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명상 강좌 제목이
이 삶 자체가 체험이라는 거예요.
체험이라고 하면 무슨 체험이냐?
진리의 체험
하나님을 체험하는 거
부처님을 체험하는 체험이
이 삶 자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삶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부처님을 찾고, 도를 이루려고 하는데
깨몽하셔야 돼.
이 삶 자체가 이미 도야.
이 삶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손길이고
진리의 현현하심이라고요.
이 삶은 누가 사는 거예요?
틀려도 좋아요.
...
그렇게 말씀은 틀린 게 아닌데
진리라고 하면 너무 어렵잖아요.
누가 사는 거예요? 이 삶은 누가 살아요?
보통 사람은 ‘내가 산다’고 생각하잖아요.
근데 여러분 잘 생각해 봐요.
여러분이 갓 태어나서 나라고 하는 생각을 하기까지는
한 4~5년의 세월이 있었어요.
즉 다시 말해서 아무 생각 없이 여러분은 4~5년을 존재했었다고요.
그러다가 어느 날 자기도 모르게 생각하는 능력에 의해서
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그럼 그 기간 동안에 누가 살은 거야?
나라는 생각도 하기 이전에 갓난아기서부터
아직 생각을 제대로 못하던, 눈만 말똥거리던 그 아기 때는
나라는 생각도 못했는데
누가 산 거냐고요.
지금이야 나라는 생각에 노예가 돼서
“내가 삽니다” 하고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답변들 하시지만
그때는 누가 사셨어?
신기하잖아요.
그리고 그때도 배고프면 울고, 엄마가 까꿍하면 웃었어요.
그때는 누구의 체험이야?
그때 그 배고픈 체험, 배부른 체험은 누구의 체험이에요?
지금은 “내 체험이요” 하고 여러분은 얘기하잖아요.
내 체험이다.
근데 잘 생각해 봐요.
그땐 나라는 게 없었어.
나라는 생각도 없었다고 생각도 못했어요.
그럼 누구 체험이야?
제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여러분이 생각의 노예가 돼서
생각 바깥으로 못 나가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거예요.
너무 답답해서.
생각 중독증이 심해서 마약 환자처럼 된 거예요.
그래서 그 생각에서만 벗어나면
바로 그냥 하나님을 만나고 도를 깨달아요.
근데 그걸 못 벗어나는 거야.
왜 못 벗어날까요?
이게 골초 담배중독환자하고 똑같아요.
자기도 모르게 손이 먼저 가잖아요.
담배중독증환자는
우리 생각중독된 여러분들은
자기도 모르게 생각이 먼저 발동해.
제가 이런 얘기를 해도
저도 여러분의 생각에 호소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 생각에 호소함으로써
생각 자신이
자기가 허망한 하나의 능력이나 작용에 불과하지
본질이 아니구나라는 거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거지
생각이 주체가 되는 건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얼마나 중병이냐 하면
“아, 그렇구나. 생각이 주체가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또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끝까지 생각해서 못 벗어나거나 안 벗어나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냥 침묵정진을 해요.
카톨릭에서도 묵언정진이 있고
불교에서도 묵언정진합니다.
근데 묵언정진 아무리 해봐야
머릿속에서 막 계속 이야기가 돌아가고, 단어들이 왔다 갔다 하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머릿속에서 속삭임이 있어
“쟤는 참 문제가 많은 애야.
저 신부님은 왜 저래? 저 스님은 왜 저래?”
우리가 그런 이야기나 속삭임에 끌려다니는 한은
그게 다 생각 아니에요?
그러니까 거기서 자유를 못 얻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잘 생각해 봐요.
여러분이 아침에 딱 깨나서
약간 바로 깨어난 그 순간부터
생각이 바로 팍 솟아나나요?
아니면 잠시 여러분은 좀 그냥 생각도 안 나고
좀 뭔가 텅 비어 있는 듯한 하나의 에너지 상태 같은
뭐 그런 거로 있나요?
생각은 바로 솟아 안 나죠?
그럼 그때 여러분은 뭐야?
그때 이미 여러분은 갓난아기 때하고 똑같이 있는 거예요.
하루 종일 여러분은 사실은
생각하기보다는 그때 그 상태로 더 많이 있어요.
지금도.
그런데 그 위에다 생각으로 포장을 딱 하고
“나는 생각이다.
나는 생각 속의 아무게다, 김마무개다, 박아무개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
이런 생각에 노예가 돼서
그 이전에 그 자리를 못 만나는 거예요.
자기가 그건데도.
미치고 환장할 일이지.
그래서 그 이전의 그 속으로 들어가 봐야
여러분은 하나님을 만나고 부처를 만나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잘 생각해 보시면
우리가 매 순간
산다는 체험이 일어나고 있어요.
이 산다는 체험은
내가 사는 나의 체험이 아니고
[생명이 사는 생명의 체험]인 거예요.
다른 말로 하면
[의식이 살고, 의식이 체험]하는 거라고요.
이게 정확한 정견의 결과예요.
그 의식 위에서 생각이
“내가 산다”
감각이
“이거는 불쾌하다, 이거는 맛있다”
이런 일들이 끝없이 일어나는 것뿐이에요.
그렇다면 이미 정답이 나왔어요.
우리가 진짜 하나님을 만나고, 부처님을 만나고, 깨닫고, 거듭나고
오늘 아침에도 제가 공교롭게 쓴 글이
‘해탈이 구원이다’라는 거를 방금 쓰고 왔어요.
그거 쓰다 보니까 11시가 넘어갈 뻔했어요.
이따가 한번 끝나고 읽어들 보세요.
해탈이 구원이에요.
왜냐하면 해탈이 나로부터 벗어나는 거거든.
근데 구원도 그렇잖아.
구원도 나로부터 벗어나는 거거든.
나라는 이 껍데기를 깨고
달걀이 껍데기를 깨야만 껍데기 바깥으로 나오잖아요.
껍데기가 자기가 깨야지 남이 깨면 어떻게 되죠?
프라이가 되죠.
달걀 프라이가 됩니다.
그렇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아무리 여러분을 깨주려고 그래도
깨드릴 수가 없어요.
도와는 드릴 수 있는데
깨는 건 자기가 깨야 돼.
안 그러면 달걀 프라이 되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마음공부를 한다거나
또는 기도를 한다거나 하는 것에
정확한 방법을 알아야 돼요.
그게 바로 [공부하지 않는 공부]라는 말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거든 우선 너부터 비우라]는 얘기예요.
지기가 떠들고 앉아 있어.
뭐 이거 해주시고, 저거 해주시고, 뭐 감사하고 뭐 어쩌고, 말은 많은데
하나님이 말하고 싶어도 네가 떠들라고 말을 못하셔.
그걸 기도라고 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삶 속에서 자기 생각을 가지고
이렇게 해야 되느니 저렇게 해야 되느니
이게 맞다느니 틀리다느니
이런 짓을 그만둬야 된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그건 헛깨비니까.
여러분의 생각이 다 헛깨비라고요.
근데 문제는
그 생각에 의해서 누가 고통을 받고 있죠?
자기 자신이 고통을 받아요.
원래 대자유하게 태어난 생명과 의식이
자기가 만든 생각에 의해서
걱정 근심하고, 미워하고, 아파하고, 원망하고 이렇게 살아요.
그 핵심적인 수단이
생각과 감정 아닙니까? 그죠?
누가 누구를 지금 못 살게 구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못 살게 굴고 있는 거죠.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처음 나가 보면 너무 답답해.
그걸 또 그대로만 읽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그러니까
“나는 예수
그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까
예수님을 따라가야 길이 되고
진리가 거기 있고
거기서 생명을 얻는다, 이 얘기 아니야?”
대부분 목사나 신부들이 이렇게 설교해.
그러니까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거예요.
이걸 거꾸로 한번 뒤집어 봐.
그럼 어떻게 되냐?
“생명이 예수고
생명의 길이고
생명이 진리인 거야”
안 그래요?
그리고 나라는 것도
부처님도 나라는 말을 쓰고, 예수님도 나라는 말을 쓰지
자기가 자기를 가르치는데 나라고 해야지
그럼 나라는 말이 이걸 가르치는 건데
근데 문제는 봉황이 나라고 했다고 그래서
참새도 그 나는 에고인 나를 가르치는 거라고 해석한다고요.
그러니까 참새가 봉황의 뜻을 지 뜻대로 해석하고
이게 맞는 말이라고 막 매일 주일마다 설교를 해.
내가 마누라 따라 교회 다니다가
“저 목사가 구원받기 힘들겠구나, 저렇게 설교하면 안 되는데” 해서
그다음부터 요새 안 간 지 꽤 됐어요.
그래서 마누라가 왜 안 가냐고 난리를 치면
내가 그걸 설명을 해줍니다.
저 목사님 설교가 왜 잘못됐는지.
그럼, 마누라가 반박을 못 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나라고 하는 것 속에
이 나라는 건
다시 말하면 참나를 말하는 거예요.
거듭난 나
구원의 나
진리인 나
근데 그게 어떻게 아직 깨닫거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그 나를 예수의 나하고 똑같은 나라고
그렇게 함부로 참칭을 하냐고.
이게 참 한국교회는 참 큰 문제에 봉착해 있어요.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그래서 여기서 말한 나라는 거는
진짜 하나님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고.
성경에도 그런 말이 있잖아요.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
근데 이 나라는 게
그럼 예수라는 이 겉모습을 본 거라고 또 해석을 하는 거야.
근데 예수도 잘 생각해 봐요.
10살 때 있었고, 20살 때 있고, 30살 때도 있었어요.
35살에 돌아가셨지 아마.
그러면 그중에 어느 모습이야?
말이 안 되잖아요.
10살 때야? 20살 때야? 35살 때야?
그러니까 이런 걸 몰라요, 도무지.
그냥 눈에 보이는 것만 쫓아다니는 거야.
예수가 말한 나라는 거는
“영원한 생명을 가진
참 진리의 발현으로서의 나”라는 걸 말하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거를 만나고, 그걸 봐야
그래야 참 구원이 있고, 깨달음이 있고, 거기에 진리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생각 속에서 해석하면 안 되는 거야.
성경이든, 불경이든.
그건 다 한마디로 중생 버전이지
진리 버전이 아닌 거예요.
예수님도 그런 얘기를 하셨어요.
“내 안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 안에 내가 있다”
여러분도 여러분 안에 이미
영원한 생명의 진리가 있고
동시에 여러분이 그 안에 있어요.
예수님하고 똑같아요.
예수님은 그 길을 보여주신 건데
우리가 그 길은 안 가고
예수님의 말만 붙잡고 있는 거야.
이게 바로 오늘날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고
불교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법상을 버리란 말이 바로 그 말이에요.
“진리란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만 붙들고 있는 한
자기가 진리가 안 돼
왜?
생각하느라고 바빠서.
그러니까 생각이 만든 이 온갖 전도몽상, 망상을
거기에서 우리가 벗어나야 됩니다.
이게 핵심이에요.
그러면 그 핵심에서 벗어나려면
가장 중요한 첫 번째가 뭐냐 하면
여러분이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똑바로 봐야 돼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여러분 자기를 뭐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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