 별
일별, 한 번 본다.
초견성, 처음으로 성품을 본다.
그러면 보면 본질을 한번 봤으니까
‘본질이 있구나’ 하는 걸 아는 거죠.
근데 본질이 있다는 걸 봐도
여전히 자기의 입장은 습관적으로 현상계에 있어요, 아직.
그렇겠죠?
그래서 현상에서 본질을 보는 게 혜안이에요.
그럼 수행은 뭐냐?
현상의 나에서 본질의 나로 무게 중심이 옮겨가는 거예요.
그러면 그 핵심은 뭐냐?
현상에서 살아오던 습관을 본질의 입장의 습관으로 바꾸는 거죠.
그러면 우리가 본다, 그럴 때
본다,
첫 번째는 본질을 봐야 되고
두 번째는 그 본질의 힘을 빌어서 자기 현상의 습관을 봐야 돼요.
본질을 못 보면
현상의 습관을 알아채기가 어려워요.
거의 무의식적으로 습관대로 살아요.
그러면 현상의 습관은 아주 간단한데
분별심이라고 해요. 분별심.
나다, 남이다.
딱 나누는 거, 분별심
나누면 틀림없이 좋다, 나쁘다가 생겨요.
좋은 것은 탐하고 나쁜 것은 진하는
이 탐진치의 삼독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면 혜안을 뜬 사람이 다음에 법안을 뜨는 게 수행이니까
수행의 내용은 분별심을
전체를 보는 지혜의 눈으로 바꿔야 되는 거죠.
그러면 분별심 뒤에는 뭐가 있을까요?
분별심이 쌓여서 에고가 돼요, 에고.
사실은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본질을 한번 봤다고 해서 에고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본질 본 것도 에고예요.
그러면 그 에고로 살아왔던 것이 본질로 바뀌는 것
에고로 살아왔던 것이 본질로 사는 삶으로 바뀌는 과정이
수행이라고 부르는 거예요.
화두도 그래야 그때가 진짜 화두예요.
그러면 핵심은 뭐냐 하면
지금 오안의 설명을 마치면
혜안은 현상에 살면서 본질을 보는 거
그리고 법안은 본질이 되어서 현상을 보는 것
그리고 불안은 본질과 현상이 완전히 하나가 된 것
중도라 그래요, 중도.
중도의 눈을 불안이라고 하고.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삼법인 있잖아요.
제행무상 일체개고 제법무아
그것은 법안의 입장에서 본 현상계의 모습이에요.
법의 입장에서
본질의 입장에서 본, 이 현상계의 모습이에요.
부처님이 그런 말씀하신 것은 다
법안의 입장에서 얘기를 한 거예요.
그러면 혜안에서 법안으로 넘어가는 것을
혜안은 돈오점수고, 법안은 돈오돈수인데
돈오했지만 점수한다 할 때 그 점수의 내용이 뭐냐?
내용이
에고의 가장 큰 특징은 치구심馳求心이에요.
치_ 말처럼 달린다는 거야, 말처럼 치달린다.
치, 치달려서 구하는 마음
이게 에고의 가장 큰 특징이에요.
그래서 비록 본질을 한 번 봤다 하더라도
치구심은 그대로다.
그래서 본질을 본 사람이
그 치구심은 그대로 있어서
본질을 자꾸 구한다 이거예요.
그러면 본질을 구하는 그 마음이 쉬어지는 게 수행이다.
본질을 한번 본 사람이
그 본질을 자꾸 구하려고 한다 이거예요, 습관적으로.
그래서 구하는 마음이 쉬어지는 게 진짜 수행이다.
그래서 치구심의 반댓말은
되게 선에서는 방하착_ 치구심을 보고 내려놓는다.
이게 수행이에요.
그러니까 일별 이후에, 돈오 이후에 점수할 때
점수의 내용은 방하차
다른 말로는 동의어가 休猲, 쉬고 쉰다, 쉴 휴, 쉴 헐.
그래서 쉰다, 혹은 내려놓는다
하심이라는 말도 쓰고, 하심
그러니까 조계 수행의 내용이에요.
그래서 자기를 이렇게 보면
혹시 여러분들
“내가 본질을 한번 봤는데
내 마음은 왜 이렇게 쉬어지지 않지?” 하고 느낄 거예요.
아마 틀림없이 그럴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희한하게도
한 번 봤다고 끝나는 게 아니라
구하는 습관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거예요.
그 이후의 공부의 핵심은
구하는 자기 마음을 보는 거예요.
구하고 있는 자기 마음을 본다.
그래서 여기에 가장 핵심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은
연야달다라고 하는 꽃미남이 살았는데
연야달다가 한 번 자기 본질을 봤어요.
자기 본 얼굴을 보니까 너무너무 잘생긴 거예요.
그러니까 본질이 귀하다.
지금 꽃미남이다, 이 말은 본질을 본 사람을 상징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가 꽃미남이야.
그러니까 자꾸 자기 얼굴을 보려고 해.
그래서 습관적으로 아침에 눈 뜨자마자
거울을 딱 꺼내서 자기 얼굴을 봐
이게 연야달다의 하루 일과의 시작이에요.
한 번 본질을 한번, 일별, 본 사람의 특징이
자기의 얼굴을 자꾸 보려고 해.
자기의 본질을 자꾸 확인하려고 해.
상황 이해되죠?
그래서 아침에 눈 뜨자마자 거울을...
근데 그 당시에는 옛날이니까 거울이 청동거울이었어요.
청동거울은
우리 거울 보면 거울이 앞면에만 달리지, 뒤에는 안 달렸잖아요.
그래서 아침에 딱 보면 자기 얼굴에 딱 비치니까 만족
나르시소스 신화 있죠?
그리스 신화에 나르시소스
나르시소스를 불경에서는 연야달다라고 이렇게 부르는 거예요.
자기 얼굴에 한번 반했어.
그래서 계속 자기 얼굴을 보려고 한다.
습관적으로 확인하려고 한다.
이 말 이해되세요?
그러다가 매번 볼 때마다 잘 보였는데
어떤 때는 뒷면을 들은 거예요, 거울을.
아침에 눈 뜨자마자 이렇게 했으니까
보는 순간 자기 얼굴이 없어, 안 보여.
연아달다, 이 고사가
초보자들한테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한 번 깨달은 사람이
자꾸 자기 깨달음을 확인하려고 하는.
이 말은 뭐예요?
에고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그 에고가 본질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그 습관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는 뜻이에요.
하여튼 그날따라 딱 봤는데 거울 뒷면을 들었어.
자기 얼굴이 없어.
그리고 그때 미쳤다고 나와요.
‘그 순간 미쳤다’
광증이 일어나서
“누군가가 밤새 내 얼굴을 훔쳐서 도망갔구나”
그러니까 내 얼굴을 누군가가 훔쳐갔구나.
여러분 많은 사람이 본질을 보고 난 뒤에 그 말을 해요.
“본질, 내 얼굴을 잊어버렸다. 본래면목을 잊어버렸다.
누군가가 훔쳐갔다.”
그러니까 이런 광증이 일어난다 이거예요.
하여튼 유명한 이야기니까
그래서 미쳐서 막 온 성을 막 찾아다니면서
자기 얼굴 찾아서 온 성을 막 다니면서 사람마다 붙잡고
“내 얼굴을 훔쳐 간 도둑 봤느냐?”고
“내 얼굴 봤느냐?”고 이렇게 물으니까
그 상대방은 어떤 심정이겠어요?
멀쩡히 있는데 그거 없는 줄 알고 미쳐서
자기 얼굴 찾으러 온 세상을 다니다가
만난 사람마다 붙잡고 “내 얼굴 봤느냐”고.
황당하죠.
이 정도 오면 소름 끼쳐야 되는데.
우리가 그러고 있다, 이거예요.
우리의 본질은 도망갈까요? 항상 있을까요?
항상 있죠.
근데 사람은 미치도록 이거를 찾아.
근데 놀랍게도 확인한 사람이 더 찾아요.
아예 확인을 못 했으면 차라리
확인을 못 했으면 하여튼 확인하려고 애쓰니까 미치지는 않는데
확인한 사람은 어느 순간 미쳐버린다는 거예요.
이게 진짜 많은 사람들이 겪는 실제 상황이에요.
그러니까 이 치구심, 구하는 마음
하여튼 연야달다는 그러다가 뺨 맞았지.
어느 사람 붙잡고
“내 얼굴 봤느냐?”고 하니까
“네 얼굴” 이게 지금
황벽이 임제를 때린 거나
연야달다가 내 얼굴을 봤느냐고 해서 어떤 사람한테 얻어맞는 거나
같은 거예요.
임제가 황벽한테 그렇게 물었잖아요.
“불법의 적적대의가 무엇입니까?”
불법의 적적대의는 우리의 본래 면목이거든요.
그러니까 “나의 본래 면목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은 거거든.
황백 스님 입장에서는
“임제가 ‘내 얼굴이 뭡니까?’라고 물었다.”
똑같은 물음이죠.
때려야지.
내 얼굴을 구하는 사람한테는 얼굴을 때려주는 게 최고죠.
지금 우리 공부가 지금 똑같은 구조다, 그 말이에요.
그래서 지금 핵심이
“아, 이런 말을 들으면 내가 그러고 있구나.”
그리고 이 자리에서도
요즘은 우리 선원이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다 보니까
알아차리는, 본질을 한번 본 사람이
그게 좀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요.
좀 또렷하게 본 사람도 있고
살짝 스쳐 지나가면서 본 사람,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제 본 사람이 한 명 한 명 나오기 시작하는데
그 사람들이 하는 행태를 보면
한번 본 사람이 하는 행태를 보면 미치는 거예요.
꼭 잊어먹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거예요.
여러분 안 그래요?
눈 뜨자마자 법문 찾아서 틀어서
하루종일 법문 듣고 있지 않나요?
미쳤다 이거예요.
옆사람이 보면 그 미친 거야.
근데 왜 그러는가?
불안해서.
한 번 보긴 봤는데 분명하지 않으니까 불안해서.
그러지 않으면 내가 뭔가가 잘못되는 것 같은 그 불안감이 있어요.
상황 이해되죠? 남의 일 같지 않죠?
그게 깨달아도 치구심은 여전히 남는다.
그래서 그때부터 수행은 방하차
그 치구심을 자각 해야 돼요.
중요해요, 아니 보통 중요한 게 아니야.
내가 말 달리듯이 미쳐서 본질을 구하고 있구나.
일종의 중독된 것 비슷하게
이거 안 하면 불안해서, 뭔가가.
그런 느낌 있어요?
그런 자기를 봐야 된다, 이거예요.
수행은 자기의 그 불안증세, 중독증세를 봐야 한다.
그게 치구심이다 이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보고 내려놓는 거예요.
그것을 보고 내려놓는다.
그러니까 본질을 한번 본 사람은
사실은 본질에 대한 이런 선리, 선학적인 이해도 필요해요.
본질이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서 사는 것처럼
우리가 본질 속에서 살거든요.
그럼, 본질을 확인한 사람은
내가 본질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이걸 확립해야 되는데
보통 사람은 과도기적으로 확립 못하고 까먹어버려요.
그리고 옛날 습관대로 또 구해.
본질 속에 있으면서도 본질을 찾아서 본질을 구해.
그런 사람을 가지고
물속에서 갈증 나 죽는다, 그래요.
물속에서 갈증이 나서 죽는다.
밥통 속에서 배고파 죽는다.
그런 표현을 쓴다고요.
근데 가만히 자기를 돌아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러고 있기가 십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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